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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가루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아시가루 ( 日本語 : 足? 族頃 [ * ] 警報兵 )는 헤이안 時代 에서 에도 時代 까지 日本에 存在했던 步兵 의 一種이다. 現在의 二等兵 에서 兵長 에 이르는 兵士 階級의 軍人이며 사무라이 將校 의 役割을 했다.

起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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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가루를 構成하기 위한 첫 番째 試圖는 國軍 徵集兵을 가지려는 덴무 天皇 (673~686)에 依해 처음 施行되었다. 그러나 이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10世紀까지 日本은 個人 地主들에게 代身 紛爭이나 戰爭을 위한 兵士들을 제공받았다. 軍馬를 所有한 그 地主들은 사무라이 階級의 始初였으며 地主의 土地에서 從事한 사람들은 戰爭 時 一般的인 步兵이 되었다. 이들 步兵들은 地主들에게 많은 世代를 거슬러 올라가 긴 紐帶 關係와 忠誠을 가질 수 있었다. 土地를 所有한 사무라이는 1271年과 1281年 몽골의 日本 侵略을 包含하여 많은 戰爭과 紛爭에서 農民 步兵隊와 함께 싸웠다. 1300年代와 1500年代 사이의 끊임없는 戰鬪는 때때로 特別히 忠誠度가 없는 步兵을 雇用하는 것을 必要하게 만들었다. 戰利品으로만 報酬를 支給받는 이 傭兵 들은 잘 訓鍊되지 않았으므로 戰爭에서 恒常 依存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各地를 徘徊하는 이 步兵들은 結局 아시가루 가 되었다.

武器와 魴魚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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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가루 는 普通 羅綺나타 , , , 으로 武裝했다. 아시가루 甲옷은 非武裝부터 重武裝까지 時代에 따라 달랐으며, 징家事 라 불리는 옻漆과 담금질을 한 가죽, 鐵로 만들어진 圓뿔 模樣 帽子와 胸甲(도우 또는 두), 投球(可否土), 魴魚灸를 두른 頭巾(他타미 즈킨), 掌匣을 두른 소매(코테), 정강이받이(스네아테), 넓적다리받이(하이다테)로 構成될 수 있었다.

센고쿠 時代 (15世紀, 16世紀)의 戰鬪는 漸漸 늘어나는 아시가루 軍隊를 위해 많은 量의 甲옷을 製作하는 것을 必要로 했다. 접거나 구부릴 수 있는 他타미 甲옷을 包含하여 簡單한 軍需品 材質( 오카視 렌트 ), 胸甲(도우 또는 두), 投球( 可否土 )가 大量生産됐다. 他타미 甲옷은 普通 사슬 甲옷(쿠사리)에 依해 서로 連結된 작은 死角(카壘打) 또는 六角形(키코) 甲옷 販禁으로 만들어졌으며 안감에 꿰어졌다. 또한 16世紀 아시가루 종자도總 으로 알려진 形態의 火繩銃 으로 武裝했다. 社시모노 라고 불리는 작은 旗발은 戰鬪 동안 我軍의 識別을 위해서 等에 着用했다.

主로 아시가루는 黨勢鉤足 이라는 日本 甲옷 中 一部를 다이묘 에게 빌려 입는 形式이었다. 黨勢鉤足 에서 倍甲옷과 손목, 발목을 保護하는 部分 程度만 빌려입었으며, 投球는 眞家事 로 代替했다.

戰爭에서의 軍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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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닌의 난 에서, 미야코(現代의 교토 )를 掠奪하고 불태웠을 때 아시가루들은 다루기 힘든 軍隊라는 評判을 얻었다. 이어지는 센고쿠 時代 에서 戰爭의 樣相은 사무라이의 面對面 戰鬪로부터 아시가루의 集團 戰鬪으로 바뀌었다. 그럼으로써 아시가루는 戰鬪의 主要 兵力이 되었고 그들 中 몇 몇은 큰 名聲을 發揮했다.

아시가루의 統制權을 받은 兵士들은 아시가루가시라 라고 불렸다. 그들 中 가장 有名한 이는 自身의 많은 無事 追從者들을 사무라이 身分으로 상승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였다. 야마우치 가즈토요 는 그런 사무라이 中 하나였고 나중엔 아시가루에서 昇級한 다이묘가 되었다.

新武器와 새로운 戰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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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가루는 後期 時代에 사무라이 軍隊의 中樞를 造成했다. 아시가루에 對한 實際的인 變化는 1543年 포르투갈人들에 依해 導入된 火器로부터 始作했다. 地域 다이묘들은 거의 卽刻的으로, 아시가루를 習得하는 데 많은 時間이 걸리는 활에 비해 적은 訓鍊으로도 能熟하게 使用할 수 있는 새 武器로 무장시켰다. 戰鬪가 더 複雜해지고 規模가 커지자, 아시가루는 적 銃擊의 面前에서 隊列을 지키도록 嚴格히 訓鍊되었다.

다양하고 强力한 새 武器의 利點은 사무라이 戰鬪에서의 決定的인 役割을 證明했다. 이는 1575年 종자도總 으로 武裝한 아시가루를 配置했던 나가시노 戰鬪 에서 實現되었다. 이 아시가루들은 오다 家門 의 防禦線을 向한 다케다 重騎兵의 거듭된 突擊을 좌절시키고 다케다 陣營의 後方을 깨뜨리는 데 成功했다.

戰鬪 後, 軍隊에서 아시가루의 役割은 사무라이에게 强力한 補完策으로 統合되었다. 이러한 利點은 1592年과 1597年, 壬辰倭亂 丁酉再亂 때에도 活用되었다. 비록 첫番째 侵略에서 銃器(火繩銃)과 활의 比率은 2代1 이었지만 두番째 侵略에서는 銃器가 매우 效果的이었던 理由로 그 比率이 4代1이 되었다.

徵兵의 中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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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幕府 의 出現에 따라 아시가루의 雇傭은 이름만 남게 되었다. 職業群에 對한 아시가루의 變化는 오다 노부나가 以後로 進展되었기에 漸進的으로 아시가루는 農民으로부터 分離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朝鮮을 侵略 하기 위해서 아시가루를 徵兵 限界點에 到達할 程度로 過度하게 徵兵했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키가하라 戰鬪 에서 勝利를 한 以後 徵兵을 廢止했으며, 過度한 아시가루의 數字를 最小限만 남기고 除隊 시켰다. 에도 時代 에 접어들면서 日本에서는 아시가루의 地位가 固定되었고 200年 以上 番의 아시가루 雇傭은 行해지지 않았다. 아시가루는 몇몇 番(影池)에서는 사무라이 階級으로 여겨졌지만,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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