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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데오 모딜리아니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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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데오 클레멘테 모딜리아니 ( 이탈리아語 : Amedeo Clemente Modigliani , 1884年 7月 12日 ~ 1920年 1月 24日 )는 이탈리아 畫家 이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1918년에 촬영된 모딜리아니 사진
1918年에 撮影된 모딜리아니 寫眞
身上情報
出生 1884年 7月 12日 ( 1884-07-12 )
이탈리아 王國 리보르노
死亡 1920年 1月 24日 ( 1920-01-24 ) (35歲)
프랑스 第3共和國 파리
職業 畫家 , 彫刻家 , 데생畫가
國籍 이탈리아 王國
學歷 繪畫 藝術 아카데미
피렌체 美術 아카데미
베네치아 純粹藝術 아카데미
스승 조반니 派토리
콘스탄틴 브랑쿠시
分野 會話
思潮 現代 美術
同居人 비어트리스 헤이스팅스(1914~1916)
잔 에뷔테른 (1917~1920)
子女 盞 모딜리아니
主要 作品
Seated Nude , Ritratto di Lunia Czechowska con ventaglio , Jean Cocteau , Self-portrait , Portrait of Lunia Czechowska (1919) , Frontal portrait of Jeanne Hebuterne
影響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 폴 세잔 , 콘스탄틴 브랑쿠시 , 파블로 피카소
署名
墓碑
墓所 페르 라셰즈 墓地 (1920 - )
Grave of Amedeo Modigliani and Jeanne Hebuterne

生涯 編輯

1884年 이탈리아 王國 토스카나州 리보르노 에 있는 유대人 家庭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에虞祭니아는 哲學者 바뤼흐 스피노자 의 血統을 이어받은 마르세유 의 名門家 出身으로 높은 知性과 敎養을 갖추고 있었다. [1] 父親의 事業이 어려워지자 直接 단눈치오 의 詩를 飜譯하거나 書評을 써 生活을 維持할 程度였다. [1] 모딜리아니가 태어났을 當時 아버지의 事業 失敗로 집안은 어려웠지만 에虞祭니아는 어린 時節부터 그림에 對한 才能을 보인 아들을 굴리엘모 미켈리의 아틀리에에 데리고 가기도 했다. 그러나 모딜리아니는 肋膜炎, 肺結核, 肺炎 等 病치레가 잦아 平生을 苦痛받았다. 14歲에는 病으로 學校를 그만두었고, 17歲에는 結核에 걸려 이탈리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療養을 해야 했다. [2] 베네치아 · 피렌체 美術 學校에서 工夫한 모딜리아니는 1906年 파리 로 나가 몽마르트르 에 아틀리에를 빌렸고 세잔 의 影響을 받았다. 獨立 美術派에 屬하며, 파리 畫壇의 特異한 畫家로서 認定되었다. 彫刻도 하여, 브랑쿠시 , 콕토 等과도 사귀었다. 그러나 돌조각에서 나오는 먼지로 肺가 나빠지자 조각을 그만두고 그림만 그렸다.

1912年 파리 가을 美術展에 作品을 出品했지만 注目 받지 못했고 肖像畫 한 點 當 10프랑 밖에 받지 못했다. 그러나 美男으로 有名했던 모딜리아니에겐 모델을 自請하는 女性들이 많이 있었다. [3] 1917年 몽파르나스 의 카페에서 모딜리아니는 프랑스 에서 活躍한 우크라이나界 彫刻家 하나 오를로프의 紹介로 14歲 年下의 畫家 志望生 잔 에뷔테른 을 만났다. 盞은 모딜리아니와 같은 아틀리에를 쓰는 日本人 畫家 후지타 쓰구하루 의 모델이었다. 保守的인 부르주아 家庭이었던 盞의 家族은 가난하고 病弱하며 痲藥을 하는 유대人 모딜리아니와의 交際를 싫어했지만 두 사람은 同居에 들어갔다. 같은 해 모딜리아니는 폴란드 畫像 레오폴트 즈보로프스키의 周旋으로 個人展을 열었지만 猥褻的이라는 批判만 받은 채 展示會는 失敗로 돌아갔다. 이듬해인 1918年 모딜리아니는 盞과 니스 에서 療養을 했고 딸 지오바나를 얻었다. 1920年 파리로 돌아온 모딜리아니는 慈善 病院에서 結核性 腦膜炎으로 34歲에 夭折하였다. [2] 當時 妊娠 8個月째였던 盞은 모딜리아니가 죽고 이틀 뒤에 投身 自殺했다. 모딜리아니는 파리의 페르 라셰즈 墓地 에 묻혔고, 10年 뒤 盞의 家族들은 盞을 모딜리아니 곁에 묻어주었다. [4]

畫風 編輯

모딜리아니는 폴 세잔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 의 影響을 받았다. [2] 그는 恒常 人物만을 그렸는데 파리의 뒷거리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 및 女性의 裸體 等을 즐겨 그렸다. 그의 人物畫는 가늘고 긴 목이나 달걀 模樣의 얼굴을 가는 線으로 둘러 獨特한 氣品과 아름다움을 나타냈다. 모딜리아니는 總 314點의 作品을 남겼는데 主要 作品으로 <꽃 파는 少女> <門지기의 아들> <벌거벗은 에리부리> <폴 起用의 肖像> < 잔 에뷔테른 의 肖像> 等이 있다.

寫眞 編輯

各州 編輯

  1. 정석범 (2012年 9月 28日). ' 永遠의 美'를 꿈 꾼 모딜리아니, 그를 救한 19歲 少女” . 韓國經濟 . 2012年 12月 3日에 確認함 .  
  2. 박재선 (2011年 7月 17日). “‘猥褻 畫家’ 取扱받다 36歲 腰絶, 時代 잘못 타고난 天才” . 中央선데이 . 2012年 12月 3日에 確認함 .  
  3. 정영주 (2008年 3月 5日).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幸福하고 슬픈 사랑이야기” . 주간한국 . 2012年 12月 3日에 確認함 .  
  4. 김지석. “歷史 속의 人物 모딜리아니의 아내 盞 에뷔테른” . 每日新聞 . 2012年 12月 3日에 確認함 .  

外部 링크 編輯

같이 보기 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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