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獨逸의 哲學者 (1788?1860)
(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에서 넘어옴)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 獨逸語 : Arthur Schopenhauer , 獨逸語 發音 :? [?a??t??? ??oːp?n?ha???] ) 1788年 2月 22日 ~ 1860年 9月 21日 )는 獨逸 哲學者 다. 쇼펜하우어는 自身이 칸트 의 思想을 批判的으로 받아들였으며 칸트의 思想을 올바르게 繼承했다고 確信했다. 當代의 人氣 學者였던 헤겔 , 피히테 , 셸링 等에 對해서는 칸트의 思想을 歪曲하여 似而非理論을 펼친다며 批判했다. 쇼펜하우어가 博士學位 論文으로 쓴 < 充足理由律의 네 겹의 뿌리에 關하여 >는 哲學( 認識論 )의 古典이 되었다. 20代의 젊은 나이 때부터 數年 間 < 意志와 表象으로서의 世界 >를 쓰기 始作하여 1818年에 出刊하였다. 大學講義에서 헤겔 과 衝突한 後 大學敎授들의 派閥을 輕蔑하여 아무런 團體에도 얽매이지 않고 大學校 밖에서 줄곧 獨自的인 硏究活動을 持續하였다. 以後 自身의 哲學이 自然科學의 證明과도 맞닿아 있음을 < 自然에서의 意志에 關하여 >라는 冊에서 主張했다. 그 뒤에 倫理學에 對한 두 論文을 묶어 出版하였다. < 意志와 表象으로서의 世界 >가 出版된 지 26年이 지난 1844年에 改訂版을 出刊하였다. 以後 < 餘錄과 保有 >라는 人生 全般에 關한 隨筆이 담긴 冊을 出刊했고 이 冊은 쇼펜하우어를 有名 人士로 만들었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
學者 情報
出生
그단스크
死亡
프랑크푸르트
國籍 프로이센 王國
學歷 괴팅겐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大學校 (1809 - )
베를린 훔볼트 大學校 (1811 - )
Ernestinum Gotha
時代 19世紀 哲學
地域 西洋 哲學
學派
父母 Heinrich Floris Schopenhauer (簿)
Johanna Schopenhauer (某)
署名

쇼펜하우어는 1820年 代에 동양학자 프리드리히 마이어 를 통해 힌두敎와 佛敎에 關해 알게 되었다. 이 宗敎들의 核心敎理 속에 自身과 칸트가 到達한 結論과 같은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먼 過去의 東洋 思想家들이 西洋과는 全혀 다른 環境, 言語, 文化 속에서 近代的인 西洋哲學의 課題에 對해서 같은 結論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發見을 쇼펜하우어는 글로 써서 남겼고 西洋에서 最初로 東洋哲學의 세련된 點을 讀者들에게 알려주었다. 쇼펜하우어는 西洋哲學과 東洋哲學 間의 類似性을 말한 哲學者이자 自身이 無神論者임을 露骨的으로 表明한 獨創的인 哲學者로 손꼽힌다. 19世紀 末에 流行하여 많은 思想家들에게 影響을 끼쳤다. [3]

年譜 編輯

  • 1788年 2月 22日 유럽의 港口 都市인 단치히 에서 商人이었던 아버지 하인리히 플로리스 쇼펜하우어 와 小說家인 어머니 요한나 쇼펜하우어 의 長男으로 出生했다.
  • 1793年(5歲) 단치히 프로이센 에 合倂되자 家族이 함부르크 로 移住했다.
     
    쇼펜하우어가 살았던 함부르크의 집.
  • 1797年(9歲) 女同生 아델레가 出生했다. 아버지가 프랑스 르아브르 에 있는 親舊 집에 쇼펜하우어를 맡겼고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2年 間 지내며 프랑스語를 익혔다. 아버지는 쇼펜하우어가 프랑스語를 確實히 익히길 願했고 結果에 만족스러워했다.
  • 1799年(11歲) 프랑스에서 돌아와 商人 養成機關인 룽게 博士의 私立學校에 入學했고 이곳에서 4年 間 工夫했다. 아버지는 쇼펜하우어가 自身의 뒤를 이어 事業家가 되기를 希望했다.
  • 1800年(12歲) 아버지와 함께 하노버 , 칼스바트 , 프라하 , 드레스덴 을 旅行했다.
  • 1803年(15歲) 商人이 되라는 아버지의 勸誘로 온 家族과 함께 유럽 旅行을 했다. 이 旅行은 商人이 되기 싫어하는 쇼펜하우어를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런던에 到着하여 新婦 랭카스터의 집에서 머물며 英語를 익혔다.
  • 1804年(16歲) 프랑스를 旅行했으며 다시 스위스, 빈, 드레스덴, 베를린을 거쳐 돌아왔다. 쇼펜하우어는 旅行 途中에 思索하며 많은 日記를 썼는데 眞摯한 苦悶이 많았다. 단치히 에서 商人 實習을 始作했으나 無關心했다. 이 時期에는 아버지의 書齋에 드나들며 文學, 數學, 歷史 等을 獨學했다.
  • 1805年(17歲) 아버지가 倉庫 通風窓에서 떨어져 死亡했다. 自殺한 걸로 推定됨.
  • 1806年(18歲) 아버지 死亡 後, 家族이 바이마르 로 移住했다. 쇼펜하우어만 함부르크 에 남아서 商人 實習을 持續했다. 쇼펜하우어는 몰래 勤務地를 離脫하여 骨相學 으로 有名한 프란츠 요제프 갈 의 公開講演을 들으러 가기도 했고 아버지의 希望대로 商人이 될 생각은 없었다.
  • 1807年(19歲) 어머니의 勸誘로 商人 實習을 中斷한 後에 고타 에 있는 김나지움 에 入學했다. 라틴語 그리스어 를 엄청난 熱情으로 學習했다. 古典語 를 가르친 敎師들은 쇼펜하우어가 未來에 뛰어난 古典學者가 될 것이라고 稱讚했다. 쇼펜하우어는 1年도 못가 김나지움을 自退했다.
     
    폴란드 그단스크(옛 단치히) 쇼펜하우어의 生家.
  • 1808年(20歲) 쇼펜하우어는 에르푸르트 를 訪問했다. 마침 프랑스 皇帝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이 國際會談에 參席하기 위해 머물고 있었다. 어느 劇場에서 나폴레옹이 主催한 演劇들이 공연되었는데 쇼펜하우어는 觀覽할 機會를 얻었다. 演劇이 始作되기 前에는 나폴레옹에게 辱說을 해대더니 演劇이 끝난 後에는 나폴레옹에게 極讚을 해대느라 호들갑떠는 女性觀客들(地位 높은 貴族女性들)을 쇼펜하우어는 辛辣하게 非難했다.
  • 1809年(21歲) 괴팅겐大學校 醫學部에 入學함. 한 學期 동안 醫學을 工夫했지만 哲學 에 더 興味를 두었다. 大學에서 化學, 物理學, 天文學, 數學, 言語學, 法學, 歷史 等 여러 講義에 積極 參與해서 工夫함. 집에 돌아와서도 思索하며 꼼꼼히 工夫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學校의 몇몇 淺薄한 敎授들의 講義보다도 이미 竹篙없는 過去의 爲人들이 남긴 作品들이 더 價値있을 때가 많다고 생각했다. 講義에 對한 個人的인 感想文과 論評을 많이 썼으며 몇몇 敎授들의 意見을 批判하고 論理的으로 박살내려는 發言을 서슴지 않았다. 쇼펜하우어는 自身이 習得한 當代의 自然科學 的인 知識을 土臺로 哲學的인 생각을 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 1810年(22歲) 哲學者인 고틀로프 에른스트 슐체 (Gottlob Ernst Schulze)의 講義를 들었다. 슐체에게 特히 플라톤 칸트 를 깊이 硏究해보라는 助言을 들었다. 스승 슐체의 眞摯한 助言은 쇼펜하우어에게 큰 影響을 끼침.
  • 1811年(23歲) 어머니가 當時 獨逸 文學界의 巨匠인 크리스토프 빌란트 에게 쇼펜하우어가 哲學 專攻을 못하도록 說得해줄 것을 付託함. 78歲인 빌란트는 23歲의 쇼펜하우어와 만나서 說得은커녕 쇼펜하우어의 態度에 感銘받아 仔詳한 助言과 激勵를 해주었다. 結局 쇼펜하우어는 제대로 哲學을 工夫하기로 決心함. 가을에 베를린大學校 (現 베를린 훔볼트 大學校 )로 轉學했다. 베를린대학에서는 動物學, 地理學, 天文學, 生理學, 詩學, 魚類學, 植物學, 藻類學 等 여러 講義를 들음. 피히테 의 講義를 熱心히 들었다. 當代의 有名 學者였던 셸링 , 피히테 의 思想을 工夫했으나 會議를 품고 이들을 嫌惡하게 되었으며 後에 自身의 著書에서 이를 대놓고 드러내었고 日記에도 批判하는 글을 썼다. 特히 피히테에 對해서는 "大衆 앞에서 雄辯을 吐해내며 眞摯한 表情으로 深奧한 思想家인 척하는 詐欺꾼" 程度로 評價했다. 反面에 스승과 弟子로서 서로 잘 통한 일도 있었는데 바로 古典學者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볼프 의 講義였다. 볼프가 主導하는 古代 그리스 歷史와 哲學 講義에 쇼펜하우어는 尊敬心을 표했다.
  • 1812年(24歲) 플라톤 , 임마누엘 칸트 等 여러 思想家를 本格的으로 探究함. 베이컨 , 존 로크 , 데이비드 흄 等의 英國 思想家를 깊이 探究함. 슐라이어마허 의 講義를 熱心히 들었지만 매우 失望하고 말았다.
  • 1813年(25歲) 오스트리아 , 프로이센 , 러시아 聯合軍과 프랑스 나폴레옹 軍隊 사이에 戰爭이 再發했다. 쇼펜하우어 베를린 을 떠나서 壘돌슈타트 에서 學位 論文인 < 充足 理由律의 네 겹의 뿌리에 關하여 >를 完成했다. 이 冊은 쇼펜하우어 思想의 基礎가 되는 冊이다. 이 論文을 예나 튀링겐 州立大學校에 提出하여 哲學 博士學位를 얻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에게 自身의 博士學位 論文을 贈呈했다. 괴테는 이 論文을 보고나서부터 쇼펜하우어 를 제대로 支持하였다. 數個月 동안 괴테 와 交際하며 色彩論에 關해서 硏究하고 討論했고 괴테는 硏究에 必要한 支援을 많이 해주었다. 괴테는 가끔 쇼펜하우어를 自己 집에 招待해 다양한 主題를 놓고 對話를 나누었다. 바이마르 의 公共圖書館에서 아시아 關聯 雜誌를 읽고 探究하기 始作했다.
  • 1814年(26歲) 바이마르 의 公共圖書館에서 < 우파니샤드 >의 라틴語 飜譯本 < 우프네카트 >를 읽고 探究했다. 어머니와 쇼펜하우어는 深刻한 葛藤을 겪었고 이 일 以後로 다시는 만나지 않았으나 便紙交流는 가끔했다.
  • 1816年(28歲) 괴테 와 色彩論에 關해 交流하여 얻은 結實인 < 視角과 色彩에 關하여 >가 發表되었다. 이 論文에서 쇼펜하우어는 自身의 實驗을 土臺로 뉴턴 의 色彩論과 괴테 의 色彩論을 批判하기도 했다. 괴테는 弟子에게 批判받은 이 일을 베를린의 親舊 슐츠에게 便紙로 알렸고 若干 언짢았으나 쇼펜하우어를 대견스러워했다.
  • 1818年(30歲) 一生의 力作 < 意志와 表象으로서의 世界 >를 完成했다. 自身의 冊이 歷史的 意義가 있다는 것을 確信하던 쇼펜하우어는 1年 동안 100卷밖에 팔리지 않자 自身의 冊을 몰라보고 無視하는 態度를 取하는 同時代 敎授들에 對한 憎惡心이 차올랐다. 쇼펜하우어는 괴테의 며느리(吳틸리에)와 親分이 있던 自己 女同生의 便紙를 통해 괴테가 이 冊을 만족스럽게 읽었다는 것을 알았다. 괴테는 쇼펜하우어를 直接的으로 稱讚하지는 않았다. 冊 出版을 記念삼아 이탈리아 로 旅行했다. 1819年 봄에는 나폴리 를 訪問했다. 나폴리에서는 英國 靑年들과 交流했다. 쇼펜하우어는 英國을 平生 동안 憧憬했으며 英國人들조차 쇼펜하우어가 英國人인 줄 알 程度로 完璧한 英語發音을 驅使했다. 어머니가 破産危機에 處하자 速히 歸國하여 도와주웠으나 어머니는 쇼펜하우어의 忠告를 無視하다가 狼狽를 겪고 말았다.
  • 1819年(31歲) 베를린大學校 (現 베를린 훔볼트 大學校 )에 講師職을 支援했다. 헤겔 의 講義 時間과 같은 時間에 講義할 것을 希望했다.
  • 1820年(32歲) 採用 與否가 決定되는 示範 講義에서 通過함. 當時 50살이었던 老鍊한 헤겔이 쇼펜하우어와 講義 中에 若干 論爭했다. 講義 計劃은 1820~1822, 1826~1831年까지 樹立돼 있었지만 人氣가 없어서 한 學期만에 끝남. 以後 쇼펜하우어는 自身의 著書 곳곳에서 헤겔, 피히테같은 講壇學者에 對한 不滿을 表出했고 夢想的인 理論을 퍼트려서 大衆을 속여먹는 低劣한 詐欺꾼, 大衆들의 頭腦를 害치는 넌센스 三流作家, '徹底히 無能하고 奸邪한 大學敎授 牌거리'의 頭目이라며 非難했다. 例를 들면 쇼펜하우어는 自己 冊에서 獨逸 젊은이들과 自己 世代 사람들이 헤겔의 理論을 工夫하느라 頭腦 를 損傷시켰고 人生을 虛費했다며 매우 恨歎하고 있다. 더군다나 헤겔의 理論은 當代의 支配理念으로 君臨하며 政治에도 影響을 주고 있었다. 結局 쇼펜하우어는 哲學이라는 것을 大學校에서 講義한다는 것 自體가 不適合하다고 여겼고 敎授들의 派閥 自體를 憎惡했다. [4]
  • 1822年(34歲) 이탈리아 로 旅行했다. 이탈리아의 文化, 藝術, 環境을 經驗하고 이에 對해서 배우고 記錄했다.
  • 1823年(35歲) 旅行을 마치고 獨逸로 돌아옴. 여러 疾病과 聽覺障礙를 겪었는데 가장 鬱寂한 時期를 보냈다. 뮌헨 에서 겨울을 보냈다.
  • 1824年(36歲) 街슈타인(스위스), 만하임, 드레스덴에서 滯留함. 쇼펜하우어는 "멀쩡히 잘 걷는다는 事實만으로 나와 水準이 對等하다고 여기는 人間들과 可及的 사귀지 않기로 決心했다"고 日記에 쓰며 孤獨한 心情을 드러냈다. 겨울에 데이비드 흄 의 <宗敎의 自然死>와 <自然宗敎에 關한 對話> 等을 飜譯할 計劃이었으나 도와줄 出版社를 求하지 못하고 말았다. < 意志와 表象으로서의 世界 >에 對한 惡評이 좀 나오기도 했으나 作家 張 파울 은 好評했다.
  • 1825年(37歲) 베를린으로 돌아와 憂鬱한 나날 속에서 스페인語를 熱心히 學習해나갔다. 飜譯家로서 스페인語冊을 飜譯하기도 함. 言語能力만큼은 나날이 좋아졌는데 예전에 익힌 그리스語, 라틴語, 프랑스語, 英語, 이탈리아語 外에 스페인語에도 매우 익숙해졌다.
  • 1831年(43歲) 이 해에 콜레라가 베를린에 퍼지자, 베를린을 떠나서 프랑크푸르트로 移住하여 餘生을 보냈다.
  • 1833年(45歲) 프랑크푸르트에 제대로 定着함. 流行이 지난 옷을 恒常 입고 다녔으며 愛玩犬을 데리고 定해진 時間에 散策을 했고 혼잣말로 異常한 소리를 하기도 하여 프랑크푸르트 住民들의 稀罕한 구경거리가 됨. 쇼펜하우어의 著書가 사람들의 關心을 받고 徐徐히 알려지기 始作. 쇼펜하우어는 꼭 必要한 境遇를 除外하고는 집밖에 나돌아다니지 않기로 決心했다. 이 쯤에 쇼펜하우어는 女同生과 어머니와 便紙交流를 했고 作品活動으로 나날을 보내던 어머니는 아들을 걱정하는 便紙를 보냈다.
  • 1835年(47歲) 프랑크푸르트에서는 世上을 떠난 괴테를 위해 記念碑 建立 計劃을 세웠다. 쇼펜하우어는 當局에 괴테 記念碑에 關한 建議書를 提出했다. 人類를 위해 온몸으로 活動한 政治人들, 軍人들, 改革者들같은 爲人들을 記念하려면 全身像으로 해야하지만 머리를 써서 寄與한 文學家, 哲學者, 科學者들을 記念하려면 胸像을 製作하는 것이 좋다는 主張이었다. 하지만 이 意見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完成된 괴테의 全身像 記念碑는 매우 볼품없었고 後날 美術史學者 프란츠는 이 記念碑에 對해 '國家的 災殃'이라는 酷評을 내렸다.
  • 1836年(48歲) 自然科學이 證明해낸 것과 自身의 學說이 一致한다는 생각을 反映한 < 自然에서의 意志에 關하여 >를 出版. 매우 꾸준히 學問에 邁進했다.
  • 1837年(49歲) 쇼펜하우어는 < 純粹理性批判 > A版(1板)을 B(2板)判보다 重視하여 칸트全集 出版에 介入했다. 칸트全集 出版에 關與한 로젠크란츠 敎授는 쇼펜하우어의 建議事項을 받아들여 1板 原稿를 실어 出版했다. 노르웨이 王立 學術院의 現象論文 募集에 應募하기로 決定함.
  • 1838年(50歲) 母親 요한나 쇼펜하우어가 72살의 나이로 死亡함. 덴마크 王立 學術院의 現象論文 募集 公告를 보고 應募하기로 決定함.
  • 1839年(51歲) 現象論文 <人間意志의 自由에 關하여>를 가지고 노르웨이 王立 學術院으로부터 受賞함.
  • 1840年(52歲) 現象論文 < 道德의 基礎에 關하여 >를 가지고 덴마크 王立 學術院에 單獨으로 志願했지만, 學術院은 '이 時代의 대단한 哲學者들'인 헤겔, 피히테 等을 非難했다는 等의 理由로 不當한 判定을 했고 殊常하지 못함. 以後 쇼펜하우어는 '하찮은 判定'이라 取扱했고 이 判定에 反論하는 글을 追加하여 冊으로 出版했다. 헤겔 을 深刻하게 非難한 것은 認定하지만 헤겔이 '대단한' 哲學者라는 것은 認定하지 못한다고 主張했다.
  • 1841年(53歲) 두 現象論文을 묶어서 <倫理學의 두 가지 根本問題>를 出版함.
  • 1842年(54歲) 女同生 아델레를 20年滿에 만남.
  • 1844年(56歲) < 意志와 表象으로서의 世界 > 第2판이 完成됨. 第1版의 裁判과 함께 出版함.
  • 1845年(57歲) <餘錄과 保有>[Parerga und Paralipomena]를 쓰기 始作함.
  • 1846年(58歲) 율리우스 프라우엔슈타트 가 쇼펜하우어를 만나 弟子로 지냈는데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의 熱血 追從者다. 特히 法曹人들이 熱血팬이 되었는데 이들은 <觀念論의 잘못된 根據>에 "世界가 後悔의 눈물을 떨구며 다시 한番 쇼펜하우어의 이름을 새길 날이 올 것"라고 썼다. 쇼펜하우어는 判事 요하네스 베카라는 사람이 自身의 思想을 깊이 理解하고 있으나 그것을 글로 쓰지 않았다며 아쉬운 마음을 드러냄.
  • 1847年(59歲) < 充足理由律의 네 겹의 뿌리에 關하여 >의 改訂版을 出刊. 이 冊에서 飜譯을 批判하며 可及的 解說書도 參考하지말고 그 나라 言語를 배워서 願書를 볼 것을 强調한다.
  • 1849年(61歲) 女同生을 마지막으로 만남. 女同生 아델레가 死亡함.
  • 1851年(63歲) < 意志와 表象으로서의 世界 >의 '附錄'이라 할 수 있는 < 餘錄과 保有 >(Parerga und Paralipomena)를 數 年間 執筆한 끝에 出刊函. 出版社의 暗鬱한 豫想과는 달리 이 作品은 얼마못가 쇼펜하우어의 冊들 中에서 가장 人氣를 끌었고 많이 팔려나갔다. 特히 쇼펜하우어는 젊은 讀者들을 念頭에 두고 이 冊을 썼다.
  • 1853年(65歲) 英國 의 獨逸語冊 飜譯家인 존 玉센포드 쇼펜하우어 의 思想을 '웨스트 민스터 리뷰'에 紹介하여 最初로 英國에 쇼펜하우어를 알림. 獨逸의 女性 言論人 린트나 가 이를 다시 獨逸語로 飜譯하여 베를린의 포스新聞 에 發表하였다.
  • 1854年(66歲) <自然에서의 意志에 關하여> 改訂版을 出刊. 이 冊에서도 쇼펜하우어는 헤겔과 헤겔의 '敎授 派閥' 때문에 獨逸 哲學界가 汚染되었다고 엄청난 批判을 하며 大學校에서 哲學을 배우려는 것은 人生浪費에 不過하니 自身의 思想과 칸트의 思想을 工夫하라는 忠告를 한다. 이 때의 心情을 이렇게 表現했다. "지난 40餘年 間 獨逸에서 哲學이라는 이름으로 行해진 詐欺劇을 사람들이 눈치챘고 앞으로도 繼續 그럴 것이다. 칸트 以後에 登場한 奸邪한 詐欺꾼들이 써낸 哲學書籍들과 寒心한 論爭들을 통해 하나의 眞理라도 밝혀졌는지가 드러날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가장 하찮은 哲學敎授라 불렀던 셸링 이 死亡했다. 리하르트 바그너 가 쇼펜하우어에게 '니벨룽겐의 半指'의 憲政本을 보냈다. 쇼펜하우어가 바그너 를 알게 됨. 바그너 는 쇼펜하우어에게 酷評을 받고 冷待받았으나 介意치 않고 기뻐했다.
  • 1855年(67歲) 라이프치히 大學의 哲學科가 '쇼펜하우어 哲學 原理에 對한 解明과 批判'이라는 現象 課題를 提示함. 여러 大學에서 쇼펜하우어의 思想 關聯 講義가 開設되기 始作함.
  • 1857年(69歲) 쇼펜하우어에 對한 講義가 本隊學校 브레슬라우大學校 에 開設됨. 쇼펜하우어의 몇몇 冊이 英國, 프랑스에 飜譯됨. 쇼펜하우어는 이 時節의 心情을 詩的으로 이렇게 表現했다. "나는 이제 旅程의 目的地에 지쳐 서 있다. 지친 머리는 月桂冠을 쓰고 있기도 힘들구나. 그래도 내가 했던 일을 기쁘게 돌아보는 것은 누가 뭐라 하든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라" 프리드리히 니체 는 1888年에 이 詩에 對해 이런 말을 남겼다. "그가 가르친 것은 지나갔으나 그가 살았던 것은 남으리라. 이 사람을 보라. 그는 누구에게도 屈服하지 않았노라" 프랑크푸르트의 어느 博覽會를 구경했다. 유럽에는 매우 드문 오랑우탄 한 마리가 展示되었다. 자주 찾아가서 觀察했으나 觀察할 機會를 너무 늦게 만났다며 恨歎했다. 쇼펜하우어는 自身의 親舊들에게 오랑우탄을 볼 機會를 꼭 잡으라고 促求했다.
  • 1858年(70歲) 쇼펜하우어 70살 生日 파티가 열렸고 新聞 記事에도 生日파티 消息이 실렸다. 유럽 各地에서 쇼펜하우어를 만나기 위해 손님들이 찾아왔다. 베를린 王立學術원에서 쇼펜하우어를 뒤늦게 會員으로 推戴하고자 했지만 쇼펜하우어는 나이가 많다는 等의 理由로 拒絶했다.
  • 1859年(71歲) < 意志와 表象으로서의 世界 > 第3판이 出刊됨.
  • 1860年(72歲) 9月 21日 金曜日 아침, 肺炎 症狀을 겪었고 프랑크푸르트 自宅에서 死亡했다. [5]
 
1815年 靑年期의 쇼펜하우어

認識論 編輯

充足理由律 編輯

쇼펜하우어는 自身의 哲學論文에서 모든 學問의 基礎인 充足理由律 ( 充分根據율 이라고도 불린다)의 種類가 區分되어야 한다는 것을 强調한다. 于先 쇼펜하우어는 옛 哲學者들이 認識理由 原因 을 混同했다는 事實을 指摘한다. 特히 그는 이 混同을 데카르트 스피노자 가 意圖的으로 犯했는지 詳細히 說明한다. 데카르트는 原因이 要求되는 곳에 認識理由를 밀어넣어서 神의 現存에 對한 存在論的 證明 의 길을 만들었고, 스피노자는 이 混同을 汎神論 의 基礎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라이프니츠 充足理由律 이 모든 學問의 核心原則이라는 것을 最初로 提示했지만, 理由律 의 두가지 意味를 分明히 說明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두 理由律의 差異를 처음으로 說明한 것은 크리스티안 볼프 다. 그러나 볼프는 認識의 充足理由律과 原因作用의 充足理由律의 差異를 明白히 規定하지는 않았다. 칸트 가 "모든 命題는 그것의 理由를 가져야한다"는 認識의 論理的 原則과 "모든 事物은 그것의 理由를 가져야 한다"는 先驗的 原則을 區分할 것을 强調한 以後에 비로소 認識理由 原因 이 正確히 區分되었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認識理由와 原因間의 區分 外에 두 가지의 理由를 더 區分하여 生成, 認識, 存在, 行爲라는 네 가지 充足理由律을 提示한다. 充足理由律은 表象 (Vorstellung)으로서의 世界가 따라야 하는 法則이다. 生成의 理由律은 表象들을 因果的 方式으로 必然的으로 結合시키는 原理이고, 認識의 理由律은 表象들을 槪念的으로, 存在의 理由率은 表象들을 空間的-時間的으로, 行爲의 理由律은 表象들을 動機에 依해 必然的으로 結合시키는 原理다. 이와 같은 充足理由律을 解明함과 同時에 쇼펜하우어는 理由率이 適用될 수 없는 物自體 의 世界에까지 事由의 領域을 擴張하려는 當代의 講壇哲學 , 卽 헤겔 같은 學者들의 行態를 批判한다. 이로써 쇼펜하우어는 칸트哲學의 本來的 意味가 現實的으로 歪曲되고 있다는 것을 指摘한다.

生成의 充足理由律과 關聯하여 쇼펜하우어는 最初原因 이란 있을 수 없다고 主張한다. 모든 原因은 하나의 變化로서, 因果關係를 把握한다는 것은 變化에 先行하는 變化를 無限히 찾는 것을 의미하므로, 變化하지 않는 質料 의 最初狀態는 생각될 수 없다는 것이다. 最初原因( 第1원인 이라고도 불린다)으로서의 神을 設定하는 宇宙論的 證明 을 칸트가 論破했는데도 " 絶對者 "가 最初原因으로 提示되는 것을 쇼펜하우어는 强力히 批判한다. 因果關係에 對한 旣存의 廣範圍하고 曖昧한 表現은 숨겨진 神學的 意圖에서 起因하며, 變化에 先行하는 實體를 原因으로 看做하는 것에는 神學者들의 意圖가 反映되었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物質과 自然力이 모든 因果關係에서의 本質이라고 본다. 物質은 모든 變化의 膽智者이며, 自然力은 모든 變化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認識의 充足理由律과 關聯하여 쇼펜하우어는 오성 (Verstand)에 依해 만들어진 表象을 結合하는 異性 (Vernunft)의 役割만을 認定하고 '實在를 直接的으로 認識하는 理性의 能力'을 否定한다. 우리의 認識에 있어서 經驗으로부터 獨立的인 先天的인 것은 認識의 形式的 部分에 制限되어 있을 뿐, 認識의 材料는 例外없이 外部로부터, 卽 感覺으로부터 始作하는 物體系에 對한 客觀的 直觀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 直觀을 槪念으로 加工하는 것이 理性이다. 따라서 理性은 全혀 아무런 內容도 갖고 있지 않고 形式을 가질뿐, 內容은 全的으로 外部로부터, 卽 오성이 만들어낸 直觀的 表象으로부터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다.

存在의 充足理由律과 關聯하여 쇼펜하우어는 空間과 時間에서의 關係들이 單純한 槪念을 통해서가 아니라 先天的 純粹直觀을 통해서만 理解될 수 있다는 것을 强調한다. 存在의 理由는 先天的으로 주어진 直觀 안에서 直接的으로 提示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幾何學的 命題의 眞理가 認識理由에 依存하지 않고, 直觀을 통해 認識된 存在理由에 依해 비로소 確證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幾何學的 命題는 直觀으로 소급되고, 幾何學的 證明은 오직 直觀에 左右되는 關係를 드러내는 것에서 成立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實際로 提示되는 幾何學의 證明에서는 整理를 위한 證據로 認識理由가 주어질 뿐, 直觀을 媒介로 하는 先驗的 眞理가 提示되지 않음으로써 整理에 對한 確信이 提供되지 않는다는 것을 指摘한다.

行爲의 充足理由律과 關聯하여 쇼펜하우어는 事物의 本質에 接近하는 全혀 다른 方式의 認識에 對해 말한다. 그것은 認識하는 主體가 의욕하는 自身을 直接的으로 認識하는 方式이다. 쇼펜하우어는 우리 自身의 모든 決定에 對해서도 우리는 "왜?"라고 質問할 수 있다고 본다. 行爲의 決定에는 行爲의 動機가 반드시 先行하며, 動機가 없다면 行爲는 생각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外部에서 加해지는 힘이 없다면 生命없는 物體의 움직임을 생각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同期도 原人에 屬한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行爲의 動機만이 갖는 特性을 이야기한다. 다른 原因에서와는 달리 行爲의 動機에 對해서는 內部로의 洞察이 可能하다는 것이다. 모든 原因은 事件의 條件이지만 外部로부터 添加되는 것이어서 事件의 內部는 우리에게 祕密로 머무른다. 우리는 原因이 必然的으로 作用을 일으키는 것을 보지만, 무엇이 그 內部에서 일어나는지를 經驗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機械的, 物理的, 化學的 作用, 그리고 刺戟의 作用이 그 原因에 언제나 따르는 것을 보지만, 한 番이라도 그 事件을 徹底히 理解하진 못하고, 그것을 物體의 性質, 自然力, 生命力의 功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內部로의 洞察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 自身의 行爲에 對해서도 原因이 어떤 方式으로 作用하는지를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自身의 內的 經驗으로부터 自身의 意志作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動機의 作用이 다른 原因들과 같이 外部로부터 間接的으로 認識되는 것이 아니라 內部로부터 直接的으로 認識되기 때문이다. 動機에 있어서 우리는 全혀 다른 길에서 全혀 다른 方式으로 原因이 가장 內部의 本質에 따라 作用을 일으키는 方法의 祕密을 經驗한다. 因果性은 여기서 全혀 다른 種類의 認識을 위해 全혀 다른 方式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適用되는 因果性을 쇼펜하우어는 行爲의 充足理由律이라고 부른다.

行爲의 充足理由律은 認識하는 主體에 適用되는 理由律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認識主體는 自身을 오직 의욕하는 것으로서 認識한다. 意欲은 우리의 모든 認識에서 가장 直接的인 것이다. 意欲의 主體는 自己意識에 直接的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지 詳細히 說明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意欲이 갖는 直接性은 間接的인 모든 것에 빛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因果法則의 先天性과 悟性의 直觀能力 編輯

因果槪念의 先天性에 對한 證明은 <意志와 表象으로서의 世界>에는 敍述되지 않은 內容이며 博士論文에 들어있다.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悟性의 因果槪念이 經驗的 直觀에서 이미 適用되며 따라서 直觀은 悟性의 作用이라는 것을 自然科學의 事例를 들어 經驗的으로 證明한다. 感覺은 直觀의 材料들만을 提供하며 感覺이 주는 資料를 바탕으로 物體의 形態, 크기, 거리와 性質을 構成해내는 것은 悟性의 作業이라는 것이다. 例를 들어 先天性 盲人들이 感覺을 갖지 않고도 空間的 關係에 對해 完璧히 알고 있는 事實로부터 直觀이 感覺이 아니라 悟性의 作用이라는 結論이 導出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時間, 空間, 因果性은 經驗으로부터 習得되지 않고 人間의 知性에 그 根源을 갖는다.

쇼펜하우어는 自身의 主張 根據로서 時刻 의 過程을 重點的으로 考察한다. 쇼펜하우어는 視角이 感覺에서 成立한다면, 우리는 對象의 引上을 거꾸로 知覺하게 될 것이라는 點을 指摘한다. 왜냐하면 視角의 過程에 있어서 感覺이 提供하는 것은 網膜의 다양한 刺戟에 지나지 않는데, 網膜에서 客觀의 引上은 거꾸로 맺히기 때문이다. 網膜에 거꾸로 맺히는 客觀의 印象을 다시 똑바로 세우는 것은 悟性이 하는 最初의 일이다. 오성은 感覺된 結果를 因果法則에 依해 그 原因과 관련시킴으로써 外部의 客體를 그대로 描寫한다는 것이다.

두 番째 悟性作用은 各各의 눈에 依해 두 番 感覺된 것을 한 番 直觀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의 物體를 열 個의 손가락으로 만질 때 各各의 손가락이 다른 印象을 獲得하듯이 우리의 두 눈도 對象에 對해 다른 印象을 獲得하지만, 오성이 이 印象들을 總括的으로 把握하여 하나의 物體에서 연유하는 것으로서 認識한다는 것이다. 이 過程에서 引上이 二重的일지라도, 오성에게는 그 두 引上의 原因이 하나의 客體로서 簡單히 把握된다는 것이다.

세 番째 悟性作用은 平面으로부터 物體를 構成하는 것이다. 보는 것에서의 感覺은 單純히 平面幾何學的이지만, 直觀에서 立體幾何學的인 모든 것은 悟性에 依해 最初로 添加된다는 것이다. 2次元의 感覺에 오성이 3次元을 添加함으로써 對象을 모든 位置와 狀況 안에서 認識하는 것이 可能해진다는 主張이다. 나아가 客體들이 우리로부터 떨어져있는 距離에 對한 認識은 오성의 네 番째 作用에 依해 成立한다. 客體가 놓여있는 方向을 提供하는 것은 感覺이지만, 그 거리는 悟性에 依해 因果的 規定들로부터 비로소 導出될 수 있다는 것이다. 例를 들어 同一한 視角에서 客體는 작고 가까이 있거나 크고 멀리 있을 수 있는데, 오성은 더 먼 距離에 있는 對象이 가까이에 있는 對象보다 視覺的으로 작게 나타날지라도 그 크기를 올바로 把握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視角의 過程에 있어서 悟性의 機能을 仔細히 說明함으로써 쇼펜하우어는 直觀이 知的이며, 單純히 感覺的이지만은 않다는 主張을 했다. 그 過程에서 主導的으로 活動하는 것은 오성이며, 感覺은 오성에게 資料를 提供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新生兒에게 客觀的 世界는 感覺作用이 反復된 以後에 悟性作用이 習得됨으로써 비로소 나타나며, 先天性 盲人들度 手術 直後에 빛, 色, 輪廓을 보지만 오성이 因果法則을 適用하는 것을 그는 詳細히 說明한다. 이와 같은 오성의 作業은 因果法則을 통해 直接的이고 直觀的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쇼펜하우어는 이 悟性作用을 頭腦 의 作用이라고 主張한다. 그에 따르면 腦葉을 除去해도 知覺만 破壞될 뿐 感覺은 그대로 成立한다는 것은 直觀의 指摘 性質을 證明하는 生理學的 事實이다. 이를 通해 感性은 知性과 다르고, 表象은 感覺과 다르다는 事實이 證明되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쇼펜하우어는 古代哲學에서도 直觀의 指摘性質이 통찰되었으며, 이 洞察에 依해 古代人들은 動物도 知性을 갖는 것으로 믿었다고 主張한다. 直觀은 知性的인 것이므로 知覺하는 것은 모두 知性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動物은 오성認識, 卽 因果法則에 對한 認識을 가져야 하며 해파리조차 오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感覺過程에 對한 나름대로의 分析을 통해 經驗的 直觀이 오성의 作品이라는 것을 提示했다. 여기서 오성의 作業은 주어진 作用들의 原因으로 넘어가는 데서 成立한다. 原因은 오성의 作業을 통해 비로소 客體로서 空間 안에 나타나며, 이를 위한 前提는 因果法則이다. 따라서 因果法則은 悟性 自身으로부터 添加되며 決코 밖에서 올 수 없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因果法則이 經驗에서 由來한다고 보는 經驗主義 의 誤謬를 批判한다. 英國 哲學者 존 로크 가 처음으로 모든 實在性을 否定하였고, 그래서 데이비드 흄 은 因果關係의 實在性을 否定했다는 것이다. 身體의 部分에 對한 意志의 作用과 物體의 抵抗이 因果槪念의 根源이라는 흄의 主張을 쇼펜하우어는 受容하지 않는다. 意志作用과 身體活動은 同一한 하나로서 때로는 意志作用으로, 때로는 身體作用으로 知覺된다는 것이다. 또한 單純한 感覺은 因果槪念은 勿論이고 아무런 直觀도 提供하지 않으므로 흄의 두 番째 假說도 틀렸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모든 知覺이 因果性에 對한 認識을 前提하므로 因果理論 뿐만 아니라 칸트 의 證明에도 틀린 點이 있다고 主張한다. 勿論 쇼펜하우어의 이러한 主張들을 現代 心理學 의 觀點에서 볼 때 터무니없어 보이는 點이 있으나 쇼펜하우어를 비롯한 옛 哲學者들이 남긴 思想的 遺産은 나름대로의 役割을 忠實히 遂行하였고 歷史的으로도 큰 意味가 있다.

칸트의 證明에 對한 批判 編輯

쇼펜하우어는 認識에서의 先天性에 對한 칸트 의 發見을 形而上學 에서의 偉大한 歷史的 業績이라고 稱頌한다. 그러나 世界에 對한 認識이 어떻게 成立하는지에 對해서는 칸트의 哲學에서 說明되지 않았다고 主張한다. 칸트는 直觀이 주어진다고 할 뿐 그것이 어떻게 成立하는지를 全혀 說明하지 않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理由는 칸트가 因果法則을 直觀과 無關한 悟性의 原則으로 看做했다는 點에 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外部事物이 因果法則의 適用 以前에 이미 知覺된다고 생각함으로써 결론적으로 經驗的 直觀의 成立을 全혀 說明하지 않은 채로 그대로 두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因果法則의 先天性에 對한 칸트의 證明도 客觀的-經驗的 直觀 自體의 可能性으로부터 導出하는 唯一한 證明方法을 取하지 않음으로써 誤謬를 犯한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博士論文 23節에서 因果槪念의 先天性에 對한 칸트의 證明을 다음 세 가지 論點을 통해 批判한다.

첫 番째 , 쇼펜하우어의 主張에 따르면 地殼의 系列은 모두 事件이며 因果法則에 關聯되지 않고도 客觀的 系列이다.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집에 對한 知覺과 江을 따라 내려오는 배에 對한 知覺에서 知覺의 系列은 바뀔 수없는 客觀的 事件인 反面에, 집에 對한 知覺에서 그 系列은 恣意的으로 規定되므로 主觀的이라는 것이다. 이 主張에 對해 쇼펜하우어는 두 境遇가 全혀 다르지 않다고 主張한다. 집에 對한 知覺과 江을 따라 내려오는 배에 對한 知覺은 모두 主管에 依해 그런 것으로서 認識된 實在的인 客觀들의 變化에 對한 認識이므로 客觀的 認識이라는 것이다. 唯一한 差異는 배에 對한 知覺에서 變化는 江과 倍, 두 物體間에 일어난 것이지만 집에 對한 地殼에서는 變化가 觀察者 自身의 身體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여기서 觀察者의 身體도 客觀的 物體系의 法則에 놓여있는 것이므로 배에 對한 知覺의 境遇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身體의 움직임도 經驗的으로 知覺된 한 事實일 뿐이기 때문이다.

두 認識 모두 客觀的 物體系 의 法則에 놓여있는 두 物體의 서로에 對한 位置의 變化에 對한 認識이라는 것이다. 事件이냐 아니냐는 點에서 내가 한 무리의 軍人들 곁을 지나가든 그들이 내 곁을 지나가든 어떤 差異도 없듯이, 觀察者의 눈이 지붕에서 바닥으로 움직이는 것과 바닥에서 지붕으로 움직이는 것은 둘다 事件 이라고 主張한다. 따라서 두 境遇 모두 經驗的 直觀의 系列이 다른 客觀들의 作用의 系列에 依存하므로 客觀的이라는 것이다. 卽 經驗的 直觀의 系列은 모두 客觀들 사이에서 直接的으로 主觀의 自意와 獨立的으로 發生한다는 것이다.

두 番째 ,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主張이 結果的으로 表象들의 系列을 主觀的 表象들의 變化로부터 區分하지 않는다고 批判한다. 칸트의 表象들의 어떤 系列도 現象의 變化로서 單純한 主觀的 表象들의 變化로부터 區分되지 않고, 오직 因果法則을 통해서만 變化의 客觀性이 認識된다고 主張했으므로, 이 主張으로부터 우리가 時間 속에서 原因과 作用의 連續을 除外한 어떤 鳶速度 客觀的인 것으로서 知覺할 수 없다는 結論이 導出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知覺된 다른 모든 現象의 連續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우리의 自意에 依해 그렇게 規定된 것이라는 主張이다. 그러나 現象들은 서로로부터 結果로 發生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서로서로 뒤따를 수 있다고 主張한다. 여기서 變化는 正確히 原因의 隊列의 連續에서가 아니라 全혀 다른 連續에서 知覺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連續의 客觀性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幻想의 連續과 같이 自意에 依存하는 主觀的 連續과는 全혀 다르다고 쇼펜하우어는 强調한다. 例를 들어 내가 집 門 앞에 서자마자 지붕에서 甓돌이 떨어져 나에게 맞은 境遇에 甓돌의 떨어짐과 내가 걸어나옴 사이에는 아무런 因果結合도 없지만, 나의 各地에서 客觀的으로 定해진 系列은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音樂소리의 系列이나 낮과 밤의 系列도 原因과 作用으로 把握되지 않았지만 客觀的으로 定해졌다는 것을 指摘함으로써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因果論이 이와 같은 客觀的 系列을 幻想과 區分하지 않는다고 批判한다. 이를 통해 習慣에 依해 因果關係가 形成된다는 의 假說도 論駁된다는 것이다.

세 番째 , 칸트에 따르면 모든 表象의 客觀的 實在性은 時間關係의 어떤 특정한 秩序에서 그 表象의 位置를 認識함으로써 可能하다. 칸트의 主張과 같이 系列에 對한 우리의 知識이 모두 實際로 因果律에 對한 知識에 依存한다면, 因果法則에 對한 우리의 知識은 不可能할 程度로 廣大한 것이어야 할 거라고 主張한다. 그러나 原因과 作用의 隊列에서 우리가 그 位置를 認識하는 表象들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우리는 언제나 客觀的인 것을 主觀的인 것으로부터, 實在的인 客觀들을 幻想으로부터 區分할 수 있다는 點을 통해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主張을 反駁한다. 原始社會에서 사람들은 天體運行의 法則에 對해 理解하지 못했으면서도 낮이 밤을 따른다는 것을 알았듯이 時間系列에 對한 우리의 모든 知識이 因果法則에 對한 知識에 依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우리 認識의 先天性에 對해 지나치게 沒頭함으로써 因果法則의 先天性과 必然性을 證明하는 데 있어서 誤謬를 犯하게 되었다고 指摘한다. 칸트의 主張이 옳다면 우리는 系列의 現實性을 오직 그것의 必然性으로부터 認識할 것이지만, 이와 같은 認識은 原因과 作用의 모든 隊列을 同時에 包括하는 全知的인 오성을 前提로 한다는 것이다.

西洋의 思辨神學과 東洋의 無神論 編輯

쇼펜하우어는 自身의 博士論文 34節에서 當代의 講壇哲學子(헤겔)李 主張하는 理性能力, 卽 '超感覺的인 絶對者 를 認識하는 理性能力'이라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批判한다. 理性은 感覺이 提供하는 材料를 槪念化하고 推論하는 能力일 뿐이지, 決코 認識의 材料를 스스로 算出할 수 없다는 것이다. 認識에 있어서 經驗으로부터 獨立的인 先天的인 것은 認識의 形式에 制限될 뿐, 認識이 成立하기 위해서는 이 形式이 外部의 材料에 適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時間과 空間이 外部에 對한 客觀的 直觀의 形式으로서 우리 안에 있으며 因果法則이 오성의 形式으로서 있는 것이다. 따라서 經驗의 모든 可能性을 넘어서는 認識의 內容을 根源的으로 自身으로부터 提供하는 異性 이라는 것은 쇼펜하우어의 表現에 따르면 헤겔 같은 하찮은 哲學敎授들이 지어낸 妄想的인 主張에 不過하다는 것이다. 무(無)로부터 世界를 算出한 人格的 神을 哲學的으로 證明하려는 敎授들의 試圖는 칸트의 理性批判에 依해 水泡로 돌아갔다는 것을 쇼펜하우어는 强調한다. 그 누구도 칸트의 主張에 對해 反論을 提起할 수 없었으므로 學者들이 내세운 神의 現存에 對한 證據들이 完全히 힘을 잃게 되었으며, 哲學敎授들度 思辨神學 의 證明들을 輕視했으나, 야코비 가 發明한 "神을 直接的으로 認識하고 神이 世界를 創造한 方法을 先天的으로 構成하는 理性能力"에 依해 칸트의 理性批判 의 本來的 意味가 歪曲되고 말았다고 쇼펜하우어는 主張한다. 이와 더불어 헤겔 같은 哲學敎授들이 一致團結하여 내세우는 엉터리 理論을 工夫하는 大學校의 젊은이들이 人生을 浪費하는 것과 헤겔같은 哲學敎授들에 依해서 칸트의 哲學이 엉뚱한 內容으로 變質된 것을 쇼펜하우어는 매우 恨歎했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定言命令 이 "理念(Idea 哲學用語로서의 理念을 말함)을 直觀하는 理性"이라는 虛妄한 槪念의 誕生 契機를 주었다고 생각하지만, 定言命令은 二律背反 및 道德神學과 함께 칸트哲學의 本來的인 깊이를 알지 못하고, 그 表皮만을 아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으로서 칸트 自身은 그것들을 決코 事實이라고 主張하지 않았다는 點을 强調했다. 칸트의 理性批判이 有神論 에 對해서 只今까지 敢行된 것 中에 가장 强力한 攻擊인 反面에, 칸트의 理性批判이 佛敎國家에서 나타났더라면 그 國家의 宗敎的 立場과 그것이 조화로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쇼펜하우어는 主張한다. 佛敎 는 유럽 그리스도교 와는 다르게 明白히 無神論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把握한 佛敎에 따르면 可視的 天體의 始作은 누군가의 創造에 依해서가 아니라 빈 空間으로부터 一貫性있고 不變하는 自然法則 에 따라 일어났다. 따라서 佛敎의 體系에서는 어떤 原初의 神的인 創造의 理念이 發生할 수 없고, "世界와 모든 事物을 創造했고 唯一하게 崇拜될 만큼 尊嚴한 超越的 存在 가 있다"는 學說이 가장 深刻한 異端으로 看做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佛敎에서는 創造에 對해서도 別 言及이 없다는 것이다. 世界는 峻嚴하며 不變性을 지닌 自然法則에 따라 發生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運命과 같은 것이 佛敎徒들에게 神的인 原理로 숭상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며, "佛敎의 體系에서는 어떤 原初의 神的인 創造의 理念도 發生할 수 없다"는 主張이다. 쇼펜하우어는 世界는 저절로 생겨났으며, 自然의 理致가 그것을 퍼트리고 다시 거두어들인다는 것이 佛敎의 가르침이라고 主張한다. 쇼펜하우어는 獨逸 學者들의 冊에서 一般的으로 宗敎와 有神論 이 同義語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批判한다. 유대敎 有神論 만이 同一할 뿐이므로, 有神論은 宗敎의 한 種類일 뿐이라는 것이다. 世界 創造者로서의 神에 對한 認識은 唯一하게 유대敎 에서만 主張될 뿐, 古代의 宗敎나, 最近의 다른 宗敎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더 正確히 말하려면, 無神論 代身에 比喩大橋 라고, 無神論者 代身에 非유대敎徒 라고 말해야 한다고 主張한다. 佛敎와 마찬가지로 中國의 道敎 儒敎 도 無神論的이라는 點을 쇼펜하우어는 指摘한다. 維新論의 唯一한 土臺는 어떤 人間的 承認도 必要로 하지 않는 ' 啓示 '지만, 哲學에서 試圖되어야 할 것은 自身의 方式으로 가장 重要한 眞理를 찾아가는 것임을 쇼펜하우어는 强調한다. 쇼펜하우어는 人間의 非合理性과 直觀을 强調한 近代의 獨創的인 哲學者로서 한 時代에 流行하는 哲學을 完全히 拒否하고 派閥에서 脫皮하여 孤獨한 學者의 模範을 보여주었다. 眞正한 哲學者가 할 일이란 그 어떤 結果에 到達하든 말든 介意치 않고 오로지 沈着하게 異性 의 빛만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생각이다.

倫理學 編輯

時代的 흐름 編輯

西洋의 近代 哲學者들은 傳統的인 神學 으로부터 벗어나 人間 行動의 옮고 그름에 對한 合理主義 的인 基準을 提示하려고 했다. 그들은 道德이 더以上 宗敎的 敎理에만 根據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성주의 的인(합리주의라고도 불림) 哲學者들은 道德의 境遇, 感情보다 理性의 役割을 强調했다. 이들은 證明될 수도 없고, 證明될 必要도 없는 道德의 自明한 原理들이 存在하며 이 原理들은 異性 에 依해 把握된다고 생각했다. 反面에 허치슨, 샤프츠버리같은 18世紀의 英國 哲學者들은 普遍的인 道德感을 道德의 唯一한 根據로 받아들였다. 이들은 人間이 本質的으로 利己主義的이라는 토마스 홉스 의 主張에 反對하면서 人間은 태어나면서부터 道德的 價値를 認識하는 感覺이나 情緖를 지닌다고 主張했다. 人間은 利他的-社會的 性向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같은 생각은 功利主義 敵人 倫理觀으로 展開되었다.

그 時期에 프랑스 哲學者들은 唯物論 敵, 無神論的 性向을 보였다. 라메트리 는 데카르트의 機械論的 解釋을 人間에까지 擴張했고, 돌바크 는 人間의 精神이 頭腦의 附隨的인 現象이라고 主張했다. 이들은 自己犧牲, 慈善, 同情心 等의 道德的 理想鄕을 否定하진 않았지만 人間의 自由를 認定하지 않았다. 人間의 精神活動이란 頭腦의 作用이므로 自然의 因果法則을 따르는 人間에게 自由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自然히 그들에게 倫理學의 問題는 人間의 心性에서 利他的인 行動을 일으키는 同人을 찾아 그것을 促進하는 일이었다.

칸트 는 經驗主義的 道德觀이 他律的 道德인 幸福主義에 根據하고, 普遍性을 提示하지 못한다고 批判한다. 칸트는 自由와 當爲를 同時에 含蓄하는 道德哲學을 摸索한다. 그에게 當爲란 自然的인 根據나 感覺的 刺戟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理性의 命令에서 오는 것이다."이성은 經驗的으로 주어져있는 根據에 따르지 않고, 現象 속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그런 事物들의 秩序에도 따르지 않고, 完全히 自發的으로 理念(Idea)에 따라 獨自的인 支署를"[<순수이성비판, B 575f>] 만들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當爲는 自由와 同時에 成立할 수 있다고 칸트는 主張한다. 感覺的 經驗의 世界에서는 決코 自由가 發見될 수 없지만, 道德의 世界에서는 自由가 理性 自體의 先天的인 事實로 成立한다는 것이다. 先天的 事實로서의 當爲는 우리에게 定言命令으로 나타난다. 定言命令 은 어떤 實質的인 內容이 考慮되지 않는 無條件的인 命令이다. 個人的 利益과 無關한 이 無條件的 命令을 따라야하는 根據는 義務에 있다. 義務 때문에 行한 行爲만이 道德的 行爲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當爲, 定言命令, 義務에서 成立하는 道德은 傾向性이나 假言命令, 同情心에 根據하는 他律的 道德에 비해 自律的 道德이라는 特徵을 갖는다. 여기서 道德法則은 人間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人間이 스스로 立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칸트의 倫理學은 形式主義라는 批判을 받는다. 칸트 倫理學의 形式主義는 그것이 實質의 世界에서 어떤 것도 取하지 않는다는 點에 起因한다. 바로 그래서 거기에서는 自由가 可能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피히테 는 現象과 物自體의 區分을 否定하고 實質의 世界를 없앰으로써 칸트 倫理學에 나타나는 形式主義의 問題를 解決하려고 한다. 道德의 世界, 當爲의 世界가 곧 實在하는 世界라는 것이다. 反面에 쇼펜하우어 는 實際로 나타나는 現象의 世界에서 人間의 行爲들을 分析하는 方法을 통해 道德的 行爲의 根據를 提示하려고 한다. 그 누구도 試圖하지 않은 이 方法을 쇼펜하우어는 콜럼버스 의 달걀에 比較하면서 가장 자연스러운 方法이라고 主張한다. 칸트 倫理學의 形式主義를 쇼펜하우어는 正面으로 拒否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現象과 物自體 의 世界를 區分하는 칸트의 意見을 受容하면서, 現象世界에서 나타나는 道德的 行爲의 根據를 物自體 世界에 對한 認識에서 찾는다. 쇼펜하우어에게 倫理의 問題는 當爲나 無條件的 命令의 問題가 아니라, 經驗에 기초하는 認識의 問題다. 그러나 經驗主義 者들이 倫理學을 形而上學에서 獨立된 것으로 다루는 反面에 쇼펜하우어는 經驗的 硏究에서 出發하면서도 同情心이라는 道德的 同人을 形而上學的으로 說明하려고 試圖한다. 이것을 위해 쇼펜하우어는 칸트 哲學과 印度哲學, 佛敎로부터 도움을 얻고 있다.

칸트 倫理學에 對한 批判 編輯

쇼펜하우어의 倫理學 論文은 칸트 倫理學에 對한 批判과 쇼펜하우어 自身의 倫理學의 根據를 提示하는 것으로 構成된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理論哲學, 特히 先驗的 感性論을 卓越한 省察이라고 極讚한 反面에, 칸트의 倫理學에 對해선 批判的이다. 쇼펜하우어는 칸트 倫理學의 命令的 形式에 先決問題 要求의 誤謬가 들어있다고 批判한다. 칸트는 아무런 證明도 하지 않은 채로 우리의 行爲가 服從해야 하는 法則이 있다고 前提한다는 것이다. 倫理學에서의 命令的 形式은 모두 神學的 道德에서 導入되었으므로, 法則, 命令, 當爲, 義務 等 칸트 倫理學의 基本槪念들度 神學的 前提를 떠나서는 아무 意味도 지닐 수 없을 것이라고 主張한다. 絶對的 當爲, 無條件的 義務와 같은 槪念들은 形容矛盾 에 不過하다는 것이다. 當爲는 處罰이나 補償과 關聯해서만 意味를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絶對的 當爲를 意味하는 定言命令 이란 있을 수 없고 利己的인 動機에 根據하는 假言命令 만 있을 뿐이라고 主張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條件的 當爲에 따르 行爲는 道德的 價値를 지니지 않는 利己的인 行爲이므로 假言命令이 倫理的 基礎槪念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命令的 形式에서의 神學的 前提를 指摘한 後에 쇼펜하우어는 칸트 倫理學의 基礎를 이루는 先天性, 義務, 法則의 槪念을 分析한다. 칸트의 理論哲學에서의 先天性은 經驗을 現象의 領域에 制限하는 意味를 갖는다. 그래서 先天的 綜合判斷은 現象에 對해서만 妥當한 것이다. 그런데 道德哲學에서도 이같은 先天性이 根據로 提示된다면, 道德法則度 現象의 法則에 지나지 않게 될 거라고 쇼펜하우어는 主張한다. 이 結論은 道德의 領域을 物自體의 領域으로 看做하는 칸트의 主張과도 矛盾된다는 것이다.

칸트의 無條件的 義務에 對해 쇼펜하우어는 그것이 自律的인 義務가 아니라 他律的인 義務라고 主張한다. 칸트는 義務가 法則에 對한 尊敬心에서 나온다고 主張하지만, 義務는 法則에 對한 服從心에서 일어나야 하는 行爲일 뿐, 어떤 自律性도 지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칸트의 法則에는 普遍性 自體라는 그것의 形式만 남는다. 法則의 內容은 普遍性 自體일 뿐이다. 이로부터 實際的 內容을 갖지 않는다는 칸트 倫理學의 또다른 問題點이 提示된다. 그렇다고 해서 피히테 와 라인홀트가 主張하듯이 定言命令이 直接的 意識을 통해 나타나는 意識의 事實일 수도 없다. 意識의 事實은, 칸트가 道德의 基礎로 受容하지 않는 經驗的 內容에 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트의 道德法則은 어떤 內容도 經驗으로부터 가져오지 않는 純粹한 形式에 不過하다는 主張이다.

쇼펜하우어는 基本槪念들을 分析한 뒤에 칸트 倫理學의 最高 原理로 꼽히는 定言命令 을 分析한다. 定言命令의 第1形式을 現實化하는 것은 利己主義라고 主張한다. 利己主義 만이 意志를 決定하고 利己主義는 普遍的 法則으로서 正義와 人間愛를 選擇하게 하기 때문이다. 換言하면 普遍的으로 따를 準則을 決定할 때, 나 自身이 不利한 位置에 놓여있을 境遇도 考慮되어야 하므로, 언제나 正義와 人間愛가 選擇된다는 것이다. 누구나 正義와 人間愛의 惠澤을 받고싶어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普遍的 法則에 對한 칸트 自身의 主張도 利己主義에 根據한다는 것을 밝힌다. 거짓말, 約束어기기, 不親切함의 準則이 普遍的 法則이 될 수 없는 것은 사람들이 나에게 똑같이 報復할 것이고, 내가 남의 親切을 바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칸트는 說明한다. 따라서 칸트의 定言命令은 實際로는 利己主義에 根據하는 假言命令에 不過하다는 結論이 導出된다.

定言命令의 第2形式에 對해 쇼펜하우어는 '目的 自體'라는 表現을 批判한다. '目的 自體로 存在한다'라는 말은 하찮은 表現이라는 것이다. 目的이란 意志(쇼펜하우어의 哲學用語로서 意志를 말함)의 對象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意志와의 關聯性에서만 理解되므로 '目的 自體'라는 것은 우스운 말이 된다. 定言命令의 第3形式인 意志의 自律性에 對해 쇼펜하우어는 '關心없이 願하는 意志'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지 問題삼는다. 나아가 '人間의 尊嚴性 '이라는 槪念의 實在性을 檢討한다. "無條件的이고 比較할 수 없는 價値"라는 尊嚴性에 對한 칸트의 定義를 쇼펜하우어는 그 高貴한 울림으로 因해 畏敬心을 일으키지만 實際로는 形容矛盾을 含蓄하는 寒心한 課長에 不過하다는 說明이라고 批判한다. 價値는 相對的 槪念일 뿐이어서, 比較될 수 없는, 無條件的 絶對的 價値란 不當한 用語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트의 倫理學은 神學的 道德의 變裝에 不過한 것으로, 옛날의 倫理學과 마찬가지로 어떤 確固한 根據를 갖지도 않는다고 쇼펜하우어는 결론짓는다.

倫理學의 根據 編輯

칸트 倫理學의 核心的 槪念들을 批判的으로 分析해서 그 問題點을 보여준 後에, 쇼펜하우어는 自身의 倫理觀을 말한다. 그동안 다루어졌던 倫理學의 거의 모든 問題들이 쇼펜하우어의 倫理理論 안에서 體系的으로 整理된다. 쇼펜하우어는 道德의 基礎를 理性과 法則으로 보는 칸트와는 달리 同情心 을 道德의 基礎로서 提示한다. 나아가 同情心의 根據를 形而上學的으로 說明하여 倫理學과 形而上學의 關係를 考察한다.

쇼펜하우어는 法的인 處罰이나 사람들 사이의 名譽에 對한 考慮가 없다면, 大多數 人間들은 各自의 淺薄한 性向, 卽 利己心이 이끄는대로 살아갈 것이라고 主張한다. 또한 宗敎的 가르침이 人間의 行動에 끼치는 影響도 微弱하다는 것을 다양한 事例를 통해 主張한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自然의 理致와 人類의 普遍的 價値에 걸맞는 行動을 하는 이들이 있으므로 倫理學의 課題는 그들의 行爲의 要因이 무엇인지를 硏究하는 것이라고 쇼펜하우어는 主張한다. 쇼펜하우어는 于先 道德的 行動이란, 利己的인 動機를 갖지 않는 行爲라고 定義한다. 그렇다면 利己的인 動機를 갖지 않는 行動이란 무엇을 의미하나?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幸福主義의 觀點을 내세운다. 쇼펜하우어는 行爲의 窮極的인 目的을 快樂과 苦痛으로 說明한다. 行爲者 自身의 快樂을 追求하고 苦痛을 除去하려는 行爲는 利己的인 行爲이고, 他人의 快樂을 追求하고 苦痛을 除去하려는 行爲는 道德的 價値를 갖는 行爲라는 것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하찮은 快樂의 無分別한 追求를 正當化하는 功利主義 를 좋아하지만은 않는다. 쇼펜하우어는 幸福에 對해 缺乏의 止揚과 苦痛의 사라짐이라는 에피쿠로스 敵人 定義를 받아들이긴 한다.

쇼펜하우어는 倫理學의 最高 原理로서 "누구도 해치지 마라. 오히려 네가 할 수 있는 限 모든 이를 도와라"를 提示한다. 이를 통해 그는 正義와 人間愛라는 두가지 根本的인 美德을 導出해낸다. 利己心에 따라 行動하는 人間에게 이 두 德이 現實的으로 可能한 것은 同情心을 통해서다. 同情心이 人間이 지닌 참된 道德的 同人이라는 것을 쇼펜하우어는 다양한 事例를 통해 이야기한다. 어떤 다른 根據에서 나온 高級한 行動보다 他人의 苦痛을 沮止하려는 同情心에 根據하는 行動이야말로 道德的 價値를 갖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反對의 境遇인 暴惡한 行動을 하는 사람에 對해서도 사람들은, 그 行爲者가 겂없다거나 非理性的이라 말하지 않고 그에게 同情心이 不足하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同情心은 正義의 德에서는 弱한 程度로 나타난다. 그것은 他人의 苦痛을 沮止하려는 心情에서 表現된다는 것이다. 正義, 不義를 同情心과의 聯關性에서 考察하므로 쇼펜하우어는 苦痛을 더 많이 일으킨 不義를 더 큰 不義로 본다. 다른 한便 쇼펜하우어는 正義의 原則이 實定法과 獨立的으로 언제 어디에서나 妥當하다고 主張한다. 未開印度 不義와 正義를 區分한다는 것이다. 또한 쇼펜하우어는 正義의 德에 關聯된 細部槪念으로 거짓말과 義務槪念을 說明한다. "義務"에 對해 "義務의 不履行이 他人을 毁損하는 行爲"라고 定義한다. 그리고 거짓말에 對한 칸트의 分析이 幼稚하고 荒唐하다며 批判하면서, 武力을 통한 正當防衛와 마찬가지로 自身을 他人의 攻擊으로부터 保護하기 위한 거짓말이 正當한 것이라고 主張한다.

쇼펜하우어의 正義觀에서 他人을 毁損하지 않으려는 것이 正義의 德이다. 이미 存在하는 他人의 苦痛을 除去하는 것은 쇼펜하우어에게 正義의 問題가 아니라 人間愛의 問題다. 여기서 同情心은 他人의 苦痛을 除去하기 위해 自身을 犧牲하기에 이른다. 어떻게 利己的인 人間이 自己 犧牲에까지 이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여기에서 생겨난다. 그것은 나와 타자(타인)의 同一化를 통해 可能하다고 쇼펜하우어는 생각한다. 苦痛받는 他者 속에서 나 自身을 認識하므로, 그의 苦痛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他者에게서 나를 認識할 수 있는가? 이 主張을 쇼펜하우어는 自身의 倫理學을 完結하는 形而上學的 說明에서 物自體와 現象을 區分하는 칸트의 理論에 根據하여 說明한다. 現象的 存在는 時空間的 制約을 받는 存在로서 時空間的으로 分離된 수많은 個別者로 나타난다. 그러나 칸트가 主張하듯이 時空間的 存在는 나의 現象에 不過하다는 것이다. 수많은 個別者의 背後에 있는 本質은 時空間의 制約을 받지 않는 것으로서 모든 個別者에게 同一하게 存在할 것이라고 쇼펜하우어는 主張한다. 이 認識이 바로 同情心으로 表現되는 것이다. 同情心을 갖는 이와 그렇지 않는 이의 差異는 自我와 非-아를 얼마나 뚜렷히 區分하는가의 差異다. 同情心을 일으키는 認識을 쇼펜하우어는 '이것은 너다'[tat-tvam asi]라고 表現한다. 他人에게서 自身을 認識하는 이는 모든 것에서 살아있다. 反面에 自身 안에서만 사는 이에게 自身의 肉體의 죽음은 곧 世界의 消滅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倫理學이 同情心 發達에 寄與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남아있다. 이에 對해 쇼펜하우어는 懷疑的으로 答辯한다. 人間의 性格이란 先天性에 影響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敎化, 道德敎育은 先天的인 性格을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라 道德에 對한 妄想에서 벗어나고, 올바른 생각과 理解를 提供하기 위한 것이며 우리의 行爲는 性格과 外部環境의 影響으로부터 必然的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主張한다. 이것으로 쇼펜하우어는 倫理學의 모든 問題를 나름대로 整理했고, 倫理學을 위한 自身의 根據가 完決된 全體成果 함께 經驗的 實在性을 갖는다고 主張한다.

덴마크 王立 學術院의 判定에 對한 反駁 編輯

쇼펜하우어는 덴마크 王立 學術院의 公募에 單獨으로 參與하지만, 學術院은 쇼펜하우어의 論文을 탈락시켰다. 쇼펜하우어는 이 判定에 對해 仔細한 反論을 提起했다. 學術院의 批判을 세가지 論點으로 區分하여 各 論點을 仔細히 反駁하는데, 그中에 核心的인 첫 番째 論點은 쇼펜하우어가 問題를 誤解했다는 것이다. 元來의 核心 問題는 倫理學과 形而上學의 關係에 對한 것이었지만, 쇼펜하우어가 이것을 倫理學의 原理를 세우는 問題로 誤解했다는 것이다. 現象課題의 核心的인 意味가 倫理學의 基礎와 源泉에 關한 것이었는지, 形而上學과의 關聯性에 關한 것이었는지 쇼펜하우어는 仔細히 分析한다.

于先 問題의 導入部에서 말하는 것은 學問과 實際的 삶에 道德性의 理念이나 道德法則의 原初的 槪念이 있다는 것이고 現象課題는 바로 이 槪念들의 源泉과 基礎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質問은 明白히 道德의 實際的인 認識 根據에 關한 것으로서 모든 道德的 先行의 最終 根據에 對한 물음이다. 學術院은 이 事實을 스스로 否定함으로써, 自身들이 明白히 물은 것을 묻지 않았다고 否認하면서 形而上學과 道德의 關係가 現象課題의 核心問題였다고 詐欺的인 主張을 한다. 그러나 課題에는 形而上學에 對한 어떤 暗示도 없었다고 쇼펜하우어는 反駁한다. 日常的 道德判斷의 根據로서도 日常的인 삶에서 일어나는 道德的 判斷들에 對한 經驗的 考察이 促進될 뿐, 形而上學에 對한 어떤 暗示도 없었다. 意識에 놓여있는 先天的인 理念으로서 心理的인 事實이 하나의 例로 찾아졌을 분, 形而上學的 理論이 要求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學術院이 意識의 事實이건 外部世界의 事實이건, 事實을 통한 證明을 期待했지, 形而上學的 證明을 期待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學術院이 實際로 提起한 問題에 對해 自身이 나름대로 훌륭하게 答辯했다고 쇼펜하우어는 主張한다. 먼저 否定的 部分에서 칸트 倫理學이 倫理學의 참된 基盤을 提示하지 않는다는 것을 證明했고, 그러고나서 肯定的 部分에서 道德的으로 稱讚받을 만한 行爲들의 참된 源泉을 이야기했으며, 이게 唯一한 源泉일 수 있음을 證明했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마지막으로 倫理學의 이 源泉이 가장 오래되고 참된 形而上學的 體系에 共通的인 普遍的 根本 思想과 맺는 關係를 提示했다고 主張한다.

쇼펜하우어의 論文 形式이 불만스럽다는 學術院의 두 番째 批判은 學術院의 主觀的 判斷에 根據한 것이므로 쇼펜하우어는 더以上 말할 價値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뒤의 指摘과 問題에 있어서도 그 基礎가 充分히 證明되지 않았다는 批判에 對해 쇼펜하우어는 自身의 證明이 數學的 證明에 가까울 程度로 嚴密하고 眞摯하게 이루어졌다고 反駁한다. 學術院은 마지막으로 쇼펜하우어의 論文에서 몇몇 대단한 當代의 哲學者들이 非難받아서 深刻한 論難이 일어날 것이라고 主張한다. 이에 對해 쇼펜하우어는 피히테 헤겔 을 甚하게 非難한 것은 認定하지만 그 人間들이 대단한 哲學者라는 것은 絶對 認定할 수 없다고 말한다. 헤겔 의 哲學은 後孫들에게 現 時代에 對한 嘲弄거리로 받아들여질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헤겔 方式의 哲學과 속임數는 頭腦를 損傷시키고, 現實的인 생각을 못하게 抑制하고, 言語를 쓸데없이 濫用하는 것이며 그냥 似而非哲學 에 不過하다고 쇼펜하우어는 主張한다. 헤겔의 思想들이란 奸邪한 陰謀로부터 가져온 着想으로, 根據도 寒心하고, 제대로 證明되지도 않고, 獨創性도 없는데다가 스콜라哲學 敵人 實在論 스피노자 의 哲學을 單純하게 模倣한 結果物이라고 主張한다.

쇼펜하우어 倫理學의 思想的 意味 編輯

쇼펜하우어의 이러한 思想은 哲學의 主流보다는 非主流에 屬한 사람들에게 影響을 많이 끼쳤다. 쇼펜하우어의 思想들은 文學 이나 오페라 舞臺에 素材가 되어 자주 登場했으며 프랑스의 마르셀 프루스트 앙드레 지드 , 獨逸의 토마스 萬 等에게 큰 呼訴力을 發揮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는 쇼펜하우어가 倫理와 藝術의 深層的인 問題를 다루는 眞正한 哲學者라고 評價했으며 率直하게 表現한 보기 드문 思想家이며 멋진 글쓰기의 典型을 보여준다고 稱讚했다. 쇼펜하우어의 이러한 思想들은 近代 心理學者들에게 많은 影響을 주었는데 獨逸의 빌헬름 분트 나 美國의 윌리엄 제임스 가 代表的이고 알프레드 아들러 는 쇼펜하우어가 헤겔에 對한 劣等感을 지닌 좋은 事例로 보고 劣等感이 有益한 方向으로 作用한 點에 注目했다.

쇼펜하우어는 倫理學의 問題를 嚴密한 學問의 方式으로 作業하는 것이 可能하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事例로도 꼽힌다. 참된 道德的 價値를 지니는 行爲가 뭔지를 歷史學的으로 經驗的으로 硏究하고, 그것을 통해 人間의 特性에 놓여있는 道德的 動機를 찾아내려고 試圖하였다. 이렇게 해서 人間 行動의 動機와 目的을 說明하고, 그 論理的 構造를 再構成하여 그 意味를 評價하려는 學問的 試圖의 模範 事例로 자리잡았다. 쇼펜하우어는 人間의 利己的인 合理性과 正義가 共存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合理的 利己心에 根據하는 正義論을 主張한 존 롤스 思想의 先驅者로 認定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定言命令의 第1形式인 普遍性의 原理를 利己主義的 動機에 根據하여 解釋한다. 利己主義的 動機에서 普遍性의 原理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被害者의 立場에 설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利己心을 前提하더라도 正義와 人間愛의 德이 導出될 수 있음을 쇼펜하우어는 보여준다. 이것은 롤즈의 '無知의 베일'에 含蓄된 생각이다.

프랑크푸르트學派 의 獨逸 哲學者 막스 호르크하이머 는 칸트에 이르기까지 西洋 近代哲學의 根本的 動因이 된 根源的 二元論을 維持하여 經驗主義的 立場에 對立하면서도 世界 自體를 神格化하지 않은 것을 쇼펜하우어의 뛰어난 業績으로 評價한다. '盲目的인 意志'에 關한 쇼펜하우어의 理論은 옛날의 形而上學者들이 世上에 提示한 터무니없는 理想鄕을 打擊했고, 否定性에 對한 쇼펜하우어의 露骨的인 表現은 人間들 사이에 連帶意識의 同人을 提供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쇼펜하우어는 現代의 倫理學的 論議에 있어서 主軸이 되는 칸트의 法則論的-義務論的 倫理學의 脆弱點을 指摘했다는 點에서 큰 意味를 지니고 있다. 그러면서도 쇼펜하우어는 道德의 經驗的 基礎만을 固執하지 않고 東西洋의 思想들을 나름대로 統合시켜서 倫理學 形而上學 의 關聯性을 主張했다.

影響 編輯

 
畫家 빌헬름 부쉬가 그린 쇼펜하우어와 푸들.

쇼펜하우어는 哲學分野 보다도 그 外의 科學分野, 藝術分野에 더욱 큰 影響을 끼쳤다. 1852年에 英國 존 玉센포드 라는 사람이 <웨스트민스터 리뷰> 4月號에 쇼펜하우어 思想에 對한 글을 寄稿했다. 존 玉센포드는 에커만 이 쓴 괴테와의 對話 等을 英語로 飜譯한 飜譯家이기도 했다. 以後 英國에 쇼펜하우어가 알려졌고, 英國의 토마스 칼라일 , 찰스 다윈 같은 英語圈 知識人들이 쇼펜하우어를 探究했다. 쇼펜하우어가 老年期에 읽은 글 中에는 <타임스>에 실린 < 種의 起源 >에 關한 書評이 있다. 獨逸의 哲學者 다비트 아셔 는 쇼펜하우어에 對한 글을 써서 쇼펜하우어를 감동시켰다. 아셔는 쇼펜하우어와 便紙交換을 자주 했는데 쇼펜하우어로부터 30餘通의 便紙를 받았다. 아셔는 <쇼펜하우어와 다윈주의>라는 논고度 發表했었다. 찰스 다윈 은 이 論告를 읽다가 아셔가 引用한 쇼펜하우어의 글들을 自身의 著書 < 人間의 由來와 性選擇 >에 引用하기도 했다. 다비트 아셔는 쇼펜하우어가 主張한 '意志'理論과 類似한 다윈의 ' 自然選擇 ' 等의 槪念이 結局엔 世上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르투어'는 英語로는 '아서'(Arthur)가 되는데 이것은 事業家였던 쇼펜하우어의 아버지가 아들을 事業家로 키우고자 英國親和的인 이름을 아들에게 지어준 것이었다. 이 때문에 英國에서 話題가 되기도 했다. 美國에까지 傳播되어 孤獨한 生活을 追求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랄프 왈도 에머슨 은 自身의 著書에 쇼펜하우어의 글을 引用했고 人間에게는 무엇보다 틀에 박힌 것을 嫌惡하는 個性이 重要하다고 强辯했고 에머슨은 佛敎와 우파니샤드 에 關心이 많아졌다.

音樂家 리하르트 바그너 는 自身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쇼펜하우어 의 思想에 對한 答辯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말은 1859年에 나왔는데, 쇼펜하우어는 바그너 에게 無關心했으므로 바그너가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몰랐을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1854年에 親舊이자 詩人인 게오르그 헤르베크 가 '意志와 表象으로서의 世界'를 들고 바그너를 찾아갔다. 헤르베크는 바그너에게 쇼펜하우어에 對한 이야기를 하면서 推薦해주었다. 바그너는 이것을 한 番 읽었고 感動받았다. 바그너는 意志와 表象으로서의 世界를 1年 동안 4番이나 通讀한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바그너는 自身의 作品 니벨룽겐의 半指 와 '尊敬하는 마음과 함께'라는 自筆 獻辭를 보냈으나 쇼펜하우어는 어떤 答狀도 바그너에게 보내지 않았다. 쇼펜하우어는 바그너의 作品인 彷徨하는 네덜란드人 을 바그너와 함께 觀覽한 적도 있는데 쇼펜하우어는 興味를 잃고 말았다. 쇼펜하우어는 바그너에 對해서 '바그너는 音樂이 뭔지 잘 모르는 人間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以後로도 平生 동안 쇼펜하우어를 尊敬했다. [6]

쇼펜하우어 讚美者였던 19世紀 獨逸의 哲學者 에두아르트 폰 하르트만 은 自身의 著書 <無意識의 哲學>에서는 쇼펜하우어의 心理學的인 主張을 劃期的으로 發展시켰다. 프로이트 精神分析學 의 基礎에 該當하는 '抑壓'에 對해서 自身보다 먼저 쇼펜하우어 가 잘 說明했다는 것을 認定했다. [7] 近代 心理學者들에게 큰 靈感을 膳賜했으며 心理學 이 正式 學問으로서 자리잡기 前에 心理學的인 主張을 哲學書籍에서 펼쳤던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물을 酸素 水素 로 分解한 라부아지에 의 作業이 化學의 發展에 寄與했다면 매우 오랜 歲月 동안 分析되기 어려웠던 "自我 或은 靈魂"이라 불리는 것을 異質的인 두 가지 成分[意志와 知性]으로 分解하는 作業은 哲學의 發展에 寄與한다." 分析心理學의 創始者 카를 융 은 自身의 自敍傳에서 헤겔 의 倨慢한 文體보다는 쇼펜하우어 의 思想을 探究한 것이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

"헤겔은 難解하고 倨慢한 文體로 나를 겁먹게 해서 나는 露骨的인 不信感으로 헤겔을 對했다 헤겔은 마치 自身의 言語構造 속에 갇혀 그 監獄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몸짓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의 探究가 가져다 준 가장 큰 結實은 쇼펜하우어였다. 쇼펜하우어는 눈에 보이도록 如實히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苦痛과 苦難에 對해서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注目하지 않는 것 같았다." [8]

??카를 융 自敍傳

아마도 쇼펜하우어의 影響을 가장 크게 받은 分野는 文學界日 것이다. 러시아의 小說家인 톨스토이 , 이반 투르게네프 , 도스토옙스키 프랑스의 作家 마르셀 프루스트 , 에밀 졸라 그리고 獨逸 作家 토마스 萬 , 헤르만 헤세 , 프란츠 카프카 , 英美圈 作家인 토마스 하디 , 조지프 콘래드 같은 사람들은 모두 自身들의 創作에 쇼펜하우어의 思想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認定했다. 헤르만 헤세의 作品을 보면 佛敎的 色彩가 剛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를 두고 쇼펜하우어의 思想이 反映된 것이라고 評價받기도 한다. 쇼펜하우어의 이름이 톨스토이의 作品 안나 카레니나 와 토마스 하디의 '테스' 等의 小說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노벨文學賞을 받은 프랑스의 앙드레 지드 는 自敍傳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쇼펜하우어로부터 慰勞를 받았다. 表現할 수 없는 氣分으로 意志와 表象으로서의 世界 를 仔細히 읽어나갔고 자주 읽었다. 다른 모든 것들이 나의 注意를 뺏지 못할 程度로 集中해서 읽었다. 스피노자 니체 같은 哲學者들의 冊도 읽었다. 내가 哲學에 빠진 契機는 쇼펜하우어 德分이며 오로지 쇼펜하우어 德分이었다. 쇼펜하우어보다 헤겔을 더 좋아하는 人間이 있다는 것은 荒唐한 일이다." [9]

톨스토이는 唯一하게 쇼펜하우어의 肖像畫만을 집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長篇小說 < 戰爭과 平和 >를 脫稿하기 直前인 1869年 여름에 自身의 親舊이자 쇼펜하우어 冊을 飜譯한 阿罷拿視 페트 (本名:페트 센新)에게 다음과 같은 便紙를 보냈다.

"이番 여름에 내가 뭘 했는지 알고계십니까? 나는 쇼펜하우어를 읽으며 强力한 기쁨을, 여태껏 한 番도 몰랐던 感動을 滿喫했습니다. 나는 쇼펜하우어의 모든 冊을 모조리 求해서 읽었고 자주 읽고 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講義를 受講한 여느 學生도 내가 이番 여름에 發見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배우지 못했으리라고 나는 確信합니다. 앞으로 나의 이런 意見이 언제 變할지는 모르겠지만, 只今 나는 쇼펜하우어야말로 모든 人間들 中에 偉大한 天才에 屬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當身은 쇼펜하우어가 哲學的 主題들을 다룬 무언가를 썼다고 말해주셨습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그것은 경이롭고도 생생하게 省察되는 穩全한 世界입니다. 나는 벌써부터 쇼펜하우어의 글을 飜譯하기 始作했습니다. 나와 함께 飜譯에 參與하시겠습니까? 쇼펜하우어의 冊을 많이 읽는 나는 어째서 아직도 쇼펜하우어가 그토록 世上 사람들에게 덜 알려졌는지 理解가 안됩니다. 그 理由란 아마도, 쇼펜하우어가 吐露했듯이 世界에는 하찮은 人間들로 가득하기 때문이겠지요. [10]

短篇 作家로 有名한 프랑스의 모파상 , 러시아의 안톤 체호프 , 英國의 윌리엄 서머싯 몸 , 아르헨티나의 보르헤스 等도 쇼펜하우어의 影響을 받았다. 文學家들에 對한 쇼펜하우어의 影響은 20世紀에도 持續되었다. 쇼펜하우어의 이름은 안톤 체호프의 戱曲에 많이 나타났는데, 체호프 以後에도 쇼펜하우어의 影響은 조지 버나드 쇼 , 루이지 피란델로 , 사무엘 베케트 等의 戱曲 作品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藝術 分野에서 이 程度로 이야기될 수 있는 哲學者는 別로 없다. 藝術, 藝術家들에게 큰 影響을 끼쳤다는 칼 마르크스 조차도 쇼펜하우어에 견줄 수는 없다. 當然히 쇼펜하우어는 哲學者들에게도 影響을 끼쳤다. 프리드리히 니체 는 自身이 哲學者가 된 契機는 쇼펜하우어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의 意志 中心的인 哲學은 意志와 表象으로서의 世界에 至大한 影響을 받았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技士, 죽음 그리고 惡魔'

니체는 < 悲劇의 誕生 >에서 다음과 같이 쇼펜하우어를 評價한다.

"오늘날 文化가 이토록 淺薄夏至高 荒廢해지는 時代 속에서 우리는 기운찬 줄기와 가지를 내뻗을 수 있는 生命力을 지닌 뿌리 하나라도, 肥沃하고 健康한 土壤 한 줌이라도 찾으려고 헛되이 애쓴다. 그러나 到處에는 먼지와 모래뿐이니 모든 것은 痲痹되고 脫盡해서 죽어간다. 이런 狀態에서 마음 한 자락 둘데 없이 孤獨한 人間이 選擇할 수 있는 最善의 自己象徵은 뒤러가 그려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죽음과 惡魔와 同行하는 武裝 記事'이다. 무쇠처럼 굳센 눈빛과 鐵甲옷으로 武裝한 이 記事는 自身의 끔찍한 同行者들度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希望도 품지 않으면서 自身의 말을 타고, 自身을 따르는 개와 함께 險難한 길을 혼자서 孤獨하게 걸을 줄 안다. 뒤러가 描寫한 이 記事가 바로 우리의 쇼펜하우어와 같다. 그는 모든 希望을 잃고도 眞理를 追求했다."

20世紀 前半部에 哲學者 비트겐슈타인 쇼펜하우어 의 思想을 바탕으로 自身의 哲學을 始作했다. [11]

獨逸 哲學者 파울 도이센 (Paul Deussen)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親舊로 有名한 사람인데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 全集 出版에 힘을 썼고, 쇼펜하우어學會를 만들어 活動했다. 印度哲學科 우파니샤드에 對한 硏究者로서 큰 評價를 받고 있다. 度이젠은 直接 印度로 旅行을 갔고 이에 對한 旅行記를 남기기도 했다. 度이젠은 플라톤, 칸트, 印度哲學, 쇼펜하우어에 對한 著書를 남겼고 學者로서 부지런히 活動했다. [12]

쇼펜하우어가 살았던 時代에 屬하는 19世紀 前半에 쇼펜하우어는 無視 當했다. 그런데 19世紀 後半에는 가장 有名하고도 影響力 있는 哲學者가 되었다. 20世紀 前半에는 쇼펜하우어의 思想이 難解하다고 無視되기도 했고, 一部 哲學 敎師들조차 쇼펜하우어의 著書를 探究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쇼펜하우어가 다시 注目받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20世紀 모든 哲學者 中에서 가장 重要한 한 사람인 비트겐슈타인 에게 明白한 影響을 끼쳤기 때문이다. [13] [14]

英國의 哲學者 버트런드 러셀 은 다음과 같이 評했다. "쇼펜하우어는 異例的으로 國家主義에 얽매이지 않았고 獨逸의 作家들을 훤히 잘 알았던 만큼이나 英國과 프랑스의 作家들에 對해서도 能通했다. 餘他 哲學者들보다도 믿음직한 哲學을 追求한 藝術家와 文學家들에게 쇼펜하우어가 끼친 影響은 莫大했다." "쇼펜하우어는 '意志'라는 槪念을 强調하면서 哲學을 展開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비록 意志를 메타自然學의 土臺로 삼았어도 倫理的으로는 惡으로 看做했다. 그렇게 惡한 意志는 厭世主義者에게는 敵對的인 것을 수밖에 없었다. (中略) 쇼펜하우어의 意志 理論은 많은 哲學者들에게 收用되었는데 特히 獨逸의 니체나 프랑스의 哲學者 앙리 베르그송 , 美國의 哲學者 존 듀이 , 美國 心理學者 윌리엄 제임스 等에게 積極的으로 受容되었다. 루소 칸트 가 그와 類似한 意志理論을 準備했지만 그토록 純粹한 意志理論을 가장 먼저 說破한 哲學者는 쇼펜하우어였다." [15]

英國의 哲學者 칼 포퍼 는 自身의 아버지 書齋에 쇼펜하우어 찰스 다윈 의 寫眞이 걸려 있었다고 回顧했다. [16] 칼 포퍼는 에르빈 슈뢰딩거 를 言及하기도 하는데 잘 알려져 있듯이 슈뢰딩거 는 쇼펜하우어의 思想을 受容했다고 말한다. 칼 포퍼는 自身의 冊 이름을 짓는 일에 쇼펜하우어가 지은 이름에서 靈感을 받았다고 말한다. 칼 포퍼는 自身의 아버지 書齋에는 웬만한 哲學書籍은 大部分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여러 冊을 읽다가 칸트 純粹理性批判 을 만났는데 칸트의 글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全혀 理解할 수가 없었지만 쇼펜하우어의 여러 著書들을 읽었고 그 德分에 칸트의 冊도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意志와 表象으로서의 世界 라는 冊은 自身이 태어나서 最初로 眞摯하게 읽고 工夫한 두꺼운 哲學書籍이라고 말했다. [17]

에피소드 編輯

25歲의 쇼펜하우어는 어머니의 살롱 에서 만난 人物 中에 괴테 에게 가장 魅惑되었다. 이들의 만남은 예나 의 어느 宴會場에서 이루어졌다. 宴會에 參席한 女性 몇몇이 쇼펜하우어를 놀려대며 구시렁대는데도 쇼펜하우어는 苦悶하는 表情을 지은 채로 思索에 沒頭하고 있었다. 그때 高尙하게 보이는 괴테가 킥킥대는 女性들에게 다가가서 왜 그러냐고 물었다. 女性들의 對答을 들은 괴테는 이렇게 타일렀다. "쇼펜하우어를 그냥 나둬.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도무지 犯接할 수 없을만큼 偉大해질 테니까" 괴테는 쇼펜하우어만 自身의 집으로 조용히 불러서 함께 時間을 보내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괴테를 매우 尊敬했고 괴테는 쇼펜하우어에 對해 "속을 알 수 없는 人物"로 생각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오랜 歲月 동안 過敏한 性向을 지니고 있었다. 쇼펜하우어가 6살이던 時節에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서럽게 우는 아들"을 散策에서 돌아온 父母님이 發見했다. 왜냐하면 父母가 自身을 집에 버리고 떠났다고 確信했기 때문이다. 또한 成人 時節에는 밤에 잠자다가 微微한 雜音만 들려도 벌떡 일어나서 拳銃을 집어들었다. 쇼펜하우어는 自身의 鬚髥을 面刀해주는 理髮師를 全혀 信賴하지도 않았었다. 傳染病에 敏感하여 潔癖症도 있었던 것 같다. 外食하러 갈 때도 다른 사람들이 使用한 盞을 使用하지 않으려고 自身이 準備한 盞을 가져가서 使用했다. 自身의 財産 關聯 計算書나 手票에도 決코 獨逸語를 쓰지 않았다. 自身의 支出內譯 關聯 記錄은 英語로 記錄했고 自身의 事業書類들을 그리스語나 라틴語로 쓰기도 했다. 自身의 貴重品들을 祕密場所에 숨겨뒀고 强度를 避하려고 假짜이름標를 만들어 붙이기도 했다. 自身의 債券들을 엉뚱한 文書에 숨기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自身의 이런 性向을 認定하고 絶望하기도 했고 拙劣한 人間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이것은 고치기 어려운 痼疾的인 性向으로 推定된다.

쇼펜하우어는 平生 동안 古典哲學과 古典文學을 集中해서 읽었다. 哲學書籍과 科學書籍이나 文學을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읽었다. 이탈리아 作家들 中에는 단테 , 아리오스토 , 마키아벨리 等도 좋아했지만 特히 페트라르카 를 가장 좋아하며 그의 詩는 무척 感銘깊게 읽었다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어떤 冊에 對한 皮相的인 解說書나 飜譯書들을 輕蔑했다. 그러면서도 쇼펜하우어 本人은 飜譯을 즐기기도 했는데 괴테의 파우스트 句節을 英語로 飜譯하여 好評을 받기도 했다.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를 스페인語로 읽었고 스페인 作家 발타자르 그라시안 의 冊을 獨逸語로 飜譯하기도 했다. 헤겔 같은 敎授들이 英國 思想家들의 冊을 제대로 硏究도 안하며 엉터리 飜譯書나 參考하는 詐欺꾼들이라고 非難할 程度로 飜譯을 嫌惡했던 것은 事實이다.

쇼펜하우어와 便紙를 주고받으며 交流하던 로베르트 호른슈타인 이라는 音樂家가 1855年에 쇼펜하우어 自宅을 訪問했다. 이 사람은 리하르트 바그너 의 弟子인 젊은 作曲家였다. 나중에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에 對한 回想》이라는 冊을 남겼다. 호른슈타인은 이 冊에서 스승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에게 얼마나 빠져 살았는지를 생생하게 그렸다. 호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에 對해 말할 때와 같은 熱情으로 다른 藝術家나 藝術分野의 權威者들을 稱讚하는 것을 한 番도 들은 적이 없다'

쇼펜하우어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살 때였다. 小說家 ' 요한나 쇼펜하우어 '의 아들이라는 事實이 洞네 住民들에게 알려져 話題가 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靑年時節부터 입어 온 流行이 지난 外套를 입고 다녔다. 이런 쇼펜하우어의 獨特한 모습과 쇼펜하우어의 愛玩犬인 푸들 '아트만'은 프랑크푸르트의 名物이 되었다. 쇼펜하우어는 恒常 이런 式의 차림으로 愛玩犬을 데리고 다니며 散策을 했다. 칸트 의 誠實한 散策 이야기가 쾨니히스베르크 사람들 사이에 膾炙되었듯이 愛玩犬과 같이 散策하는 쇼펜하우어의 모습이 마치 人格이 좋은 主人과 忠直한 愛玩犬처럼 보여서 有名해졌다. 쇼펜하우어는 아무리 날씨가 나빠도 웬만하면 平安한 氣分으로 일정한 時間 동안 散策을 꼬박꼬박 했다. 쇼펜하우어는 큰소리로 혼잣말을 하면서 걸어다닐 때가 자주 있었기 때문에 길을 걷던 洞네 住民들은 가끔 疑訝한 表情으로 뒤돌아보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거의 每日 點心밥을 먹고 나서 플루트 를 불었다고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自身의 著書 《 善惡의 彼岸 》에서 쇼펜하우어와 플루트에 對해서 言及했다. 쇼펜하우어는 音樂에 造詣가 깊었다. 이 事實은 쇼펜하우어가 靑年 時節부터 樂譜를 술술 읽고 모차르트 音樂 硏究에 沒頭한 일에서도 알 수 있다. 意志와 表象으로서의 世界 에서 '音樂의 形而上學'이라는 形式으로 自身의 音樂哲學을 論하고 있다는 것은 注目할 만한 일이다. 바그너는 베토벤 記念 論文인 '베토벤'에서 이렇게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音樂이 文學이나 造形藝術 等과는 全혀 다른 特徵이 있다고 主張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哲學的으로 明快하게 音樂이 다른 藝術分野들 사이에서 차지하고 있는 位置를 確認하고 이렇게 썼다'

 
프랑크푸르트에 세워진 쇼펜하우어 胸像.

덴마크의 思想家 키에르케고르 의 '絶望'이라는 말과 쇼펜하우어의 '苦惱'라는 말은 서로 통하는 部分이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末年에 쇼펜하우어의 思想을 알게 되었다. 키에르케고르가 남긴 많은 日記 속에는 쇼펜하우어의 思想에 對한 感激的인 글들이 남아있다. 키에르케고르의 《 瞬間 》이라는 冊에는 쇼펜하우어의 이름이 直接 言及되지는 않았지만 쇼펜하우어의 影響을 받은 痕跡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헤겔 에 對한 批判, 盲目的인 樂天主義, 近代科學의 傲慢함에 對해서 批判的이었던 것은 키에르케고르와 쇼펜하우어의 共通點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죽기 2年 前에, 그러니까 1853年 程度에 쇼펜하우어의 冊을 읽었다고 한다.

1850年代 中盤의 일이다. 獨逸 브레슬라우大學校 의 켈바 先生은 '쇼펜하우어의 思想과 自然科學의 關係'라는 主題로 講義를 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도 쇼펜하우어에 對한 批評과 冊들이 出版되었다. 英國에서는 쇼펜하우어 冊의 一部가 便역되어 떠돌았고 프랑스에서도 飜譯本이 나왔다. 特히 쇼펜하우어의 哲學書籍 보다는 通俗的이고 明快한 文學的 才致가 돋보이는 '餘錄과 保有'라는 冊이 더 人氣를 끌었다. 쇼펜하우어의 自宅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獨逸의 劇作家 프리드리히 헤벨 도 이 時期에 쇼펜하우어를 訪問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尊敬과 稱讚의 便紙를 쇼펜하우어에게 보낸 사람도 꽤 있었다. 1858年에는 쇼펜하우어의 70살 生日 잔치가 열렸고 이 때에 쇼펜하우어의 名聲은 絶頂에 達했다. 獨逸 作家 테오도어 폰타네 의 切親 빈케라는 사람은 쇼펜하우어에게 銀으로 만든 盞을 生日 膳物로 주었다. 괴테 의 며느리였던 吳틸리에 괴테 는 쇼펜하우어에게 冊 出版에 對한 祝賀 便紙를 썼다. 吳틸리에 괴테는 쇼펜하우어의 女同生과도 親했고 쇼펜하우어가 젊었을 때부터 괴테와 더불어 쇼펜하우어를 應援해준 몇 안되는 사람中 하나였다. 쇼펜하우어는 그 便紙를 받고 吳틸리에 괴테에게 感激에 찬 答狀을 보내기도 했다.

마그데부르크 의 法律顧問官으로 在職한 프리드리히 드루그트 는 쇼펜하우어의 論文과 著書들에 感激하여 쇼펜하우어의 哲學을 知人들에게 널리 알리고 다녔다. 쇼펜하우어를 찾아와 首弟子가 된 율리우스 프라우엔슈타트 는 쇼펜하우어 事後에 遺稿를 整理하여 《 討論의 法則 》이라는 冊을 出版했고 쇼펜하우어 全集을 出版했다. 司法官이었던 아담 도스 라는 사람은 어린 나이인데도 쇼펜하우어의 哲學을 工夫했는데 쇼펜하우어는 이것에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프랑크푸르트의 쇼펜하우어 花崗巖 무덤

쇼펜하우어와 義兄弟처럼 親하게 지냈던 辯護士 빌헬름 그비너 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의 冊을 읽고 感激하여, 먼저 찾아와 眞摯한 이야기를 해서 쇼펜하우어와 親해진 사람이었다. 그非너는 쇼펜하우어의 遺言을 執行했고 쇼펜하우어 집안의 遺産을 遺言에 따라 잘 處理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平平한 花崗巖을 利用해 墓碑를 만들어 줄 것을 生前에 希望했고 墓碑에다가 自身의 이름 빼고는 아무것도 적지마라고 말했다. 以後에 그非너는 쇼펜하우어에 對한 電氣를 最初로 쓰기도 했다. 이 時期에 彫刻家 엘리자베스 네이 가 찾아왔는데 쇼펜하우어는 大理石으로 만들 胸像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 付託을 받았다. 이 胸像을 보고 쇼펜하우어는 만족스러워 했다. 이 胸像의 眞品은 現在 美國 텍사스州 오스틴 詩의 네李美術館에 있다. [18]

어느날 쇼펜하우어는 肺炎 症勢가 있었으나 平素대로 일찍 起牀하여 快活하게 아침食事를 했다. 家政婦는 恒常 그랬듯이 집안을 喚起시키느라 窓門을 열어놓고 집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몇 分쯤 지나서 居室로 들어온 主治醫는 소파에 등을 기대앉아 차분한 表情으로 죽어있는 쇼펜하우어를 發見했다. 1860年 9月 26日 쇼펜하우어의 屍身이 安葬된 무덤 앞에서 擧行된 葬禮式의 參加人員은 別로 없었으나 그의 追從者들이 모였다. 어느 改新敎 牧師가 葬禮式을 主管하며 追悼文을 朗讀했고 이어서 쇼펜하우어의 切親인 빌헬름 그비너 가 準備한 追悼文을 朗讀했다.

"한 世代가 지나도록 우리가 살아가는 世界에서 함께 살았으면서도 如前히 낯선 異邦人으로만 여겨지던 이토록 稀貴한 故人의 官은 實로 飛上한 感懷들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자리에 서있는 누구도 故人의 血肉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故人은 혼자있기를 좋아하며 살았고 孤獨하게 世上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只今 故人의 앞에 있는 무엇이든지 그렇듯이 一平生 孤獨을 堪耐한 故人을 이토록 뒤늦게나마 慰勞해줄 수 있기를 삼가 祈願합니다. 우리가 '죽음의 캄캄한 어둠에 파묻혀 외롭게 放置되는 親舊나 敵을 바라볼 때에도 우리의 눈은 즐길 수 있는 享樂거리를 찾기도 하지만 우리의 다른 모든 感情은 '生命의 源泉들을 알고자 하는 欲望' 속에서 消盡됩니다. 知識은 故人과 언제나 함께하면서 故人을 長壽하도록 도와준 親舊였습니다. 人生을 眞摯하게 對하고 眞摯하게 眞理를 追求한 故人은 어렸을 때부터 世上의 껍데기같은 外面들을 無視했을 뿐더러 그러한 自身의 態度가 自身을 社會的으로 고립시킬 可能性마저도 介意치 않았습니다. 熱情的인 心臟을 지닌 이 深奧한 思想家는 흥겹게 놀다가 突然히 성난 아이처럼 一平生 쉬지 않고 내달리면서 孤獨했고 誤解받았으되 스스로에겐 眞實하기만 했습니다. 타고난 才能과 더불어 그것을 發揮하는 데 必要한 敎育마저 充分히 받은 故人의 冒險을 妨害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故人은 自身이 누리던 그런 (特히 아버지로부터 받은)특혜에 언제나 感謝했습니다. 그래서 故人의 唯一한 所望은 그런 特惠에 報答하는 것이었고 그런 所望을 實現하기 위한 使命을 追求하느라 平生 애썼습니다. 故人은 世上에서 設定했던 目標를 오랫동안 達成하지 못했습니다. 只今 故人의 이마에 씌워진 月桂冠은 故人의 人生이 黃昏에 접어들고나서야 비로소 故人에게 授與된 것입니다. 故人의 確固한 信念은 애初부터 故人의 靈魂에 뿌리박힌 것이었습니다. 故人은 오랜 歲月 동안 남들에게 無視 當하면서도 꿋꿋하게 高潔한 길을 걸었고 거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故人은 에스드라스(Esdras)에 記錄된 '眞理는 다른 모든 것보다도 偉大하고 優越하다'는 命題를 銘心하여 苦生하다가 어느덧 白髮 老人이 된 것입니다."

 
쇼펜하우어 誕生 200周年 記念郵票

主要 著書 編輯

  • 充足理由律의 네 겹의 뿌리에 關하여 》(Uber die vierfache Wurzel des Satzes vom zureichenden Grunde) - 哲學 博士 論文. 이 冊에서 쇼펜하우어가 意圖하는 것은 칸트의 理性批判이 이룬 結果가 헤겔 같은 哲學敎授들에 依해 歪曲되고 있음을 批判한다. 그리고 當代의 流行하던 哲學思潮를 强力히 批判한다.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誤謬를 犯한 點을 指摘하며 칸트의 誤謬를 補完하는 自身의 理論을 提示한다. 이런 點에서 自身의 哲學的 意圖를 이 冊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 意志와 表象으로서의 世界 》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I, II. - 쇼펜하우어의 哲學 躊躇. 古典으로 자리잡은 이 冊은 쇼펜하우어가 靑春을 바쳐서 만들어낸 作品이고 쇼펜하우어는 이 冊을 "一時的이고 헛된 理念을 좇아 사라져가는 自己 世代의 사람들이 아니라 後孫들과 人類를 위해" 썼다며 大膽한 宣言을 했다. 西洋 近代哲學의 眞髓를 보여주는 이 冊은 뛰어난 作品性에도 不拘하고 事實 飜譯으로는 제대로 읽기가 不可能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意志'라는 槪念이 誤解받거나 外面받았다.
  • 《倫理學의 두 가지의 根本 問題》(Die beiden Grundproblemeder Ethik) - '人間 意志의 自由에 關하여' '道德의 基礎에 關하여' 이 두 論文을 묶어 出版된 것임.
  • 《餘錄과 保有》(Parerga und Paralipomena) - 韓國에서 '人生論' 等의 이름을 달고 一部가 飜譯되어 出版되는 冊이다. '小品과 附錄' 이라고 불리기도 함. 外國에서도 "삶의 智慧"라는 式의 題目으로 紹介되기도 하며 小冊子나 便譯本으로 主로 出版되고 있다. 온갖 유머와 文學的 才致가 돋보이고 人生에 對한 格言이 明快한 文體로 敍述되어 있다. 이러한 理由로 獨逸語圈에서 쇼펜하우어의 文章은 最高級 散文이자 卓越한 文學的 글쓰기로 評價받는다.
  • 《視角과 色彩에 關하여》 (Uber das Sehen und die Farben)
  • 自然에서의 意志에 關하여 》(Ueber den Willen in der Natur) 當代 自然科學의 硏究 成果를 빠짐없이 記述했고 그 成果를 哲學과 連結시킨 最初의 冊으로 評價받는다. 獨逸 哲學者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칸트 의 人間學이나 프리드리히 프리스 의 人間學도 이루지 못한 思惟의 人間學的 轉回가 이 冊에서 일어났다고 評價한다. [19]
  • 討論의 法則 》(Der handschriftliche Nachlass 라는 遺稿 中 一部이며 율리우스 프라우엔슈타트 가 編輯하여 出版했다. 韓國語 題目은 出版社 任意로 지었음) - 이 冊에서도 쇼펜하우어는 헤겔 을 非難하며 人格이 低劣한 似而非哲學子 等의 奸邪한 主張 方式을 看破하는 法을 讀者들에게 紹介하고자 했다. "實際 討論에서 相對의 터무니없는 主張 方式을 看破하고 그것을 물리칠 수 있다" 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國內에는 '論爭에서 이기는 38가지 方法' '討論의 法則' 等의 題目을 달고 出版되었다. 쇼펜하우어의 遺稿集은 分量이 꽤 相當하며 아르투르 휩셔 가 編輯하여 總 5卷으로 出版한 바가 있다. [20]

韓國語 飜譯書 編輯

  • 쇼펜하우어. 《充足理由律의 네 겹의 뿌리에 關하여》. 김미영 옮김. 나남출판, 2010. - 김미영의 曆書는 모두 完譯本이다.
  • 쇼펜하우어. 《意志와 表象으로서의 世界》.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15. - 2015年에 附錄이 追加되어 改訂版으로 나왔다.
  • 쇼펜하우어. 《自然에서의 意志에 關하여》. 김미영 옮김. 아카넷, 2012.
  • 쇼펜하우어. 《道德의 基礎에 關하여》. 김미영 옮김. 冊世上, 2004.
  • 쇼펜하우어. 《討論의 法則》. 최성욱 옮김. 원앤원북스. 2016.
  •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幸福論과 人生論》.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09. - 一部만 飜譯된 便譯本이다.
  •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哲學的 人生論》. 권기철 옮김. 동서文化史, 2016. - 便역本이며 內容에 誤謬가 若干있으나 無視하고 읽어도 支障없으며 冊값이 매우 低廉하고 읽을거리가 많아 쇼펜하우어를 工夫하는 初心者에게 推薦할 만하다. 쇼펜하우어가 獨逸語 便역한 스페인의 발타자르 그라시안 의 格言集이 添附되어 있다.
  •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文章論》. 김욱 옮김. 지훈, 2005. - 쇼펜하우어의 < 餘錄과 保有 >에서 글쓰기 및 批評에 關한 部分만 솎아낸 冊이며 日本語 重役書이지만 推薦할 만하다.
  • 헬런 짐먼. 《쇼펜하우어 評傳》. 김성균 옮김. 우물이있는집, 2016(願書는 1876年 出版).
  • 뤼디거 者프란스키. 《쇼펜하우어 電氣》. 정상원 옮김. 꿈결, 2016. ㅡ 정상원의 飜譯은 매우 質이 좋으며 가장 推薦할 만한 쇼펜하우어 評傳이다.

같이 보기 編輯

各州 編輯

  1. “Arthur Schopenhauer (1788?1860)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  
  2. Voluntarism (philosophy) ? Britannica.com
  3. 브라이언 매기, 哲學의 歷史, 박은미 役, 2016, 쇼펜하우어 파트
  4. 討論의 法則, 최성욱 驛 參照. 解說:쇼펜하우어는 "大衆을 眩惑하는 挾雜꾼 헤겔과 그 一黨"이라는 式으로 每番 非難했다.
  5. 쇼펜하우어, 意志와 表象으로서의 世界, 홍성광 驛, 2015, 年譜 參照
  6. 브라이언 매기, 트리스탄 코드, 김병화 驛, 2005, '8張 바그너, 쇼펜하우어를 發見하다' 部分 參照.
  7. 브라이언 매기, 哲學의 歷史, 145쪽.
  8. 카를 구스타프 융, 記憶 꿈 史上(自敍傳), 조성기 驛, 김영사, 133쪽~134쪽
  9. Si le grain ne meurt. Collection Folio. Paris?: Gallimard, 1972.
  10. Aylmer Maude, The Life of Tolstoy:First Fifty Years, 1917.
  11. 브라이언 매기, 哲學의 歷史, 145쪽, 影響에 對한 說明 參照.
  12. 랄프 비너, 愉快하고 독한 쇼펜하우어의 哲學 읽기, 최흥주 驛.
  13. 쇼펜하우어, 道德의 基礎에 關하여, 284쪽, 브라이언 買氣의 말
  14. The Philosophy of Schopenhaur,Oxford, 1983
  15. 버트런드 러셀, 西洋哲學史, 1946.
  16. 칼 포퍼, 끝없는 探究, 박중서 驛, 20쪽.
  17. 칼 포퍼, 삶은 問題 解決의 連續이다, 147쪽.
  18. 意志와 表象으로서의 世界, 2007, 권기철 驛, 生涯 解說 에피소드 參照.
  19. 쇼펜하우어, 自然에서의 意志에 關하여, 2012, 김미영 驛.
  20. 쇼펜하우어, 討論의 法則, 최성욱 驛.

參考 資料 編輯

韓國에 쇼펜하우어의 評傳類들이 別로 紹介된 바는 없으나 海外 書籍 中에는 꽤 많으며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Cartwright, David. Schopenhauer: A Biography ,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ISBN  978-0-521-82598-6
  • Frederick Copleston , Arthur Schopenhauer, philosopher of pessimism (Burns, Oates & Washbourne, 1946)
  • O.F.Damm, Arthur Schopenhauer ? eine Biographie , (Reclam, 1912)
  • Kuno Fischer, Arthur Schopenhauer (Heidelberg: Winter, 1893); revised as Schopenhauers Leben, Werke und Lehre (Heidelberg: Winter, 1898).
  • Eduard Grisebach, Schopenhauer ? Geschichte seines Lebens (Berlin: Hofmann, 1876).
  • D.W. Hamlyn, Schopenhauer ,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80, 1985)
  • Heinrich Hasse, Schopenhauer . (Reinhardt, 1926)
  • Arthur Hubscher, Arthur Schopenhauer ? Ein Lebensbild (Leipzig: Brockhaus, 1938).
  • Thomas Mann , Schopenhauer (Bermann-Fischer, 1938)
  • Matthews, Jack , Schopenhauer's Will: Das Testament , Nine Point Publishing, 2015. ISBN  978-0-9858278-8-5 . A recent creative biography by philosophical novelist Jack Matthews .
  • Rudiger Safranski, Schopenhauer und die wilden Jahre der Philosophie ? Eine Biographie , hard cover Carl Hanser Verlag, Munchen 1987, ISBN  978-3-446-14490-3 , pocket edition Fischer: ISBN  978-3-596-14299-6 .
  • Rudiger Safranski, Schopenhauer and the Wild Years of Philosophy , trans. Ewald Osers (London: Weidenfeld and Nicolson, 1989)
  • Walther Schneider, Schopenhauer ? Eine Biographie (Vienna: Bermann-Fischer, 1937).
  • William Wallace, Life of Arthur Schopenhauer (London: Scott, 1890; repr., St. Clair Shores, Mich.: Scholarly Press, 1970)
  • Helen Zimmern, Arthur Schopenhauer: His Life and His Philosophy (London: Longmans, Green & Co, 1876)

外部 링크 編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