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年
쇼와 天皇
卽位 初期의 陸軍指揮部는 "靑年將校를 煽動할 憂慮가 있다"는 理由로 第1師團長이었던
마사키 振子部로
를 타이완軍 司令官으로 轉勤시켰고, 이때 아라키도 함께 左遷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敎育總監人
무토 노부요시
가 아라키의 救命運動에 나서 아라키는 第6師團長에서 敎育總監 本部長으로 榮轉해 도쿄에 남았다. 무토는
黃桃派
의 擁護者로서
統制派
였던
우가키 가즈시게
의 獨走를 싫어했기 때문에 아라키를 擁護한 것이다.
憲兵司令官 在任時
기타 잇키
를 비롯한 極右 人物들과 交流를 始作했고, 1931年 10月 事件 當時에
하시모토 긴고로
로부터 受賞 候補로 擧論되었으나, 스스로도 別로 내켜하지 않아 受諾하지 않았다.
理解 12月, 아라키는 敎育總監本部長에서
이누카이 內閣
의 陸軍代身으로 拔擢되었다. 參謀總長에는 皇族인
間印노미야 故土히吐 親王
을 怨讐로 임명하여 허수아비火 하려했고, 實勢 參謀次長으로서 臺灣으로 左遷되었던 마사키를 임명하여 불러들였다. 아라키는 自身의 牌거리를 要職으로 앉히고 過激한 靑年將校들을 도쿄의 第1師團에 불러들였다. 以後, 아라키와 마사키를
黃桃派
라고 부르고, 이들에 反對했던 勢力을
統制派
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自身을 따르는 過激靑年 將校들을 自重시키려던 아라키는 이들에게 人望을 잃고 支持基盤을 喪失, 四面楚歌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라키는 過激靑年將校들에 對한 統制力을 喪失했음은 勿論, 陸軍內의 다른 派閥인
統制派
에게도 牽制를 받았다. 1934年 1月, 結局 아라키는 病을 理由로 육군상을 辭任하였다. 自身의 後任으로 아라키는 自身의 派閥인 마사키를 希望하였으나, 參謀總長이었던 間印노미야의 反對로 挫折되었다.
1936年
2.26 事件
이 일어나자, 黃桃派의 首長으로서 過激靑年將校들과 共犯이라는 嫌疑를 받을까봐 軍의 主要人士中에서 第一 먼저 쿠데타軍에게 原隊復歸를 强勸하였다. 그러나 아라키는 이 事件以後 벌어진 黃桃派 肅軍作業에서 第一 먼저 豫編處分 되었다.
1938年 5月 26日,
第1次 고노에 內閣
에서
文部大臣
으로 拔擢되어 "黃道敎育"(皇道敎育)의 强化를 主唱하였다. "國民精神 總動員 委員會"의 委員長도 兼任하여 사상면에서 戰時體制의 宣傳作業을 推進했다. 이때 軍部는 學院, 大學에서 사상면의 自由를 抑壓하였다. 戰後의 도쿄 戰犯裁判에서 그는 이 當時의 行爲에 對한 戰犯嫌疑로 集中的인 追窮을 받았다.
前後 A級 戰犯으로 逮捕되어
스가모 刑務所
에 拘束되었다. 도쿄 裁判에서 自身의 戰犯嫌疑를 頑强히 否認하였다. 以後 終身刑을 宣告받고, 服役中 1955年 病으로 假釋放되었다. 以後 健康을 回復하여 全國을 돌며 講演活動을 하였다.
1966年 講演 活動을 하던 中 心臟病으로 死亡하였다. 그가 죽은후 追從者에 依해 追慕碑가 建立되었다. 碑文은 現職 首相인
사토 에이사쿠
가 直接 作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