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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義軍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神義軍 (神義軍)은 高麗 後記 武臣政權 의 執權者였던 崔瑀 (崔瑀)에 依해 만들어진 士兵(私兵) 集團으로 三別抄 部隊의 하나이며, 大部分이 몽골 에 捕虜로 끌려갔다가 脫走한 高麗人 捕虜들로 構成되어 있었다. 《尙書都官첩》에서는 信義軍別抄 (神義軍別抄)라고 記載되어 있다.

槪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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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史》에 따르면 처음 崔瑀가 盜賊을 막기 위하여 設置했던 이름을 夜別抄(夜別抄)가 以後 그 規模가 늘어나면서 左右로 나누었고, 高麗人으로써 몽골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을 하나의 部隊로 組織하여 神義軍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들을 아울러 三別抄(三別抄)라 부르게 되었다고 說明하고 있다. [1] 神義軍의 創設에 對해서는 《 高麗史節要 》 高宗 44年( 1257年 ) 崔沆이 死亡하고 衰衣가 權力을 繼承하던 當時의 記錄에서 처음 神義軍의 이름이 登場하며, 大略 崔沆 執權期에 神義軍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2]

神義軍은 崔氏 武臣政權의 打倒는 勿論 武臣政權 自體의 打倒에도 加擔하였다. 그 뒤 무신 들의 護衛軍隊로 級 成長하였고, 높은 職位로 昇進했으나 裵仲孫 의 離脫 行爲로 結局 大夢抗爭 을 일으키면서 三別抄로 合倂됐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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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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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高麗史》勸第81 支堤35 病(兵)1.
  2. 몽골에 依한 捕虜는 高宗 40年(1253年) 以後 大擧 發生하였는데, 特히 深刻했던 것은 高宗 41年(1254年) 쟈랄타이의 侵攻 當時 1年 동안에만 當時 20萬 6千 8百 名의 高麗人이 몽골에 捕虜로 잡혀갔으며, 이듬해 正月 5日 捕虜에서 도망쳐 온 大邱 住民들이 高麗 朝廷에 敵에 對한 情報를 提供하면서 高麗人 脫走捕虜의 存在가 알려졌다. 이로 보면 神義軍 設置의 아이디어는 高宗 41年에 提起되고 이듬해인 高宗 42年(1255年)李 神義軍의 設置 時點으로 가장 有力하다(윤용혁 《三別抄 - 無人政權·몽골, 그리고 바다로의 歷史》圖書出版 慧眼, 2014, 15~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