承政院日記는 行政과 事務, 王命, 出納 等을 맡은 承政院의 事務를 記錄한 日記이다. 單一 史料로서는 가장 厖大한 量으로서 史料的 價値가 높게 評價된다. 모두 3,245冊, 글字 數 2億 4,250萬字다.
1960年
부터
1977年
까지
國史編纂委員會
에서
草書體
였던 承政院日記를
楷書體
로 고쳐쓰는 作業을 하였다.
2000年
부터
2010年
까지는 承政院日記 情報化事業을 進行하여 影印本 1冊~111冊, 127冊~129冊에 對한 電算化가 進行되었다.
元本 1部밖에 없는 貴重한 資料로 國寶 第303號(1999.4.9)로 指定되어 있다. 이는 世界 最大 및 1次 史料로서의 價値를 인정받아 2001年 9月 유네스코世界記錄遺産으로 登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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保存과 消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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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政院의 注書(注書)·假注書(假注書)는 날마다 承政院의 日記를 썼는데, 每月의 日記는 다음 달 안으로 完成하여 保存되었다. 元來 朝鮮 開國 以來의 日記가 있었는데,
壬辰倭亂
때(
1592年
,
宣祖
25年) 불탔고,
1623年
(
人組
1年)까지의 日記도
李适의 亂
으로 말미암아 거의 사라졌다. 그 後 壬辰倭亂 以後의 日記를 改修했으나,
1744年
(英祖 20年) 承政院의 火災로 인해 壬辰倭亂 直後부터
1721年
(
警鐘
1年)의 記錄이 消失되어
1746年
(英祖 22年) 日記廳(日記廳)을 設置해 改修했으나 本來 冊數의 3分의 1도 안 되는 量만 改修할 수 있었다. 또 英祖 때의 承政院 日記 中 壬午年의 일(壬午花邊)과 關聯한 內容들은 世孫의 請으로 因해 洗草
[4]
되었다.
[5]
그리고
1888年
(
高宗
25年)에 또다시 火災로
1851年
(
哲宗
2年)에서
1888年
(高宗 25年)까지의 日記 361冊이 消失되었으나 다시 改修했다. 그밖에 수많은 紛失과 火災를 當하고 改修하기를 反復하였고, 個數 때 原本의 內容을 어느 程度 고친 것인지 알 수 없다.
이 冊은 當時의 公的 記錄인 《
備邊司謄錄
(備邊司謄錄)》, 《
日省錄
(日省錄)》과 더불어 드물게 存在하는 朝鮮時代 國政의 結果에 對한 1次 史料로 그 價値는 實錄을 凌駕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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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時期의 日記(日記)라는 낱말은 오늘날에 公務記錄에 該當하는 日誌(日誌)에 더 가깝다.
- ↑
“韓國古典綜合 承政院日記 高宗 44年”
. 2014年 2月 2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8月 14日에 確認함
.
- ↑
文化財廳 國家文化遺産포털
- ↑
洗草(洗草)란 焦憔와 中草를 記錄한 종이들을 아예 물에 씻어서 새 종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 ↑
英祖 127卷, 52年(1776年) 2月 4日 3番째記事 / 英祖 127卷, 52年(1776 病身 / 靑 乾隆(乾隆) 41年) 2月 6日(무신) 2番째記事
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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