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友會
는 여기로 連結됩니다. 同友會巡廻演劇團에 對해서는
劇藝術協會
文書를 參考하십시오.
修養同友會
(修養同友會)는
日帝强占期
朝鮮
에 結成된 敎育, 啓蒙, 社會運動 團體이다.
興士團
의 姊妹 團體이며
안창호
,
이광수
,
주요한
,
주요섭
,
김동원
等에 依해 結成되었다.
1926年
1月
興士團
의 朝鮮支部格인
修養同盟會
와
동우俱樂部
가 統合되어 出帆하였고,
1937年
修養同友會 事件 以後
1938年
大規模로 逮捕, 拘束되어 解體되었다. 修養同友會는 國內의 知識人들에게도 刺戟을 주어
興業俱樂部
,
請求俱樂部
等의 靑年 團體들과
基督敎
系列 團體인
積極信仰團
의 組織에 影響을 주었다.
1937年
6月 6日
부터
8月 10日
까지 京城支會 會員 및 京畿道支會 會員 55名, 11月 平壤宣川支會 會員 93名, 1938年 3月 安岳地會員 33名 等 總 183名이 逮捕되어 强制 解散되었다. 이 中 41名이 起訴되고 나머지는 不起訴狀態로 裁判을 받다가 1941年 11月 全員 無罪로 釋放되었다.
結成과 統合
編輯
修養同友會는
1926年
에
修養同盟會
와
동우俱樂部
가 統合하는 形式으로 結成되었다. 이어
興士團
界 國內 組織을 吸收해 나갔다. 修養同盟會는
興士團
系列의 團體로
안창호
와 密接한 關係를 지녔다. 人的 構成은 安昌浩를 따르는 西北 地域 知識人들이 中心이 되었다. 指導 理念은 安昌浩의 務實力行(務實力行)이다.
安昌浩가
상하이
에 머물 때 상하이의 靑年들이
1920年
에 興士團 原動委員部를 組織했고,
京城府
에서는
이광수
가 修養同盟會를,
1923年
에는
平壤
에서는
김동원
等 安昌浩가 設立한
大成學校
卒業生들과
新民會
出身들이 동우俱樂部를 組織했다. 言辯에 뛰어났던 安昌浩는 美國內 韓人 靑年들을 說得하였고 그 中 조병옥, 張澤相 等을 興士團에 加入시키는데 成功했다. 그러나 趙炳玉 等과는 달리 張澤相 等은 活動에 消極的이었다.
1926年 1月에 修養同盟會와 동우俱樂部가 興士團 國內 組織 格으로 統合하여 修養同友會가 誕生했다. 主要 人物은 李光洙와
주요한
,
조병옥
等이다. 趙炳玉은 興士團의 美國 組織의 幹部級 人士이면서 修養同友會 美國 支部의 指導도 監督하였다.
會員의 多數가
基督敎
가 먼저 傳播된 西北 地域에서 基督敎를 통해 開化 文物을 接했거나 辯護士, 醫師, 敎育인, 牧會者와 같은 專門 職業을 가진 知識人들이었다. 또한 實業人과 鑛山業者 等 資産家들도 多數 包含되었다.
修養同友會는 理想村을 建設하는 農村 運動을 展開하고 機關紙 《동광(東光)》을 發行했다. 부르조아的 社會 運動을 推進했고, 朝鮮의 獨立에 對해서는 李光洙를 中心으로 自治論的 立場에 기울어져 있었다. 基督敎界 內部의 오랜 西北 臺 記號 出身들의 葛藤 속에 修養同盟會에 對抗하여 記號 地域 知識人 中心으로 結成된
李承晩
의
興業俱樂部
와는 一種의 競爭 關係였다.
1929年
에 國外 組織인 興士團과 國內 組織인 修養同友會를 統合하여
同友會
로 改稱했다. 當時 會員은 82名이었다.
同友會 事件
編輯
植民 統治가 길어지면서 同友會로 改稱한 뒤에 눈에 뜨이는 活動이 없던 修養同友會는
1937年
中日 戰爭
勃發 時點에
日本 帝國
이 일으킨 修養同友會 事件으로 瓦解되었다. 本格的인 戰爭 體制를 造成하기 위해 良心的 知識人 및 부르조아 集團을 包攝할 必要가 있던 日帝가 修養同友會와 興業俱樂部를 標的 搜査한 것이다.
1937年 8月 서울에서 55名, 11月 平安道 地域에서 93名,
1938年
3月에는
黃海道
에서 33名 等 모두 181名의 同友會員들이
治安維持法
違反 嫌疑로 逮捕되었다. 이 가운데 41名이 起訴되었다가
1941年
11月에야 無罪 釋放되었다.
이 事件으로 檢擧된 會員들은 强制로 轉向한 뒤 日帝에 協力하게 되었다. 作曲家
홍난파
, 長老敎 牧師
정인과
, 醫師인
이용설
等이 代表的이며, 中心 人物이었던 李光洙와 朱耀翰은 特히 極烈한 親日 行跡을 보였다. 同友會는 1937年 解散되면서 保有 資金과 土地, 事務機構를 賣却한 金額까지 긁어모아 國防獻金으로 納付했다.
윤치호
는
朝鮮總督府
를 찾아가 修養同友會 事件 關聯者들의 身元保證을 序奏祈禱 했다. 그러나 以後 터진
興業俱樂部
事件과
請求俱樂部
事件 關聯者들의 身元保證까지 서 주면서 그는 窮地에 몰리기도 한다.
以後 社會에 끼친 影響
編輯
拘束 被逮된 이 中 修養同友會와 興士團의 指導者格인 安昌浩가 拷問後遺症으로 病死하였고, 作曲家 兼 指揮者
홍난파
亦是 拷問의 旅毒으로 病院에 入院했다가 곧 死亡했다.
이 事件은 社會의 名望家와 知識人들 等 數 많은 獨立運動家들을 親日로 轉向시키기 위해 日帝가 主導的으로 일으킨 日帝强占期 後半의 代表的인 事件의 하나로, 이 때부터 名望있는 親日派가 大擧 形成되어 社會的인 影響을 끼쳤고, 이는 歷史에도 큰 影響을 끼쳤다.
民族分裂 統治의 起爆劑라고 봐야 할 것이며, 親日派 論難에서도 빠질 수 없는 事件이라고 할 수 있다.
안창호
는 이 事件에 連累되어 出獄한지 얼마 안되어 다시 投獄되었고, 病保釋으로 假出獄하였으나 얼마 안가 死亡하였다.
같이 보기
編輯
參考資料
編輯
- 이이화 (2004年 5月 1日). 〈第3部 朝鮮民族은 없다 - 4. 祖國을 위하여〉. 《韓國史 이야기 21 (解放 그날이 오면)》. 서울: 한길사.
ISBN
8935651605
.
- 이광수 (2000年 6月 30日). 《島山 安昌浩》. 서울: 梵魚寺.
ISBN
890803206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