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勢道政治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勢道政治

朝鮮 王朝의 外戚이 된 家門이 王의 委任을 받아 나라를 다스리던 政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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勢道 政治 (勢道政治)는 朝鮮 王朝의 外戚이 된 家門이 王의 委任(委任)을 받아 政權을 잡고 나라를 다스리던 政治이다.

歲도 歷史 編輯

英祖·正朝와 같은 뛰어난 君主가 蕩平策 을 쓰고 있는 동안은 어느 程度 政治의 安定을 期할 수가 있었다. 英祖 末年부터 正祖 初年에는 貞操를 保護한 功이 있는 홍국영 都承旨 로 있으면서 政權을 壟斷하였으나,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아 政權에서 排除되었다.

그러나 正祖가 昇遐하고 順調 가 11歲의 어린 나이로 卽位하자 外戚勢力은 王權을 壓倒하고, 이른바 勢道 政治가 始作되었다. 卽 純祖 秒에 正祖의 有名(遺命)으로 新 安東 金氏 김조순 府院君이 國舅(國舅)로서 政治를 專擔하다시피 하였는데, 이에 따라 그의 一族은 모두 영달하여 老論 인 新 安東 金氏는 많은 官職을 차지했다. 다만 能力도 없이 官職에 오른 풍양 조氏와는 달리 神 安東 金氏는 모두 文科에 及第할 程度로 뛰어난 財源이었다.

權力을 獨占하던 申 安東 金氏의 全權 時代는 풍양 조氏 를 만나 一時 後退하였다. 그것은 翼宗 의 非(妃)가 조만영 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憲宗 때에는 조氏 一門이 政權을 掌握하게 되어 조氏는 많은 官職을 歷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哲宗 이 卽位하면서 비가 김문근 의 딸이었으므로 다시 勢道家 新 安東 金氏 에게로 돌아갔다.

이러한 形勢였으므로 宗室(宗室)이라하더라도 金氏 一門의 勢力에 억눌려 살아야 했으며, 다른 勢力이 新 安東 金氏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 政治에 參與할 機會 또한 稀薄해졌다. 따라서 政治 紀綱이 極度로 紊亂해져서 儒敎的인 官僚 政治는 무너지고, 朋黨 사이의 勢力 鬪爭 時代로부터 戚族(戚族)李 政權을 壟斷하는 時代로 變化한 것이다.

王室의 外戚이 政權을 獨차지함으로써 戚族의 家門이 高位 官職을 獨占하여 政治 紀綱이 더욱 紊亂해졌다. 그로 말미암아 農民들의 被害는 더욱 커졌으며, 많은 賂物 을 바치고 官職을 얻은 官吏들은 그 代價를 農民에게서 짜 내어 自身의 利益만을 얻어 갔다. 當時 財政을 擴充하는 制度는 剪定(田政)·軍丁(軍政)· 還穀 (還穀)이었으며, 통틀어 삼정(三政)이라 한다. 勢道 政治와 맞물려, 삼정은 날로 紊亂해졌다. 前庭에서는 三手米·大同米·結作·都結 等의 弊害가 極甚했고, 軍政에서는 黃口簽丁·白骨徵布·族徵·隣徵 等의 各種 便法이 생겨서 農民을 괴롭혔다. 還穀 또한 고리(高利)로 利益을 搾取하는 手段이 되었으며, 반작·虛留 等 여러 가지 方法으로 農民을 收奪하였다.

이러한 三政의 紊亂은 農民에게 過重한 負擔이 되었을 뿐 아니라, 國家의 財政까지 威脅했고, 곳곳에서 民亂이 發生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神 安東 金氏의 後孫들 中 相當數가 朝鮮 滅亡 以後에도 獨立運動家와 巨物政治家들이 輩出되면서 國家를 다시 부흥시켰다. [1] [2]

正祖 移轉 編輯

正祖 때 홍국영 이 勢道 政治를 하기 前의 歲도(世道)는 單純한 政治權力보다는 어떤 指導理念과 公正한 言論을 主體로 하여 世道人心(世道人心)을 바로잡으려는 思想的·道義的인 一面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을 堪當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人格과 뛰어난 學識이나 德望을 가져야만 되었고, 따라서 王都 높은 官職을 주어 優待하였다.

例를 들면 中宗 때의 조광조 는 敎學(敎學)의 最高委 職印 知成均館事(知成均館事)를 거쳐 大司憲에 任命되었으며, 孝宗 · 顯宗 때의 송시열 은 禮曹參判에서 信任을 받기 始作하여 吏曹判書를 歷任하고, 뒤에 右議政 · 左議政 等의 要職에 있으면서 勢道의 信任과 委任을 받았다.

正祖 以後 編輯

그러나 正祖 때에 이르러서는 治世(治世)의 道理를 主張하여 精神的으로 王을 補佐하기보다는 實地로 政治權力의 行使를 委任받아 權勢를 부리는 政治 形態로 變質되면서 歲도(世道)는 흔히 歲도(勢道)로 일컫게 되었다.

洪國榮의 歲도 編輯

正祖 때의 홍국영 은 正祖가 王世孫으로 있을 때 정후겸 · 홍인한 等의 威脅에서 그를 保護하여 無事히 王位에 오를 수 있게 한 功으로 都承旨 兼 禁衛大將에 任命되어 王의 身邊 保護를 맡는 한便 모든 정사도 그를 거쳐 喪主(上奏)하고 決裁하는 權限을 委任받았다. 그래서 요즘 흔히 쓰이는 뜻으로서의 勢道 政治는 洪國榮에서 始作된다.

홍국영 以後 勢道 政治의 特色은 大槪 戚臣(戚臣)으로서 王과 密接한 關係에 있는 사람이면 官職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指名되었으며, 治世의 道理보다는 上下의 민정과 信任의 動向을 調査 報告하고 人事 行政에까지 直接 參與하여 權力의 濫用을 招來함으로써 外戚(外戚)의 跋扈를 보게 된 데 있다.

홍국영 以後의 歲도 編輯

洪國榮의 勢道는 그의 不正과 腐敗 때문에 1780年 (正祖 4年)에 추방당하고 말았지만 正祖가 죽고 順調가 不過 11歲에 卽位하게 되자, 大王大妃 였던 英祖의 繼妃 정순왕후 垂簾聽政 을 통하여 慶州 金氏 中心의 勢道 政治를 始作하였다. 垂簾聽政을 거둔 以後 正祖의 遺託(遺託)을 받아 김조순 이 政權을 잡아 慶州 金氏 勢力을 肅淸하고 이듬해에 그의 딸인 순원왕후 가 純祖의 비가 되면서부터 外戚 新 安東 金氏 가 行하는 勢道 政治의 기틀이 잡히게 되어서 中央의 要職은 그의 一族(一族)李 모조리 獨占하였다. 그 뒤 翼宗 의 非(妃)로서 조만영 의 딸( 신정왕후 )이 들어서면서

憲宗 때에는 할머니 순원皇后 金氏 實權갖고 親庭인 安東 金氏 와 그의 外家인 풍양 조氏 間에 暗鬪가 벌어졌다.

哲宗 이 卽位하고는 그 비인 철인왕후 김문근 의 딸이었으므로 다시 神 安東 金氏가 勢道를 잡게 되었다. 비록 王族이라 하더라도 金氏의 勢道에 억눌려 살아야 되었으니, 假令 王族인 이하전 이 過去 試驗場에서 金氏의 子弟와 싸워 牌하고는 뒤에 죽음을 當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온갖 挾雜이 盛行하여 政治의 紀綱은 紊亂해지고 民生은 塗炭에 빠지게 되었다.

高宗 이 王位에 오르자 흥선大院君 이 政權을 잡고 新 安東 金氏의 勢力을 꺾어, 한때 獨裁的인 勢道 政治를 이룩하여 外戚이 勃興하는 勢道 政治의 弊端이 없어지는 듯하였으나 얼마 뒤에 명성황후 에게 逐出되고부터는 다시 韓末까지 餘興 閔氏 一族이 外戚의 勢道 政治가 그대로 持續되었다. 1895年 (高宗 32年) 明成皇后 閔氏가 弑害된 뒤에도 國家의 要職을 차지한 餘興 閔氏 가 1千 名을 넘었다.

勢道 家門 編輯

풍산 洪氏 編輯

풍산 洪氏 (豊山 洪氏)는 홍주원 (洪柱元)李 宣祖의 駙馬가 되었고, 홍주원의 아들 홍만용 (洪萬容)은 肅宗 때 禮曹判書를 지냈으며, 홍만용의 孫子 홍현보 (洪鉉輔)도 英祖 때 禮曹判書를 지냈다. 홍현보의 아들 홍봉한 (洪鳳漢)은 思悼世子의 비인 혜경궁 洪氏 의 아버지로서 英祖 때 領議政에 올랐고, 洪鳳漢의 동생 홍인한 (洪麟漢)은 左議政에 올랐으며, 홍봉한 의 5寸인 홍낙성 (洪樂性)은 正祖 때 領議政에 올랐다. 홍주원의 6代孫인 홍국영 (洪國榮)은 正祖 때 勢道政治로 權勢를 잡았다.

新 安東 金氏 (章動 金氏) 編輯

新 安東 金氏 는 朝鮮 後期 順調·憲宗·哲宗의 3代에 걸친 王의 外戚으로서 朝廷의 要職을 獨차지하고 勢道 政治를 行하였다. 洪國榮이 勢道 政治를 行한 以來 歷代 帝王은 나이가 어려 勢道 政治가 더욱 本格化되었다. 純祖가 11살에 卽位하자 金祖淳이 自己 딸을 王妃로 삼아 外戚으로 政權을 掌握하게 되어 많은 神 安東 金氏 一派가 要職에 앉았는데, 1827年(純祖 27年) 世子가 政治를 代理하고 풍양 조氏 一派가 政權을 掌握하여 한 때 政權을 빼앗기기도 했다.

哲宗이 卽位하여 김문근 의 딸이 王妃가 되자 金氏는 또다시 政權을 잡게 되어 김좌근 (金左根) · 김재근 (金在根) · 김수근 (金洙根) · 金炳翼 (金炳翼) · 김병국 等이 國政을 左右하는 中心 人物이 됨으로써 金氏의 勢力은 絶頂에 達했다.

풍양 조氏 編輯

풍양 조氏 는 朝鮮 後期 憲宗 代를 통해 王의 外戚으로서 政權을 잡아 勢道 政治를 行하였다.

1827年(純祖 27年)에 王世子가 父王의 身柄 療養으로 인하여 政治를 代理하게 되자 조만영 의 딸을 비(妃)로 삼아 조氏 一派는 金氏 一派와 勢力 다툼을 벌여 한동안 勢道를 잡았으나, 그들間의 不和 反目으로 勢道가 무너지게 되었고, 哲宗 卽位와 함께 神 安東 金氏에게 勢力을 빼앗기고 말았다.

반남 朴氏 編輯

純祖의 어머니 수빈 朴氏 반남 朴氏 이다. 德分에 수빈 朴氏의 아버지인 박준원 은 正祖 事後 定順王后 金氏 (當時 大王大妃)가 垂簾聽政하던 時期에 御營大將을 거쳐 判義禁府事 자리까지 오른다. 수빈 朴氏의 오라비인 朴宗慶과 박종보度 順調 臺에 勢道家로 이름을 떨쳤다. 朴宗慶은 풍양 조氏 조득영의 上疏로 물러나게 된다. 이 外에도 박기수, 朴晦壽, 박윤수 等이 있다. 반남 朴氏는 純祖 때와 憲宗 秒에 勢力을 잡았으나 哲宗 時節 核心 人物들이 사라지자 沒落한다.

餘興 閔氏 編輯

餘興 閔氏 (驪興 閔氏)는 민유중 (閔維重)의 딸이 肅宗 의 王妃 인현왕후 (仁顯王后)가 되면서 민유중 은 여양府院君(驪陽府院君)에 封君되었고, 민유중 의 兄인 민정중 (閔鼎重)李 左議政에 올랐으며, 민정중 의 아들 민진장 (閔鎭長)은 右議政에 올랐다. 인현왕후 의 오빠인 민진후 (閔鎭厚)는 左參贊 (左參贊)에 올랐고, 민진후 의 동생인 민진원 (閔鎭遠)은 英祖 때 老論의 領袖로서 左議政 에 이르렀다. 민진후 의 玄孫인 민치록 (閔致祿)의 딸이 高宗의 妃인 명성황후 (明成皇后)가 되면서 餘興 閔氏의 勢道政治가 始作되었다. 女銀府院君(驪恩府院君) 민태호(閔台鎬)의 딸은 順從의 비 순명효황후 (純明孝皇后)가 되었다.

各州 編輯

같이 보기 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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