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船艙
(船艙)〉은
1941年
에 歌手
고운봉
이
오케레코드
에서 發表한
韓國
의
트로트
曲이다.
劇作家 兼 作詞家였던
조명암
이 歌詞를 쓰고, 天才 音樂家로 有名한
김해송
이 作曲했다. 歌手 고운봉은 〈船艙〉을 發表할 當時 데뷔한 지 2年이 된 新銳級 歌手였다. 고운봉은 이 노래를 히트시켜 歌手로서의 立地를 굳혔고, 〈船艙〉은 고운봉의 代表作으로 남았다.
그러나 光復 後 照明癌은
左翼
活動을 하다가 越北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의 高位職을 거쳤고, 김해송 또한
韓國 戰爭
中 行方이 杳然해져 越北說과 拉北說이 同時에 떠돌면서 두 사람의 이름은 오랫동안
大韓民國
에서 言及할 수 없었다. 이 노래는 作詞者와 作曲者의 이름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禁止曲이 되지 않았다.
第6共和國
樹立 以後 越北 藝術人이 解禁되면서 元來의 作詞家와 作曲家를 밝힐 수 있었으며, 그동안 作者로 알려졌던 이들이 訴訟을 걸어왔으나 結局 原作者가 드러난 逸話가 있다.
[1]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라는 導入部의 歌詞가 잘 알려져 있다.
김화랑
이 演出한
1960年
映畫 《
울려고 내가 왔던가
》는 이 有名한 歌詞에서 題目을 따왔다
[2]
. 이어지는 歌詞 內容은 비 오는 날 船艙街를 거닐며 헤어진 사람과의 幸福했던 追憶을 되새기는 것이다. 離別의 아픔을 絶妙하게 描寫하여 큰 사랑을 받았다.
大韓民國에서는 國民的 愛唱 歌謠로 남아 있으며
[3]
, 日帝 强占期 동안 發表되어 널리 알려진 曲이라 北朝鮮에서도 '啓蒙期 가요'로 分類되어 繼續 불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5]
2000年
고운봉의 故鄕인
忠淸南道
禮山郡
德山溫泉에 노래 歌詞를 새긴 노래碑가 세워졌다.
家事<ref>21年 5月3日 가요무대에서 船艙이 나왔는데 3節까지 나온것이다. 確認바람</ref>
編輯
1. 蔚~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비~린內 나는 埠頭가엔 이슬 맺은 百日紅
그~代와 둘~이서 꽃씨를 심던 그날도
지~金은 어디로 갔나 찬비만 내린다
2. 蔚~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蔚~어본다고 다시 오랴 사나이의 첫 純情
그~代와 둘~이서 希望에 울던 港口를
웃~으며 돌아가련다 물새야 울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