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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창보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서창보 (徐彰輔, 生沒年 未詳 )는 大韓帝國 의 官僚 出身으로, 親日團體인 國民同志贊成回 副會長을 지냈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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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年 漢城府 의 注射를 歷任하였고, 1899年 부터 約 4年間 忠淸北道 陰城郡 等 여러 곳의 郡守로 勤務 [1] 했다. 1903年 大韓帝國 中樞院 議官, 1905年 에는 辨理公使로 高位職에 올랐다.

그는 官僚로 일하면서 重要한 政治的 事件이 있을 때 자주 上疏로 自身의 意見을 披瀝했다. 명성황후 復位를 主張하거나 俄館播遷 中인 大韓帝國 高宗 이 還宮해야 한다는 等의 內容이었다.

1898年 皇國協會 에 加擔하여 獨立協會 와 對立하였고, 乙巳條約 締結 後에는 羅喆 이 謀議한 乙巳五賊 剔抉 計劃에 加擔했다가 붙잡혀 流配되었다. 流配 期間 中 一進會 의 論理에 贊同하면서 親日派 로 돌아선 것으로 《 國民新報 》에 報道된 바 있다.

1909年 부터 一進會의 合邦請願運動을 支持하는 藏書를 보내기 始作했다. 眞신유생 代表를 稱하며 한 이런 行動에 對한 輿論이 좋지 않아 서창보의 집에 밤마다 돌이 날아들고 直接 찾아와 毆打하는 사람들까지 생기는 等 苦楚를 겪었다. 이 때문에 마음대로 밖을 다닐 수가 없을 程度였다. 特히 서창보의 女同生은 外部大臣 署理와 法部大臣을 지낸 유기환 의 夫人이었는데, 이런 서창보를 責望하다가 毆打를 當하고 男妹間의 因緣을 끊었다는 逸話가 있다.

1910年 韓日 倂合 條約 締結의 雰圍氣가 무르익자 이범찬 等과 함께 國民同志贊成會를 結成하여 副會長을 맡고 合邦贊成藏書를 提出하는 運動을 벌였다. 서창보는 決死洞지단까지 結成하면서 積極的인 活動을 벌여, ‘檢階段’이라는 團體 名義로 그의 罪狀을 摘示하며 處斷하겠다는 內容의 壁報가 붙는 等 繼續 輿論의 叱咤를 받았다. 1934年 日本 에서 흑룡회 日韓合邦記念塔 을 세우면서 石室에 韓日 合邦 功勞者로 서창보의 이름을 記錄했다.

2006年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調査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106人 名單 에 包含되었으며 2008年 發表된 民族問題硏究所의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에도 選定되었다.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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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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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 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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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2006年 12月). 〈서창보〉 (PDF) . 《2006年度 調査報告書 II - 親日反民族行爲決定理由서》. 서울. 679~688쪽쪽. 發刊登錄番號 11-1560010-0000002-10. 2007年 10月 8日에 原本 文書 (PDF) 에서 保存된 文書 . 2007年 8月 19日에 確認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