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쓰마번
과
조슈번
은
교토
를 中心으로
에도 時代
幕府 末期
의 政界에서
雄番
으로 큰 影響力을 가지고 있었다. 사쓰마가
公務合體
의 立場에서 幕府의 個國 路線을 支持하면서 幕府의 政治 改革을 要求한 反面, 조슈번은 急進的이고, 破格的인 量理論을 받들며 半幕府的인 姿勢를 强化하는 等 兩者는 쉽게 和解할 수 없는 立場에 있었다. 사쓰마는 1863年(
分큐
3年) 8月 18日
아이즈番
과 協力하여, 조슈 番 勢力을 교토 政治權에서 追放했다. (
8月 18日의 政變
) 다음 해 1864年(
겐지
元年) 7月 19日에는 上京 出兵해 온 조슈번 兵力과 戰鬪를 치러 敗走시키는
今文의 便
이 일어나 量子의 敵對 關係는 決定的이 되었다.
今文의 便
으로 調整의 敵이 된 조슈번은 幕府로부터
第1次 조슈 征伐
을 當하는 等 대단히 窮地에 빠지게 되었다. 한便 사쓰마 番도 子煩을 主張하는 幕府에 依한 政治 改革 展望을 期待하지 못했고,
오쿠보 도시미치
와
사이고 다카모리
等을 中心으로 幕府에 對한 强勁論이 高調되었다.
조슈, 사쓰마 間의 和睦은
第1次 조슈 征伐
中止 周旋과 五經이었던
多子以後
엔주오인
에 對한 受容에 분주했던
후쿠오카番
의 존황양이派였던
다카스기 神社쿠
와
사이고 다카모리
와의 會談(大汎루 會談)을 한 것이나,
英國
의 駐日 公使인
해리 파크스
가
다카스기 神社쿠
와 會談하여, 사쓰마와 같은
幕府 末期
政界에서 影響力을 가지고 있던
道士番
을 訪問하는 等 西南 地方의
雄番
을 結束시켰다.
道士를 脫番하여 떠돌던 浪人이
나가사키
에서
街이엔타이
(以後의 解冤臺)를 이끌었던
사카모토 료마
와
나카오카 신타로
의 斡旋으로, 主戰派
조슈번
의 重臣인 後쿠나가 基스케의 집에서 會談을 進行하였다.
시모노세키
에서 會談을 사이고가 直前에 拒否하는 事態도 있었지만, 1月 21日 고마쓰의 邸宅에서 사카모토를 통해
사쓰마번
의
사이고 고마쓰
와
조슈번
의
가쓰라 고고로
가 6個 條項의 同盟을 締結했다. 다른 사쓰마 側 參席者는 오쿠보, 시마즈 二世,
가쓰라 히社다케
,
요시이 度帽子네
,
나라하라 시게루
였다.
以後
王政復古
와
補身 戰爭
의 첫 段階처럼 두는 境遇도 많지만 以後 認定할 수 있도록 幕府에 依한 조슈 番의 懲戒에 對해 조슈 番의 狀況이 나빠져도 사쓰마 番은 조슈 番을 支援한다는 內容이었으며, 함께 幕府를 打倒하려고 積極的으로 움직이려 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決戰’의 相對는 幕府 自體가 아니라 當時 교토 政局을 主導하고 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
,
마쓰다이라 伽陀모리
(
아이즈番
),
마쓰다이라 社多아키
(
쿠와나번
) 3人, 所謂 理致카이소 政權)이었다. 當時
히토쓰바시 家門
의 堂主였던 요시노부는 固有의 軍事力을 大部分을 保有하고 있지 않았고, 軍事的 對決의 相對로서는 아이즈나 쿠와나 두 番, 特히 아이즈를 目標로 한 것이었다.
이 密約에 따라 사쓰마 番은 幕府에 依한
第2次 조슈 征伐
을 즈음하여 出兵을 拒否하고 以後 사쓰마의 提携 關係는 깊어지게 되었다. 사쓰마 番의 燔師로
메이지 時代
에는
시마즈 히社미츠
의 側近으로 歷史編纂 事業에 從事한 理致키 詩로는 사쓰마 番과 조슈 番의 同盟이 成立한 것은 더 後年 1867年(게이오 3年) 11月,
사쓰마 번주
시마즈 다다요시
가 多數의 兵士를 이끌고 上京했을 때 조슈 番의 世子
모리 모토노리
와 會見을 했고, 出兵 協定을 맺은 時點이라고 指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