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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別抄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三別抄

高麗時代의 武裝 團體

三別抄 (三別抄)는 몽골 侵略期 에 그에 對抗하던 高麗 의 武裝 勢力이며, 元來는 하나의 單一한 團體가 아니었다. 뒤에 三別抄의 亂 을 일으킨다. 다른 叛亂軍과는 달리 元來는 非正規軍이었다가 正規軍으로 再編된 軍隊였다. 濟州島에서 潰滅하였다는 것이 通說이나, 一部 勢力이 류큐 王國 (오키나와 地域)으로 向하였다는 主張도 提起되고 있다. [1]

由來 編輯

別抄(別抄)는 몽골 侵入 以前부터 登場하는데, 旣存의 正規 軍事組織 以外의 새로이 編成된 軍隊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以後 別抄는 地域別 別抄, 身分別 別抄 等으로 變化하게 되는데, 이는 高麗 前期의 軍事 組織을 代替하는 새로운 軍事 組織의 登場을 의미한다. 첫 登場은 武臣政權 初盤期에 發生한 趙位寵이 일으킨 叛亂 때부터이다. 大夢抗爭과 關聯하여서는 夜別抄 等이 主로 言及되지만, 地域이나 身分別 別抄軍 또한 大夢抗爭期에 活動한 모습이 確認된다.

三別抄는 처음에 崔瑀 가 도둑을 막기 위해 設置한 夜別抄(夜別抄)에서 由來한다. 夜別抄는 1219年 崔瑀 가 權力 保護를 위해 組織한 士兵이었는데, 뒤에 몽골의 侵略에 對抗하는 正規軍으로 編成되었으며, 道傍의 直轄 部隊의 性格을 띠게 된다. 그에 따라 夜別抄는 다시 左別抄, 右別抄로 나뉘었으며, 몽골에 捕虜로 잡혀갔다 돌아오거나 脫出한 이들로 이루어진 神義軍을 包含하여 三別抄라 불렀다. [2] 三別抄는 主로 警察·軍事 等의 公的(公的) 任務를 띠었으나 武人 정권기의 特性上, 實質的으로는 崔氏 武臣政權의 士兵 에 가까운 組織이었다. 한便으로 그 指揮官에는 도령(都領)·指揮(指揮)·敎委(校尉) 等의 武班官僚들이 任命되어, 어디까지나 國家의 統制를 받는 軍組織이기도 하였다.

大夢抗爭의 背景 編輯

1231年 부터 몽골 侵略이 始作되자 崔氏 一家와 支配者들은 江華島 로 避難을 떠난다. 1258年 김준 최충헌 의 曾孫 崔의 를 殺害함으로써, 崔氏 一家 獨裁를 종식시켰다. [2] 그러나 그 뒤에도 支配者는 김준에서 林衍 , 그리고 다시 林衍 의 아들 임유무 로 무신 支配는 승계되었다. 이 渦中에 元宗 은 結局 몽골에 屈服했고, 大勢는 이미 몽골에 屈服한 元宗 쪽으로 기울었다. 1270年 陰曆 5月 元나라 에서 歸國길에 오른 元宗 1270年 開京 으로의 環刀를 斷行하였다. 이는 高麗가 몽골 에 依한 格下를 前提로 하는 것이었다. 卽, 元 干涉期의 始作이었다. 그러자 임유무 는 이에 抵抗한다. 그러자 元宗 은 三別抄를 懷柔하여 임유무를 暗殺하여 100年間 王權보다 더 强力한 權勢를 휘두르던 武人時代는 完全히 終末을 告하게 되었다. [2]

大夢抗爭 編輯

그러나 結局 1270年 開京 還都가 臨迫하자 三別抄는 몽골에 屈服한 王에게 運命을 맡길 수 없었고, 內部에서 動搖하기 始作했다. 結局 元宗 은 三別抄에게 解散令을 내리고 그들의 名單 을 거둬오도록 指示하였다. 이 延命部가 몽골 君의 手中에 넘어가면 三別抄는 큰 打擊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三別抄 內에서 이에 對한 反感이 컸다. 마침내 1270年 陰曆 6月 初, 開京 環刀를 앞둔 時點에서 三別抄의 指導者였던 裵仲孫 盧英姬 等 三別抄 指揮者들은 抗戰을 決定한다. [2]

三別抄는 王族인 왕온 을 推戴하여 王으로 삼고, 江華島의 거의 모든 財産과 사람들을 태운 大船團을 이끌고 珍島 로 移動했다. 이 過程에서 江華島의 大部分의 施設은 불태워졌다. 當時 進度와 그 隣近 地域에는 過去 崔氏 政權 이 所有恨 大規模의 農場이 그때까지도 存在하였다. 同時에 進度는 慶尙道 全羅道 地方의 稅穀이 서울로 運送되는 길목에 屬해 있었다. 이는 稅穀 으로 運搬되는 食糧과 資金을 自體 軍糧으로 쓰는 同時에 軍事的인 要衝地였다. [2]

珍島에 到着한 三別抄는 ' 용장사 '라는 절을 臨時 宮闕로 삼았다. 그리고 용장사 周邊에 酸性 을 쌓고 官衙도 세웠으며, 이를 基盤으로 進度는 제법 都邑地의 面貌를 갖추었다. 鎭壓軍은 束手無策이었던 反面, 이들은 南海岸 一帶를 席卷하고 解像力을 基盤으로 하는 새로운 政府를 建設한다. [2] 그들은 또 高麗의 正統 政府임을 自處하면서 日本 에 使節을 交換하는 等의 外交活動度 하였다. 1270年 陰曆 11月 이르러 三別抄軍은 濟州道 까지 占領하였다. [2]

結果 編輯

1271年 陰曆 5月 몽골에 依해 鎭壓軍이 組織되어 左軍·中軍·友軍, 卽 세 方向으로 나눠서 珍島 를 攻擊해왔다. 三別抄는 珍島의 關門이었던 벽파진 에서 中軍을 막는 데 注力하였다. 그러나 三別抄가 中軍으로 들어오는 敵을 막는 데 注力하는 동안, 그 틈을 타서 鎭壓軍의 左軍과 友軍이 背後와 側面에서 奇襲 攻擊을 해왔고, 姓은 瞬息間에 무너졌다. 指揮者 裵仲孫 과 승화후 온은 殺害되고 混亂에 빠진 三別抄는 흩어져 各其 避身하였다.

살아남은 三別抄 兵士들은 金通精 의 指揮 아래 混亂을 收拾하고 濟州道 로 後退한다. 그 後 濟州島에 相當한 規模의 外城을 建立하는 等 旅夢 聯合軍에 抗拒하며 一進一退가 거듭되었다. 그러던 中 1273年 陰曆 4月 , 鎭壓軍 1萬餘 名이 濟州島에 上陸하고, 三別抄는 힘없이 무너졌다. 指揮者 金通精 은 山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서 4年에 걸친 三別抄의 抗戰은 幕을 내린다. [2]

日本과의 關係 編輯


(原文) 一 以前狀【文永五年】揚蒙古之德 今度狀【文永八年】韋?者無遠慮云云如何
一 文永五年狀書年號 今度不書年號事
一 以前狀歸蒙古之德成君臣之禮云云 今狀遷宅江華近四十年 被髮左?聖賢所惡 仍又遷都珍嶋事
一 今度狀端不從成戰之思也 奧爲蒙所使云云 前後相違如何
一 漂風人護送事
一 屯金海府之兵 先二十許人送日本國事
一 我本朝統合三韓事
一 安寧社稷 待天時事
一 請胡騎數萬兵事
一 達兇疏 許垂寬宥事
一 奉贄事
一 貴朝遣使問訊事

(解析)

  • 移轉【分에이(文永) 5年(1268年, 元宗 9年)】의 腸(狀)에서는 몽골의 德을 讚揚했는데, 이番 署長【分에이 8年(1271年, 元宗 11年)】의 署長에서는 '位取子(韋?者, 짐승 가죽 걸친 놈)들은 멀리 내다보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한다. 어찌된 일인가?
  • 分에이 5年의 署長에서는 몽골 年號를 썼는데 이番에는 쓰지 않은 일.
  • 全義 署長에서는 '몽골의 德에 歸附하여 君臣의 例를 이루었다' 하였는데, 이番에는 '江華로 遷都한 지 40餘 年'이나 되었다고 하고 '被髮左衽(被髮左?)은 聖賢이 꺼린 것'이라 하고 '또 震度(珍嶋)로 遷都했다'는 일.
  • 이番 署長 앞部分에서는 (몽골을) 따르지 않아 戰爭이 있게 된 까닭을 쓰고, 뒷部分에서는 '몽골이 考慮를 부렸다'고 하니 前後가 서로 다르다. 어찌된 일인가?
  • '風浪으로 漂流된 者들을 護送한다'고 한 일.
  • '김해부의 兵士 20餘 名을 먼저 日本국으로 보낸다'고 한 일. [3]
  • '우리 本朝(高麗)가 삼한을 統合했다'고 한 일.
  • '社稷을 안녕케 하면서 하늘의 때를 기다린다'고 한 일.
  • '數萬의 號機(胡騎)를 請한다' [4] 는 일.
  • '凶惡한 上訴가 到着하더라도 너그러이 容恕해 달라' 한 일.
  • '禮物을 드린다'고 한 일.
  • '귀조(日本)가 使臣을 보내 訪問하라' 한 일.
「考慮疊嶂不審曹操」 『韓國相對古文書資料集成』(이기백, 일지사, 1987),

日本의 도쿄大學 史料編纂所에 所藏되어 있는 《考慮疊嶂 不審曹操》(高麗牒?不審??)라는 題目의 文件은 當時 日本側이 考慮로부터 받은 文件 가운데 앞서 高麗로부터 傳해진 國書와는 內容이 다른 點에 對해서 메모해 둔 것인데, 日本 가마쿠라 時代 구게 (公家) 요시다 쓰네나가 (吉田?長, 1239~1309)의 日記인 《길속機》(吉續記)에는 分에이 (文永) 8年( 1271年 ) 9月 5日에 考慮로부터 첩腸이 傳해졌다 [5] 고 하는 記錄이 남아 있으며, 珍島가 陷落된 以後의 時點에서 日本에 傳達된 그 帖裝의 內容은 앞서의 國書에서 몽골의 威嚴과 德을 讚揚하고 있던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實際 高麗에서는 元宗 8年인 分에이 4年( 1267年 ) 쿠빌라이 칸의 要求에 따라 日本으로 하여금 몽골에 使臣을 派遣할 것을 勸하는 國書를 보낸 적이 있었다. 하지만 當時 日本은 高麗로부터 온 國書의 守令을 拒否했고, 結局 高麗 使臣들은 多子以後 에 머무르다 이듬해에 歸國하였다. 이때 보낸 文書의 內容이 日本 나라 동대사 (東大寺) 존僧院(尊勝院) 所長 文書 中 「조복이조원적初」(調伏異朝怨敵抄)에 筆寫되어 傳한다. 그 內容은 몽골 皇帝의 敎化가 미치지 않는 나라가 없다는 것을 天下에 알리려 하니 通好하길 勸誘한다는 것이었다.

分에이 4年에 考慮로부터 傳해졌던 帖裝과는 달리 分에이 8年(1271年) 日本側에 接受되었던 또 하나의 考慮疊嶂의 原本은 傳해지지 않지만, 大略的인 內容은 《考慮疊嶂 不審曹操》라는 文書를 통해 몽골의 德을 讚揚하던 以前의 高麗의 國書와는 正反對로 위取(韋?)니 被髮左衽(被髮左?)이니 하는 말로 몽골을 非難하며 또한 '震度'로 薦度하였음을 알리고 日本에 兵士를 請하는 內容이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分에이 8年(1271年) 9月 時點에서 이러한 內容의 國書를 日本에 보낼 勢力은 當時 進度를 據點으로 抗爭하던 三別抄 勢力임이 有力하다. 當時 三別抄는 珍島 政府가 高麗의 '正統' 政府임을 强調하며 同時에 몽골 侵略의 危機를 日本과 共同으로 打開해 나갈 것을 所望하는 期待를 가지고 있었다. [6] [7] 이때 考慮疊嶂을 가지고 日本으로 派遣되었던 珍島 三別抄의 使臣은 珍島 政府가 崩壞된 以後에도 한동안 外交的 活動을 展開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1271年 9月 19日에 日本에 왔던 元의 使臣 조양필 (趙良弼)과 關聯한 記錄에서 高麗담라(高麗聃羅) 卽 '耽羅'의 三別抄가 日本에 到着한 조양필의 射倖을 妨害하려 하였다는 記錄이나 [8] 度단공(徒單公) 리(履)가 찬하였다는 夕刻 飼料 《贊황복현機》에서 마찬가지로 조양필의 功績을 讚揚하는 가운데 "반炙 耽羅가 (조양필의) 길을 막았다."는 記錄에서 暗示된다.

其他 情報 編輯

歷代 指揮者 編輯

  • 裵仲孫 ?: (任期?: 1233年 ~ 1271年 )
    • 裵仲孫은 전 神義軍 의 우두머리로 三別抄에서도 指揮者를 맡아 三別抄를 總指揮했다. 以後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해 王族인 온王 을 推戴한다.
  • 온王 ?: (在位?: 1270年 ~ 1271年 )
    • 三別抄가 내세운 國王으로, 裵仲孫 에게 推戴 받아 王位에 올랐다. 蒙古에 抵抗하기 위해 江華島 의 本山을 珍島 로 옮기면서 많은 努力을 했고, 鎭壓軍을 番番이 敗退시키는 等 前績을 남겼으나 珍島 戰鬪로 長壽 裵仲孫이 戰場에서 죽으면서 逮捕되어 結局 처형당했다.
  • 金通精 ?: (任期?: 1271年 ~ 1273年 )
    • 珍島 戰鬪에서 살아 남은 軍士들을 總指揮했다. 耽羅 로 移動하여, 城을 쌓는 끈질김에 旅夢의 포기가 다가오고 三別抄의 勝利가 코앞으로 다가왔으나 元나라 의 日本 征伐 政策으로 인해 元 世祖 는 耽羅를 차지하려 했다. 그리하여 1萬 兵力의 鎭壓軍이 쳐들어와 結局 三別抄의 抗戰은 幕을 내린다.

高麗 軍隊 系譜 編輯

같이 보기 編輯

各州 編輯

  1. 사라진 三別抄, 오키나와 건너가 류큐王國 세웠나?
  2. 박남일 自由寄稿家 (2008年 2月 13日). “文身政權에 맞서다 護國抗爭의 化身이 되다” . 朝鮮日報 . 2008年 12月 11日에 確認함 .  
  3. 김해부 屯兵 20名의 實體에 對해 이시이 마사토시(石井政敏)는 몽골에서 日本으로 가는 조양필 一行의 情報를 傳하기 위해 日本에 보내어진 病死로 解釋한 바 있는데(「분에이 8年에 日本에 왔던 高麗 使臣에 對하여―삼별초의 日本通交飼料의 紹介―」(文永八年?日の高麗使について―三別抄の日本通交史料の紹介―) 《도쿄대학飼料編纂所步》(東京大學史料編纂所報) 12, 1978, 5쪽). 김윤곤은 當時의 前後 狀況과 맞지 않은 解釋이라고 指摘하였다(김윤곤, 「三別抄의 對蒙抗戰과 地方郡縣民」《韓國 中世의 歷史上》 (慶山: 영남대학교出版部, 2001), 326~329쪽). 류영철은 이들을 앞서 金海에 쳐들어왔다가 三別抄에 抑留되었던 倭寇로 理解하였다(류영철 「考慮疊嶂不審曹操의 再檢討」《韓國中世史硏究》1, 1994, 169~170쪽)
  4. 류영철은 '數萬'이라는 兵力 規模의 漠然性, 또 兵力을 要請하면서 相對의 軍隊를 오랑캐를 指稱하는 用語인 '胡騎'로 明示한 點을 들어 三別抄 政府가 要請했을 可能性을 排除하였는데(같은 論文, 1994, 171쪽). 이에 對해 배상현은 본 文書가 基本的으로 高麗側에서 보낸 '帖裝'에 對한 當時 日本側의 理解를 反映한 內容이라는 點을 念頭에 둘 必要가 있음을 指摘하며 '胡騎'에서 '胡'가 '間隙'(戈戟)을 의미하기도 하는 만큼 '잘 武裝된 起兵'을 要請한 대목으로도 理解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배상현 「三別抄의 南海 抗爭」《歷史와 警戒》57, 2005, 105쪽).
  5. "伴牒狀趣, 蒙古兵可來責日本, 又乞?, 此外乞救兵歟, 就狀了見區分." 《길속機》分에이 8年 9月 5日條; 장동익 《日本 고중세 高麗資料 硏究》 서울대출판부, 139쪽.
  6. 이시이 마사토시(石井政敏), 같은 論文, 1978; 류영철, 같은 論文, 1994; 윤용혁 「三別抄와 餘日關係」《몽골의 高麗 ·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東北亞歷史財團 便, 京仁文化史, 2009 및 같은 사람 《三別抄》 圖書出版 慧眼, 2014, 188~189쪽.
  7. 윤용혁은 三別抄의 對日疊嶂은 日本과의 連帶에 依한 大夢 共同 對抗이 一次的인 目標였지만, 다른 한便으로는 三別抄가 濟州島 以外의 日本 列島의 有用性에 對해서도 關心을 가지고 있었고 危機時 背後 避亂地를 確保한다는 意圖도 包含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윤용혁, 같은 冊, 圖書出版 慧眼, 2014, 189쪽).
  8. "旣至, 宋人高麗聃羅, 共沮?其事"(《元朝名臣事略》「野齋李公撰墓碑」) 야마모토 미쓰오(山本光朗) 『元使趙良弼について』《史流》 40?, 北海道?育大? 史學會, 2001年, 31쪽 參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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