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寫眞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寫眞

빛 感應 表面에 떨어지는 빛에 依해 生成되는 이미지

物理學 敵으로 寫眞 (寫? 또는 光畵, Photograph)은 物體에서 反射 과 같은 電磁氣 敵 發狂을 感光性 記錄材料 위에 記錄하여 얻은 빛 그림, 卽 狂火傷을 말한다. 寫眞은 普通 寫眞機 로 만들어지는데, 寫眞機 는 빛을 모아 寫眞 필름 이나 CCD 또는 CMOS 와 같은 이미지 센서 에 焦點을 맞추어 賞을 맺히게 한다. 그리스어의 'photos'(빛)와 'graphien'(그리다)에서 由來한 말로, 1839年 존 F.W. 허셜 驚異 처음 使用하였다.

니에프스 가 찍은 世界 最初의 寫眞으로 推定되는 寫眞. 撮影하는 데 8時間이 걸렸다.

韓國語 에서 '寫眞'의 뜻은 아래와 같다.

  1. 寫眞機 로 對象의 映像 을 印畫紙에 찍어 내는 技術 .
  2. 印畫紙 에 찍힌 被寫體의 映像.
  3. 이러한 技術을 道具로 使用하는 藝術 의 한 分野 等의 뜻을 가진다.

또한 韓國語에서는 寫眞을 찍는 일을 職業으로 하는 사람은 寫眞師 , 藝術 活動으로서 寫眞을 찍는 사람을 寫眞作家 , 寫眞에 對한 專門 知識과 技術을 갖춘 사람을 寫眞家 로 分類하기도 한다.

歷史 編輯

起源 編輯

寫眞은 포토그라피라는 그리스 語에서 起源되었다. 寫眞이 發明되기 以前에도 빛을 平面에 投影하려는 試圖는 이미 進行되고 있었다. 16世紀 무렵 畫家들은 보다 事實的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라는 裝置를 利用했다. 라틴語로 어두운 房이라는 意味인 카메라 옵스큐라는 어두운 房의 한쪽 壁에 작은 구멍을 뚫어 그 反對便 壁에 外部 情景의 易象(逆像)李 맺히게 하는 裝置였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오늘날 우리가 使用하는 카메라의 原形이지만 아직 빛을 物體에 定着시키는 機能이 없었다. 이는 當時에 繪畫의 補助的인 手段으로 活潑하게 使用되었는데 初期에는 只今의 핀홀카메라처럼 렌즈가 없는 形態였다가 나중에는 보다 鮮明한 畫質을 얻기 위해 렌즈를 附着하는 形態로 發展했다. 이처럼 빛을 통해 賞을 맺히게 하여 肖像畫를 그리는 것을 실루엣 肖像技法(profilograph)라고 부른다.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는 프리즘을 使用하여 그리는 對象과 現在 自身이 그리는 것을 同時에 보게 하여 그림을 그릴 때 도움이 되었다.

富裕한 平民들이 늘어남에 따라 繪畫의 需要는 늘어났지만 實力있는 畫家들은 많지 않았다. 이 狀況에 自然科學의 進步가 겹쳐, 맺혀있는 像들을 永久的으로 고착시키는 法을 찾고자 했다. 獨逸人 하인리히 슐츠(Heinrich Schultz)에 依해서 빛의 露出에 따라 窒酸銀의 色깔이 變하는 化學的 反應이 發見되었고 英國人 토마스 웨지우드(Thomas Wedgewood)는 이런 發見을 土臺로 빛을 物體에 정착시킬 수 있는 可能性을 實驗했다. 그리고 窒酸銀 溶液에 담근 종이나 가죽을 카메라 옵스큐라에 裝着하여 賞을 物體에 一時的으로 固定시키는 것에 成功했지만 끝내 賞을 永久的으로 定着시키는 方法을 찾지 못해 結局 成功直前에 막히고 만다. 웨지우드는 實驗들을 통해 카메라 開發의 原則을 세우게 된다.

最初의 寫眞 編輯

카메라 옵스큐라에 投影된 映像을 感光板으로 捕捉해 永久的으로 賞을 物體에 定着시킨 最初의 사람은 프랑스의 조세프 니細胞르 니에프스 (Joseph Nicephore Niepce)였다. 니에프스는 유태의 非투먼(bituman, 瀝靑)이라는 天然 아스팔트가 빛의 露出에 따라 굳는 性質을 利用해서 8時間의 오랜 露出 끝에 1826年 < 그라의 窓門에서 바라본 眺望 >이라는 人類 最初의 寫眞을 탄생시킨다. 그는 이것을 헬리오그래피(heliography)라고 하였는데 헬리오그래피는 太陽光線으로 그리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露出 時間이 너무 길기 때문에 鑛員이 移動하게 되었고, 商業化는 되지 않았다.

寫眞術 硏究에 큰 關心이 있던 프랑스人 루이 쟈크 網데 다게르(Louis Jacques Mande Daguerre)는 니에프스의 成果를 더욱 발전시켜 銀鍍金 銅板과 요오드를 利用해 1837年 다게레오타입 (Daguerreotype) 卽, 다게르의 銀板 寫眞術을 完成하는데 成功한다. 다게레오타입은 事實上 人類 最初의 카메라라고 할 수 있으며 比較的 짧은 露出時間과 鮮明한 結果物을 基盤으로 商業化에 成功해 旋風的인 人氣를 끌었다. 比較的 짧다고 하지만 如前히 사람을 찍기에는 길었고, 때문에 建築物을 主로 撮影했다. 카메라와 現象 裝備가 비싸기도 했고, 같은 寫眞을 複寫할 수 없다는 短點이 있었다. 따라서 寫眞을 그림으로 複製한 뒤, 畫家가 사람이나 馬車와 같은 것들을 그려넣고 彩色을 하는 境遇도 있었다. 1840年, 다게르는 새로운 카메라를 開發하였는데, 20倍 밝은 改良 렌즈와 感光板 鍍金을 통해 鮮明한 明暗을 表現했으며, 露出時間이 1分 程度로 縮小되었다.

1841年 英國의 윌리엄 헨리 폭스 탈보트(William Henry Fox Talbot)는 金屬을 原版 材料로 하는 旣存의 方式과는 다른 종이 印畫法人 칼로타입 (calotype)을 發表했는데 이는 音畫 狀態로 感光板에 映像을 捕捉해 여기서 陽畫를 만들어내는 方法으로서 이를 통해 大量의 複製를 可能케 했다. 하나의 陰畫에서 수많은 陽畫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오늘날 寫眞術의 槪念은 脫보트에서 始作했다고 볼 수 있다. 칼로타입은 부드러우면서 鮮明하게 表現되었는데 이는 宥和的인 便安함을 주었다. 때문에 다게레오타입은 記錄을, 칼로타입은 藝術을 위한 것이라는 評價를 받았다.

카메라와 寫眞의 普及 編輯

以後 本格的으로 카메라와 寫眞이 普及되기 始作하면서 이에 關한 硏究와 成果들이 持續되었다. 寫眞의 原版(plate) 같은 境遇에는 1851年 英國人 스코트 아처의 콜로디온 濕板의 發明, 1871年 매독스의 젤라틴 乾板의 發明으로 이어졌다. 1889年에는 이스트먼 코닥사에서 셀룰로이드를 두루마리처럼 말아서 製造한 롤필름(roll film)을 生産해서 販賣하기 始作했다. 當時 코닥사는 "You press the button, we do the rest."라는 廣告를 앞세우며 市場에 進入했다. 사람들은 이제 寫眞만 찍으면 되고 現象은 코닥사에 맡기면 되었다. 이렇게 寫眞 現象까지 代身 해주는 企業이 登場하면서 寫眞 現象을 위한 複雜한 道具를 個人이 가질 必要가 없게 되었고 누구나 쉽게 寫眞 撮影이 可能한 時代가 되었다. [1] 그리고 1925年 작고 가벼운 라이카 카메라의 登場으로 카메라의 携帶性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이로서 寫眞은 이제 專門家뿐만이 아니라 一般人도 쉽게 찍을 수 있는 것이 되었고, 固定된 場所가 아니라 다양한 場所에서 자유롭게 撮影할 수 있게 되었다. 當時 이러한 技術的인 發展 德分에 스냅寫眞이 流行하기 始作했는데 이 當時 代表的인 寫眞 作品으로는 앙리 브레송의 <決定的 瞬間>이 있다. 20世紀 以後에는 컬러 필름이 登場했고 카메라는 自動 焦點 機能과 自動 露出 機能 等과 같은 技術的 發展을 거듭해 왔다. 20世紀 後半에 들어와서는 빛을 이미지 센서로 받아들여 디지털 情報로 記錄하는 디지털 카메라가 登場하면서 21世紀에 들어 필름 카메라의 時代가 저물고 寫眞과 카메라는 사람들에게 더욱 日常化되어 가고 있다. 韓國에서는 1970年代 後半 頃부터 컬러 寫眞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가 생겼다.

같이 보기 編輯

各州 編輯

  1. 한승희 (2016). 《寫眞測量 및 遠隔探測槪論》. 구미서館. 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