當時 日本軍은 명나라군에게
平壤
이 陷落되고 장수인
오토모 요시무네
(大友義統)가 戰線에서 無斷離脫하는 等 一時的 混亂 狀態에 있었다.
奉行
(奉行)인
이시다 미쓰나리
(石田三成)가 北部 各地에 흩어져 있던 將帥들을
漢城
(漢城)(現在의
서울
)로 모아 電力을 다시 세우고 總力을 기울여 碧蹄館에서 反擊을 試圖하였다.
各 國의 記錄
編輯
懲毖錄의 記錄에는 '李如松이
坡州
에 進軍하여 敵軍과 碧蹄館 南쪽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開城
으로 돌아와서 陣을 쳤다. 처음에 平壤이 收復되니 大同江 以南의 鳶도(沿道)에 있던 敵들은 모두 도망쳐 가버렸다. 提督은 敵軍을 追擊하고자 하여 나에게 말하기를 “大軍이 只今 앞으로 進擊하려 하는데, 듣건대 앞길에 軍糧과 마초가 없다고 하니 議政(류성룡)은 代身으로서 마땅히 나라 일을 생각해야 될 것이므로 수고를 꺼리지 마라고 急히 가서 軍糧을 準備하여 疏忽해서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라고 하였다.'라는 式으로 記錄이 되었다.
日本 側에서는 名君을 맞아 籠城波와 邀擊派가 對立하다 明軍이 陣容을 갖추기 前에 攻擊 할 수 밖에 없다는 意見이 大勢를 차지했기 때문에 邀擊 作戰을 展開하였고 名君의 大砲 攻擊에 苦戰하였으나 白兵戰에서 日本刀를 든 日本軍의 優勢가 持續되어 李如松이 撤收를 指示, 그 後로 追擊을 하자는 쪽과 追擊을 하지 말자는 쪽으로 나뉘어 對立하다 名君을 놓쳐 버리고 平壤, 開城을 빼앗기기는 했지만 明나라 援軍의 南下를 막아 勝利의 意味가 있다고 記錄했다.
世間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꽤 熾烈한 戰鬪를 벌였으며 戰術的으로 優位를 占하지 않았으면 完敗할 뻔했다는 表現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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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朝?·???系史 author:?昭全 pp.4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