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伯爵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伯爵

貴族의 爵位 中 하나로 五等爵 中 3位의 爵位

伯爵 (伯爵, 女性型: 伯爵夫人 (伯爵夫人), 餘伯爵 (女伯爵), 獨逸語 : Graf/Grafin 그라프/그레핀 [ * ] , 英語 : Count/Countess 카운트/카운티스 [ * ] , 프랑스語 : Comte/Comtesse 콩트/콩테스 [ * ] )은 東洋에서는 貴族 의 5階級 中 侯爵 다음가는 作爲 이다. 下位에는 自作 이 있다. 西洋에서는 侯爵 아래에 該當하는 作爲이다. 獨逸의 貴族 管制 中 侯爵과 같은 級인 方伯(Landgraf, Markgraf)이나 특수한 形態였던 帝國 伯爵(Reichsgraf)과 混同하면 안된다. 伯爵이 支配하는 領域은 伯爵領 (伯爵領), 伯爵이 支配하는 國家는 白菊 (伯國)이라고 부른다.

伯爵의 管

東洋 編輯

韓國 編輯

韓國에 伯爵 階級이 導入된 것은 高麗時代 때에 5等作이 始初이다. 高麗에서는 天子(賃金)의 여러 아들 에게 後(侯)가 初俸 되었고, 駙馬(사위)에게는 백(伯)을 봉하였다. 宗室의 封爵과 달리 異姓諸君에게는 地域名等과 함께 主로 縣伯(縣伯)에 봉했으며 윤관이 永平縣蓋國白(鈴平縣開國伯)에 封爵된 것이 그 例이다. 그 後, 忠烈王 때 元의 干涉으로 一時 廢止되었다가, 恭愍王 때 復活하였으며 恭讓王 때 심덕부 가 청성군忠義백(靑城郡忠義伯)에 封爵되는 等 高麗가 亡할 때까지 持續되었다. 朝鮮이 開國된 以後에도 當分間 쓰여 정도전 이 鳳畫伯(奉化伯), 조준이 平壤백(平壤伯), 이지란 이 淸海백(靑海伯), 심덕부 가 淸聲백(靑城伯)에 봉해지는 等 鄭1品 功臣들이 伯爵에 封爵되었으나, 朝鮮 太宗 때 廢止되어 사라졌다.

日帝가 韓日合倂 에 功이 컸던 이들 및 區大韓帝國 管理 들에게 내렸던 것에서 韓國에 再導入되었다. 參考로 日帝가 朝鮮人에게 授與한 朝鮮貴族 中에는 乙巳五賊 이던 이완용 이지용 이 이 職位를 받았으며 같이 伯爵 爵位를 받은 민영린 은 1919年에 阿片 吸入罪로 職位를 박탈당했다. [1]

日本 編輯

日本에서는 華族 制度 中 工作 , 侯爵 의 뒤를 잇는 第3等位 階級이다. 作爲 授與 基準은 교토 朝廷의 代身가(大臣家)와 一部 黨商家(堂上家), 孤山쿄 , 5萬石 以上의 다이묘, 쓰시마후추 番 邵氏 , 니시혼간지, 히가시혼간지의 世襲 주지, 其他 國家에 勳功 있는 者이며 다른 作爲들과 마찬가지로 太平洋 戰爭에서 日本이 敗한 後 實施된 美軍政에 依해 1947年에 廢止된다.

中國 編輯

中國에서는 春秋時代 以前부터 存在한 階級으로 千乘之國 一千個의 電車를 保有한 나라인 臺 諸侯國으로 그規模가 戰車 1000餘臺를 保有할 程度이기에 黃河가 流域에 백國들이 位置하고 있었다. 本來 春秋時代가 일어나기전 卿大夫들의 基本作爲 程度에 該當하는 水準이었지만 春秋時代가 일어날 무렵 會盟을 함에 있어서 主導權을 쥘 수 있는 强力한 名分이 될 수있던 勢力들이었다. 周나라가 세워질 무렵 主로 王族들이 分封받은 作爲였다.

西洋 編輯

西洋에서 貴族 稱號 가운데 하나로, 近代에는 侯爵이나 公爵보다 한 等級 낮은 作爲이다. 오래된 起源은 프랑크의 地方官 兼 判事였지만 그 語源은 로마 帝國 의 皇帝들의 側近에서 모시는 家臣인 코메스에서 由來되었다. 官職의 性向을 띠고 있었지만 漸次 封建體制에 徐徐히 받아들여져 一部는 公爵에게 從屬되었지만, 플랑드르·툴루즈·바르셀로나 같은 一部 伯爵領은 공작령만큼 넓었다. 以後 中央集權化韓 近代的 類型의 國家 形成으로 이어졌고, 伯爵의 政治 權力 喪失을 의미했다. 總理나 長官과 같은 公的이 뚜렷한 自家, 伯爵 位階에 봉해진다.

英國 編輯

프랑스 編輯

프랑스에서 콩트라 불린 伯爵의 地位는 적어도 900年까지 工作의 봉신이였다. 그러나 封建化 過程이 進展됨에 따라 官職의 性格은 사라졌고 漸次 작은 땅의 世襲領主가 되는 傾向을 보였다. 이미 11世紀에는 이런 傾向이 나타났고 그와 더불어 伯爵이라는 稱號를 別 制限 없이 使用하는 慣例가 생겨났다. 또한 12世紀에 이르러 中間 程度의 地位를 가진 榮州라면 누구나 플랑드르 툴루즈 처럼 넓은 封土를 가진 영주와 마찬가지로 伯爵을 自處할 수 있었다. 以後 王國의 體系가 좀더 安定된 13世紀에도 이 稱號는 相當한 重要性을 가질 수도, 別로 意味가 없는 境遇도 생겨나기 始作되었다. 또한 王의 이름으로 裁判權을 行使하는 大法官 制度가 定立되었으며 이것은 伯爵의 立法權과 司法權 및 私的인 戰爭을 制限하는 데 이바지했다. 以後 16世紀에 獨自的으로 貨幣를 鑄造하는 權限까지 박탈당했으며 넓은 封土는 차츰 프랑스 王權 아래로 再統合되어 그저 다양한 特權을 維持하는 存在가 되었다. 프랑스 第1制定과 그 뒤를 이은 君主政 및 帝國時代에는 伯爵의 地位가 領土의 意味를 全혀 갖지 않았고 長子相續에 따라 代代로 물려줄 수 있는 世襲爵位가 되었다.

獨逸과 오스트리아 編輯

獨逸에서 그라프라 불린 伯爵이라는 稱號는 10世紀頃부터 大部分 世襲爵位가 되었지만 이는 獨逸의 伯爵이 프랑스의 伯爵보다 더 오랫동안 官職의 性格을 維持했다. 以後 2世紀가 지난 12世紀에 神聖 로마 帝國 皇帝 였던 프리드리히 1歲 는 伯爵에게 그들이 다스리는 地域에서 治安維持權을 附與했으며 이 權限은 1100年까지 公爵에게 屬해 있었다. 그 後 伯爵領이라는 用語는 伯爵이 生死 與奪權을 갖고 있는 地域을 의미하게 되었다. 12世紀初부터 獨逸 西部에서는 公式 地位와는 全혀 關係없이 但只 그들이 갖고 있는 性에서 伯爵이라는 稱號를 使用하는 伯爵이 많이 나타났다. 이미 프리드리히 1世 時代에는 '保護管'(Vogte) 같은 上流層의 一部 自由人들이 伯爵을 自處하기 始作했다. 13, 14世紀에는 工作한테서 封土로 下賜받은 새로운 伯爵領이 생겨나 事實上 伯爵의 權威가 公爵에게 從屬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神聖 로마 帝國 안에서는 一般伯爵과 帝國伯爵을 차츰 區別하기 始作했다. 帝國伯爵은 帝國議會를 構成하는 한 要素인 伯爵團(Grafenkollegium)의 一員으로 分類되었다. 이들은 皇帝의 直接的인 봉신으로 一般的으로 反耕百에 비해 작은 領地를 所有하고 있었다. 1806年에 神聖 로마 帝國이 解體된 뒤 이들 帝國伯爵의 地位도 한 段階 낮아졌다. 다시 말해서 그때까지는 皇帝 한 사람만의 直屬 臣下였던 帝國伯爵이 獨逸 여러 國家의 君主들에게 從屬된 地位로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러나 聯邦議會는 1829年 '閣下'(Erlaucht)라는 特別尊稱을 쓸 수 있는 帝國伯爵의 權利를 認定했다.

헝가리 編輯

이탈리아 編輯

이탈리아에서는 카롤링거 王朝의 權威가 衰退하면서 都市에 바탕을 둔 伯爵領 制度가 생겨났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伯爵은 公爵에게 從屬되지 않았던 듯 하다. 어쨌든 工作이라는 稱號는 적어도 이탈리아 北部에서는 드물었다. 베네치아와 피렌체같은 自治都市가 成長하자 伯爵領은 그때까지 갖고 있던 重要性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敎皇과 이탈리아 半島의 君主들은 르네상스에서 近代에 접어든 뒤에도 伯爵이라는 稱號를 特權의 標示로 자주 附與했다.

스페인 編輯

스페인의 아스투리아스-레온 王國에서는 서고트족의 影響으로, 카탈루냐와 피레네 山脈 바로 南쪽에 있는 地方에서는 프랑크 王國의 影響으로 伯爵領이 發達했다. 바르셀로나 伯爵들은 카탈루냐 伯爵領을 統合해, 적어도 프랑스의 플랑드르나 툴루즈 伯爵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事實상의 君主가 되었다. 또한 카롤링거 王朝의 아라곤 伯爵領은 아라곤 王國의 核心이었다. 反面에 카스티야 王國의 母胎가 된 카스티야 伯爵領은 元來 아스투리아스-레온 王國의 變更 地方이었다. 아스투리아스-레온 王國의 伯爵들은 11世紀末까지만 해도 王이 任命한 地方 行政館으로서 官職의 性格을 維持했지만, 그 後에는 여러 種類의 世襲 永住權을 갖는 것이 오히려 支配的인 原則으로 바뀌기 始作했다. 르네상스 時代와 그 以後의 스페인 君主國에서는 伯爵이라는 稱號가 좀처럼 내려지지 않았다.

포르투갈 編輯

폴란드와 러시아 編輯

러시아에서는 표트르 大帝 時代에 이르러서 유럽化 過程에서 처음으로 伯爵 稱號가 導入되었고 大槪는 政府에서 일정한 地位에 오른 官吏들에게 이 稱號가 주어졌다. 폴란드에는 元來 伯爵이 없었지만 18世紀末 領土가 分割된 뒤 러시아人·오스트리아人·프로이센人 들이 伯爵 稱號를 導入했다.

各州 編輯

  1. 李完用은 1919年에 侯爵으로 進級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