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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동수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백동수

朝鮮 後期의 無道人 (1743?1816)

백동수 (白東脩, 1743年 ~ 1816年 )은 朝鮮 後期의 武臣으로 이덕무 , 박제가 와 함께 《 武藝圖譜通志 》의 編纂에 參與하였다. 本貫은 水原, 휘는 同數(東脩), 字는 영숙(永叔), 號는 野腦(野?), 人材(靭齋)이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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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동수는 辛壬士禍 에 連累되어 죽은 충장공 백시구 (白時耉)의 曾孫이며, 백상화 (白尙華)의 孫子다. 아버지는 折衝將軍(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行龍?衛副護軍) 白蛇굉 (白師宏)이다. 李德懋의 妻男이기도 하다. 祖父인 백상화가 庶子였기에 身分上 庶孼에 屬하였다.

1743年 에 태어난 백동수는 ‘劍仙(劍仙)’이라 불리던, 金體件 의 아들 김광택 에게 朝鮮劍法을 傳受받는 한便, 道家的 傳統 丹學으로 內功을 쌓고 萬若의 負傷에 對備해 醫術까지 익혔다. 이처럼 그는 靑年時節에는 學問을 멀리하고 武俠의 世界에 깊이 빠져들어 周圍의 憂慮를 사기도 했다. 多幸히도 그의 周圍에는 燕巖 朴趾源 , 이덕무 같은 좋은 親舊들이 있었다.

1771年 (英祖 47) 辛卯(辛卯) 式年試(式年試) 甁과(丙科) 武科에 及第하여 宣傳官에 除授되었으나 庶孼이라는 身分上의 限界와 肅宗代 以後부터 至毒하게 퍼진 灣과(萬科)로 인해 官職 數가 턱없이 不足해 벼슬을 얻지 못하였다. 1773年 가난을 理由로 食率들과 함께 未練 없이 漢城을 떠나 江原道 麒麟協으로 들어가 直接 農事를 짓고 牧畜을 하면서 歲月을 보냈다.

이렇게 10 餘年間 落魄 時節을 보내다가 1776年 (正祖 卽位年) 正祖 가 親衛軍影印 壯勇營 을 組織하면서 庶孼 武士들을 登用할 때 槍劍의 一人者로 推薦받았고, [1] 1787年 (正祖 11) 集春營(集春營) 哨官(哨官)을 거쳐 1788年 (正祖 12) 御營廳 哨官(哨官)을 歷任하였다.

1789年 (正祖 13) 噴水文章(分守門將)에 祭需되고, 壯勇營 哨灌(哨官)을 지내고, 이해 4月 새로운 武藝書를 編纂하라는 正祖의 命에 따라 檢書官(檢書官)이었던 이덕무, 박제가 와 함께 武藝圖譜通志 의 編纂에 參與하였다.

1790年 (正祖 14) 副司直(副司直)에 端部되고, 理解 6月 3日 訓鍊主婦(訓鍊主簿)에 除授되었다. 1791年 (正祖 15) 訓鍊判官(訓鍊判官)에 祭需되고, 1792年 (正祖 16) 忠淸道 비인현감(庇仁縣監)을 歷任하였다. 1795年 (正祖 19) 혜경궁 洪氏 還甲 誕辰(誕辰) 進饌(進饌) 때 壯勇營 哨官에서 訓鍊僉正(訓鍊僉正)으로 假說(加設)되었다. 1796年 (正祖 20) 長興庫主婦(長興庫主簿)를 거쳐 1802年 (純祖 2) 平安道 博川郡守(博川郡守)에 祭需되고, 把摠(把摠)을 兼(兼)하였다.

1806年 (純祖 6) 領議政 이병모 가 官署의 貪汚(貪汚) 함을 아뢰길, "法을 歪曲하지 않고 賂物을 받았다는 것으로 論하여 罪를 1千里 類型(流刑)에 그치었으나 原紙 정배(遠地定配)韓 다음, 이어서 禁錮(禁錮)의 銓衡을 實施하소서."라고 請하자 順調 가 말하기를, “해부(該府)에서 이미 道界를 보고 그 罪狀을 알고 있으니 이같이 擬律(擬律)하는 것이 어떻겠는가?”하고, 그대로 따라 慶尙道 단성현(慶尙道 丹城縣)에 정배(定配)되었다.

다시 敍用되어 1810年 (純祖 10) 軍紀否定(軍器副正)에 祭需되고, 1816年 享年 74歲로 殞命하였다.

家族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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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曾祖父?: 백시구 (白時耉, 1649~1722), 平安兵士 症戶曹判書

人物 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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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德懋는 《靑莊館全書》에서 "백동수는 딴 世上을 노니는 사람 같았다."고 評했다. 中年에는 學問에 뜻을 두어 朴智元 , 성대중 같은 大學者들로부터 ‘無(武)로써 文(文)을 일궜다’는 評價를 받았다.

백동수를 演技한 俳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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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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映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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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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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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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94336
  2. 5살 年上, 50代 나이로 일찍 世上을 떠남

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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