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 時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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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고등학교
1學年 때 이미 最高 拘束 147km/h의 공을 던졌지만 3學年 때 오른쪽 어깨 負傷으로 제대로 投球하지 못했다. 言論에서는
三星 라이온즈
가
2000年 新人 드래프트
에서 當時
大邱商高
의 優勝을 이끈 投手
장준관
을 指名할 것이라는 豫測이 支配的이었으나 豫想을 깨고 그를 1次 指名했다.
1999年
11月 팀 高卒 新人 歷代 最高 契約金인 2億 5,000萬원에 入團했는데
장준관
은 契約金을 올리기 위해 美國行을 推進했다.
[2]
2年次에 13勝(10先發勝)을 거두며 마운드의 한 軸을 擔當했다.
6勝으로 주춤했으나 韓國시리즈에서 優勝했다.
13勝을 거두며 좋은 活躍을 펼쳤다.
17勝(16先發勝) 2敗, 2點臺 平均自責點으로 多勝 및 勝率 1位를 記錄하며 選拔 投手로는 14年 만에 正規 시즌 MVP로 選定됐다.
[3]
當時 팀 打率 1位였던
현대 유니콘스
와의 韓國시리즈 4次戰에서 10이닝 노히트 노런을 記錄했지만 打線이 無得點에 그쳤고, 延長 11回에
權五俊
으로 交替돼 公式 記錄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4]
開幕展에서
롯데 자이언츠
를 相對로 無事사구 완봉승을 거두며 快調의 스타트로 前半期에 좋은 成跡을 記錄했으나
[5]
7月에 왼쪽 발목을 다친 以後로 下落勢를 보이며 前年度보다 안 좋은 成績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러나 3年 連續 두 자릿數 勝 以上을 記錄했고, 147脫三振으로 最多 脫三振을 記錄했다. 中間과 마무리를 오가며 팀의 正規 시즌 1位 登極에 寄與했다. 韓國시리즈 2次戰에서는 6.1이닝 無失點으로 勝利의 밑거름을 만들었다.
唯獨 不足한 打線 支援과 불펜陣 亂調로 因해 8勝(7先發勝) 9敗에 그쳤지만 2點臺 平均自責點으로 2000年代 規定 이닝을 채운 投手들 中 唯一하게 3年 連續 2點臺 防禦率을 達成했다. 韓國시리즈에서는 팔꿈치 負傷을 안고도 選拔과 械鬪를 오가며 2勝, 1세이브, 1홀드를 記錄했다. 韓國시리즈에서 當時 監督이었던
선동열
의 勸誘로 데포메드롤
[6]
이라는 剛한 鎭痛劑를 맞으며 競技를 했다. 狀態가 안 좋았으나 151km/h의 直球를 던졌다. 팀을 優勝으로 이끌만큼 대단한 活躍을 펼쳤으나 鎭痛劑를 多量으로 服用해 그의 팔꿈치는 滿身瘡痍가 됐다. 시즌 後 11月에 手術을 위해 美國으로 떠났고,
2007年
1月 27日
LA 컬란조브 外科 病院에서 오른쪽 팔꿈치 靭帶 接合 手術(토미 존 서저리)을 받았다.
[7]
[8]
[9]
[10]
팔꿈치 手術로 인한 再活 訓鍊으로 因해
2007年
에는 單 1競技에도 出戰하지 못했다. 팔꿈치 手術 前 直球 最高 球速은
8月 2日
SK 와이번스
戰에서 記錄한 155km/h이고 슬라이더는 144km/h였다. 手術 前 正規 시즌 直購 平均 球速이 145km/h였다.
팔꿈치 靭帶 接合 手術 以後 그의 球威는 좋지 않았으나 토미 존 서저리 手術 以後 回復 速度는 다른 選手들보다 相對的으로 빨랐고 再活 1年만에 마운드에 復歸했다.
示範 競技에서는 最高 拘束 146km/h까지 던졌지만 시즌이 갈수록 直球의 球威는 回復되지 않았고, 시즌 中盤期 最高 球速은 138km/h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올림픽 브레이크 以後 週 武器인 슬라이더와 變化球로 맞춰 잡는 피칭으로 最上의 컨디션을 記錄했다. 그러면서 自然스럽게 直購 平均 拘束 138~140km/h를 回復했고 最高 球速은 145km/h를 記錄했다. 復歸 後 첫 시즌에 9勝을 達成해 토미 존 手術 1年次로 믿기지 않는 回復 速度를 보였다.
[11]
專門家와 野球 팬들의 豫想 및 期待와는 달리 1勝(先發) 12敗로 最惡의 成績을 記錄했다. 너무 빠른 復歸로 인해 手術 部位에 無理가 갔고, 球速은 140km/h도 안 나오는 便이었다.
FA 資格을 얻어 日本 프로 野球 進出을 試圖했다.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와 2年間 最大 1億 7,000萬엔(23億원)에 入團할 豫定이었다. 入團 테스트까지 成功的이었지만 메디컬 테스트 結果 肝 數値 問題로 不適格 判定을 받아 契約이 霧散됐다. 以後 2年間 契約金 6億, 年俸 2億, 옵션 3億에 契約하며 國內에 殘留했다. 시즌 成跡은 6勝(5先發) 8敗에 그쳤으나
두산 베어스
와의 플레이오프 4次戰에서 1.1이닝 無被安打, 無失點으로 1點差 세이브를 記錄하며 勝利를 이끌었다.
시즌 初盤에 좋은 成跡을 거뒀지만 시즌이 갈수록 球威가 低下돼 6勝 8敗의 低調한 成績으로 시즌을 마쳤다.
지난 3시즌 間 不振했던 그는
미치 탤벗
,
브라이언 고든
이 先發 投手로 迎入돼 立地가 흔들렸다. 그러나 抛棄하지 않으며 스프링 캠프 때 日本에 다른 選手들보다 더 오래 남아 訓鍊하며 시즌을 對備했고 示範 競技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며 5先發로 落點됐다.
4月 14日
첫 先發 登板 競技였던
넥센 히어로즈
戰에서 7이닝 1失點으로 勝利 投手가 됐고,
8月 19日
두산 베어스
를 相對로 勝利하며 시즌 첫 番째 前 球團 相對 勝利 投手가 됐다. 또한
8月 26日
LG 트윈스
戰에서 歷代 25番째 네 자릿數 탈삼진을 記錄했으며, 이날 7이닝 無失點으로 勝利 投手가 되며 歷代 23番째 세 자릿數 勝을 達成했다. 그리고 12年만의 두 자릿數 勝을 記錄했다.
9月 26日
KIA 타이거즈
戰에서 自身의 最多 投球數인 140具를 던지며 9이닝 6脫三振, 3失點으로 力投했으나 相對 投手였던
윤석민
의 完封으로 因해 敗戰 投手가 됐다. 特有의 맞춰 잡는 피칭과 危機 管理 能力으로 2番의 完投를 하는 等 긴 이닝을 消化했다. 마지막 登板 競技인
10月 2日
LG 트윈스
奠을 8이닝을 無失點으로 막으며 시즌 12勝을 거두며 시즌을 마무리했다. 緩急 調節과 뛰어난 制球力을 바탕으로 한 投球로 12勝 8敗, 3點臺 平均自責點을 記錄했고 手術 以後 첫 3點臺 平均自責點과 두 자릿數 勝利를 거두며 復活했다. 가을에 特히 剛했던 그는
10月 28日
韓國시리즈 3次戰 先發로 登板했으나 3이닝 3失點으로 期待에 미치지 못했다. 優勝 以後 아시아 시리즈 1次戰인
라미高
前에 先發로 登板해 5이닝 1失點으로 好投했으나 打線이 無得點에 그쳐 敗戰 投手가 됐다.
5年만에
두산 베어스
와의 開幕展 先發 投手로 落點됐으나 滿壘 홈런을 두 番이나 許容하며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다음 競技인
NC 다이노스
戰에서 7이닝 1失點으로 勝利 投手가 됐다. 特히
8月 8日
한화 이글스
戰에서 先發 登板해 6.2이닝 3失點으로 勝利 投手가 되며
김시진
의 通算 最多 勝 記錄을 更新했다.
[12]
또한
9月 7日
LG 트윈스
를 相對로 5이닝 無失點으로 先發勝을 거둬 팀의 1位 자리를 지켜냈고, 9球團 體制 導入 後 最初이자 이 시즌의 唯一한 前 球團 相對 勝利 投手가 됐다.
[13]
前年度에 비해 컨디션이 들쭉날쭉한 모습을 많이 보였으나 打線의 活躍과 特有의 老鍊함으로
크리스 세든
과 함께 14勝을 거두며
2004年
以後 9年 만에 多勝王을 차지(最多 先發勝으로써 처음이자 마지막)했다.
2013年
10月 28日
韓國시리즈 4次戰에 先發 登板했으나 1.1이닝 2失點으로 降板됐고, 打線이 1得點에 그쳐 敗戰 投手가 됐다.
2014年
12月 3日
他 球團 協商 마지막 날에 當時 監督이었던
김성근
의 부름으로 契約 期間 3年, 總 21億 5,000萬원(契約金 5億원, 年俸 5億 5,000萬원)에 FA 契約을 締結했다.
[14]
시즌 前 期待와는 달리 正規 시즌에 先發 投手로써 不安感을 露出하며 4勝 11敗, 7點臺 平均自責點을 記錄했다.
8月 1日
KIA 타이거즈
前에 1軍 엔트리에 登錄됐으나 負傷으로 인해 하루 만에 2군으로 내려갔다.
2018年
11月 30日
에 入團하였다.
[15]
主로 追擊兆로 活動했다.
2019年
9月 14日
SK 와이번스
戰에서 투구에 들어가기 直前 牽制 過程에서 끝내기 보크를 許容했다. 이는
KBO
歷代 첫 番째 0具 끝내기 보크였다. 韓國시리즈 4次戰에서 마지막 投手로 登板해 팀의 優勝을 確定지었다.
2019年
10月 29日
에 隱退를 宣言하며 20年 選手 人生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