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力車를 끄는 일을 職業으로 하는 박원문은
1909年
12月 22日
,
明洞聖堂
에서
벨기에 皇帝 追悼會
에 參席했다가 돌아오는
이완용
을 自身의 人力車에 偶然히 태우게 되었다.
[1]
이때 칼을 든 李在明에게 갑자기 攻擊된
이완용
은 칼을 맞고 重傷을 입었으나 自身 앞에서 人力車를 잡고 서 있던 박원문 또한 李在明의 칼에 찔려 죽었기 때문에 李完用은 九死一生하였다.
[1]
李在明은 逮捕되어 裁判에 回附되었고 公判에서 죽은 박원문을 向한 遺憾이나 弔意는 一切 言及하지 않은 채 박원문을 죽인 것은 偶然이었다는 事實만 强調하면서 "無知無能한 저 可憐한 勞動者를 일부러 죽이려고 했겠는가"라며 辨明하였다.
[1]
日本帝國 法廷은 박원문을 칼로 찔러 죽인 李在明에게 ‘殺人罪’를 適用해 死刑을 宣告했다.
歷史學者
박노자
는 賣國을 한 적도 없고 할 수도 없었던 平民 박원문을 칼로 찔러 죽인 李在明의 行爲를 두고서, 李在明이 公判에서 박원문을 故意로 죽이지 않았다고만 主張했을 뿐 自身의 칼에 찔려 죽은 박원문에게 遺憾을 表明한 적이 없는 李在明의 行爲와 態度를 批判하였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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