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羅南道
광산군
(現
光州廣域市
光山區
)에서 出生하였고 本貫은
忠州
(忠州)이고 雅號는 龍兒(龍兒)이다.
배재高等普通學校
를 거쳐
日本
도쿄
아오야마 學院(靑山學園)과
연희전문
에서 修學했다.
日本 留學 中 詩人
김영랑
과 交流하며
1930年
《시문학》을 함께 創刊해 登壇했다.
1931年
《月刊文學》,
1934年
《文學》等을 創刊해 純粹文學 系列로 活動했다. "나 두 野 간다/나의 이 젊은 나이를/눈물로야 보낼거냐/나 두 野 가련다"로 始作되는 代表作 〈떠나가는 배〉 等 詩作品은 初期作이고, 以後로는 主로
劇藝術硏究會
의 會員으로 活動하며 海外
時
와
戱曲
을 飜譯하고 評論을 發表하는 方向으로 關心을 돌렸다.
1938年
結核
으로 死亡해 自身의 作品集은 生前에 내보지 못했다. 死亡 1年 後 《朴龍喆 全集》李 詩文學史에서 刊行됐다. 全集의 全體 內容 中 飜譯이 차지하는 部分이 折半이 넘어, 朴龍喆의 飜譯 文學에 對한 關心을 알 수 있다.
괴테
,
하이네
,
릴케
等 獨逸 詩人의 詩가 많았다. 飜譯 戱曲으로는
셰익스피어
의 《
베니스의 商人
》,
입센
의 《
人形의 집
》 等이 있다. 劇藝術硏究會 會員으로 活動하며 飜譯한 作品들이다.
朴龍喆은 1930年代 文壇에서
林和
와
朝鮮프롤레타리아藝術家同盟
으로 대표되는 傾向派 리얼리즘 文學,
김기림
으로 대표되는 모더니즘 文學과 對立해 純粹文學이라는 흐름을 이끌었다.
김영랑
,
정지용
,
신석정
,
이하윤
等이 같은
詩文學派
들이다. 朴龍喆의 詩는 金永郞이나 鄭芝溶과 比較해 詩語가 맑거나 밝지는 않은 代身, 抒情詩의 바탕에 思想性이나 民族意識이 깔려 그들의 詩에서는 없는 特色이라는 評價가 있다.
[2]
그는
릴케
와
키에르케고르
의 影響을 받아 會議·摸索·象徵 等이 主潮를 이룬다.
[3]
光州에 生家가 保存돼 있고
光州公園
에는 〈
떠나가는 배
〉가 새겨진 是非도 建立되어 있다.
[4]
每年마다
光州廣域市
光山區
에서는 龍兒藝術祭를 열고 있다.
이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