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涯 初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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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빈은
박문수
의 6代 傍孫人 박영규의 세 아들 中 長男으로 1871年 6月 6日(陰曆 4月 19日)에 태어났다. 박성빈의 7代 幇助 박장원과 6代 幇助
박문수
는
少論
의 거두였고, 朴文秀는 暗行御史로 實績이 있어 有名하였다. 黨色으로는
少論
系列이었지만 沒落하였고, 그의 直系 祖上들은 이렇다할 官職에 나가지 못했다. 慶北 星州郡 私邑村에서 태어난 그의 아버지 朴榮圭까지는 4代는 獨子였다. 沒落 兩班家의 子孫이었던 박성빈은 初期에 官職에 나가려고 하였다. 딸 박재희의 證言에 依하면 벼슬을 하려고 田畓을 팔아서 서울에 자주 올라갔으며, 이때 家産을 많이 날렸다고 한다.
[1]
最終 官職은 府使까지 올랐다고 하며,
朴正熙
의 記憶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박성빈은 情9品 效力副尉(?力副尉)를 지냈다.
東學 農民運動 參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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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尙道
星州郡
鐵山에서 살던 박성빈은
漆谷郡
약목면 若木 水原 백氏門中 딸 백남의와 結婚하여 移住하였으며
[2]
백남의에게서 6男 2女를 두었고, 첫사내아이는 두살때 잃었고(제3공화국 1回 人間 朴正熙 上에서 나왔음)그 中 막내이자 다섯째 아들이 朴正熙이다.
[3]
中宗
때의 儒學者
백인걸
의 從曾祖父 백효연의 後孫이었던 若木의 水原 白氏들은 富裕했고, 박성빈과 그의 두 아들 동희, 舞姬는 後날 妻家, 外家 一族들의 小作農으로 生計를 維持하였다.
박성빈은 朝鮮朝 末葉 戚臣 勢道 政治와 腐敗 政治에 反撥하고 幻滅도 느껴 20代에는
東學農民運動
에도 加擔하였다. 그러나 逮捕되어 處刑 直前에 天運으로 赦免되어 救命을 하였다.
[2]
[4]
딸 박재희의 證言에 依하면 逮捕된 東學 農民軍 3百名 中 혼자서 살아 나왔는데, 達辯에 能하였기 때문이다.
[1]
한便 朴正熙와 洞里 住民들 記憶으로는 괄괄하고 豪快한 性格이었다고 證言한다.
[1]
朴正熙는 어머니 백남의가 이때 너희 아버지가 죽었더라면 너는 태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했다고 後日 김종신, 이석제 等에게 隨時로 言及하였다.
生涯 後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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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後 박성빈은 집안일에 關心이 적은 閑良 또는 半거들충이로 술로 歲月을 보내며 이래저래 家産을 거의 蕩盡하게 됐다. 經濟的으로는 無能力했던 탓에 5男 2女 家族의 生計를 책임지는 實質的인 가장 役割은 그의 아내
백남의
의 몫이 되었다.
백남의
는 妻家의 諒解를 얻어 龜尾 상모동으로 全 家族을 이끌어 率家하고 妻家의 先山(先山)인 慶北 善山郡(善山) 상모동의 位土(位土, 墓에 딸린 논밭)를 小作하며 生計를 維持시켰다.
[5]
[6]
박성빈이 東學農民運動에 加擔했던 經歷으로 後日
朴正熙
는 同年輩 또래들이 東學亂이라 부르던 것을
東學農民革命
이라 높이 評價하기도 하였다.
[7]
이에 對해 東學農民革命 遺族會는 2005年 '東學農民革命參與者 名譽回復에 關한 法律' 施行 以後 박성빈의 當時 行跡을 綿密히 調査했다.
그에 따르면 박성빈은 靑年時節 武科에 及第해 黃海道 寧邊地域 府使(또는 咸南 地域府使)로 發令받았으나 混濁한 世上에 幻滅을 느껴 官職을 抛棄하였다. 그리고, 星州에서 東學運動에 뛰어 들었으나 東學運動 彈壓이 거세지면서 官軍에 逮捕됐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뒤 칠곡과 龜尾 等에서 世上을 등지고 지낸 것으로 밝혔다.
[8]
[9]
[10]
박성빈은 妻家의 位土만으로는 到底히 生活이 안 돼 한때
장택상
의 아버지이자 大地主였던
장승원
의 집을 出入하기도 했는데, 이 因緣으로 그의 아들 박무희가
장승원
의 땅 다섯 마지기를 小作하기도 했다.
[11]
家族들은 가을 秋收가 끝나면 둘째 舞姬가 지게에다 도지(賭地, 논밭을 빌린 삯)와 마름에게 줄 賂物 씨암탉을 지고 場 直角 宅으로 보내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12]
末年에 病으로 苦生하던 박성빈은 46살이라는 매우 늦은 나이에 얻은 막내
朴正熙
가 장가가는 것을 살아生前 보고싶어한 탓에 무리하게 自身의 親舊의 딸인
김호남
과 强制로 結婚시켰다. 그러나 朴正熙는
김호남
을 別로 좋아하지 않았고 같은 房을 쓰기조차 拒否했다고 한다.
[13]
1938年 67歲로 作故하였다.
[1]
아들
朴正熙
가 大統領이 되면서 "腐史 效力副尉 박성빈至妙"라는 碑石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