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年?10月 24日?저녁 JTBC는 최순실에 對한 國政介入에 對한 證據로 태블릿PC를 入手하여 報道하였다. 10月 25日 포털에 彈劾, 下野가 上位 檢索語로 올랐으나,
[32]
公式的인 退陣 要求는 터지지 않았다. 10月 25日 朴槿惠는 演說等을 도움받았다고 解明했으나 이날 저녁 JTBC는 박근혜가 解明의 範圍를 넘어서는 文件을 최순실에게 流出했다고 證據를 公開했다.
[33]
이에 10月 26日부터 記者會見, 宣言 等 形態로 公式的인 退陣 運動이 始作되었으며, 저녁부터 退陣 集會도 열렸다.
[34]
MBC 時事매거진 硏究用役의 朴槿惠 大統領 退陣 運動 輿論 硏究 結果에서는 2016年 10月 29日과 2016年 11月 5日에 있었던 1次·2次 示威 期間에는 朴槿惠 大統領이 直接 辭任하기를 바라는 下野論이 優勢했다면 朴槿惠 大統領의 辭任이 늦춰지자 2016年 11月 12日과 2016年 11月 19日에 있었던 3次·4次 示威 期間에는 朴槿惠 大統領에게 辭任을 命令하는 退陣論으로 輿論이 바뀌었고 朴槿惠 大統領이 스스로 辭任할 뜻이 없다는 것이 自明해지자 2016年 11月 26日의 5次 示威 期間에는 朴槿惠 大統領의 下野와 退陣을 바라는 輿論에서 强制的인 退陣인 彈劾論으로 輿論이 바뀌었다고 分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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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年 10月 29日 ~ 2016年 11月 11日: 下野論
編輯
2016年 10月 29日 全國 各地에서 退陣 示威가 열렸다. 特히 서울都心에서는 大規模의 集會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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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서울 都心인 청계광장에서 열린 退陣 促求 集會의 集會名은 '모이자! 憤怒瑕疵! #내려와라_박근혜 市民 촛불'으로 民衆總蹶起 鬪爭本部에서 主催했다. 主催 側 推算 3萬 名, 警察 推算 1萬 2000名 假量이 參加했다.
[38]
2016年 10月 31日에는 '나와라최순실시민행동' 等 進步性向 市民團體가 서울에서 촛불集會를 열었다.
[39]
民衆總蹶起 鬪爭本部는 2016年 11月 1日부터 2016年 11月 12日까지 每日 촛불集會를 연다고 밝혔다.
[40]
11月 5日 土曜日 集會와 12日 民衆總蹶起는 大規模로 開催된다. 11日까지 集會는 서울 鍾路區 청계광장에서, 12日 民衆總蹶起는 서울광장에서 열린다.
[41]
[42]
民衆總蹶起 鬪爭本部, 白南基 鬪爭本部, 4.16 連帶 等은 '박근혜-최순실 國政壟斷 事態에 즈음한 非常時局會議'를 結成하고 集會를 開催
[43]
하였고, 以後 朴槿惠 政權 退陣 非常國民行動(준)을 結成
[44]
한다.
2016年 11月 5日에는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集會와 都心行進에 主催 側 推算 30萬 名 警察 推算 2萬 8千名이 參加했다. 當初 警察이 交通을 理由로 行進禁止를 通告했는데 法院의 假處分으로 合法的으로 行進을 하였다.
[45]
[46]
[47]
또한 光州廣域市·蔚山·釜山 等地에서도 박근혜 退陣과 통진당 所屬 國會議員 이였던 李石基 釋放을 要求하는 集會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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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邱에서는 한 女高生이 朴槿惠 下野에 關한 演說을 하며 누리꾼들의 關心이 모아졌다.
[49]
2016年 11月 12日 ~ 2016年 11月 25日: 退陣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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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年 11月 8日 民主勞總은 2016年 11月 民衆總蹶起 때 靑瓦臺 200 m 옆인 靑雲孝子洞 住民센터 앞 신교동 交叉路까지 行進을 한다고 申告했다. 靑瓦臺 100m 以內의 行進만 禁止한 執匙法과 "集會·示威를 抗議의 對象으로부터 떨어뜨리는 것은 集會·示威의 自由를 侵害하는 것"이라는 憲法裁判所 決定을 根據로 "이番 集會 目標는 朴槿惠 大統領 退陣이므로 靑瓦臺 隣近으로 가야 한다"는 立場을 밝혔다. 警察은 너무 많다며 禁止通告를 檢討 中이라고 밝혔다. 이에 민주노총은 禁止通告를 하면 法的對應을 한다고 밝혔다가
[50]
民主勞總은 그 代身 民衆總蹶起 鬪爭本部가 主催하는 行進에 參與하기로 決定하였다.
[51]
2016年 11月 9日 民衆總蹶起鬪爭本部와 市民社會團體連帶會議 等 市民社會團體를 主軸으로 박근혜政權 退陣 非常國民行動이 出帆
[52]
하였다.
民衆總蹶起 鬪爭本部側 行進에 對해 警察이 中間까지만 許容하는 式으로 制限을 通告하자 鬪爭本部側이 假處分 申請을 냈고, 法院은 11月 12日 執行停止 假處分을 받아들여 4가지 經路로 景福宮驛까지 行進이 進行되게 되었다.
[53]
이날 6次 民衆總蹶起 示威에 主催側 推算 106萬 名, 警察推算 26萬 名이 參與했다.
[54]
2016年 11月 19日 4次 서울集會는 광화문광장에서 열리고 全國 各地에서도 열린 '모이자! 光化門으로! 밝히자! 全國에서! 박근혜 退陣 4次 汎國民行動'集會에 서울에 主催側推算 60萬名 全國 95萬2千名이 모였다.(경찰추산 서울 17萬名 全國 27萬5千名)
[55]
더불어民主黨과 國民의黨, 正義黨의 院內 野3黨은 11月 24日, 彈劾案 發議를 論議한다. 彈劾案은 12月 初에 票決할 豫定으로 準備했다.
[56]
彈劾이 可決되려면 새누리당 內에서 28名의 追加 贊成이 必要한 狀況이었다.
[57]
2016年 11月 29日 朴槿惠는 自身의 行動은 公益을 위한 것이었다며 自身의 彈劾 與否를 國會에 맡기겠다는 內容의 對國民談話를 發表했다. 박근혜 退陣을 要求하던 團體들은 卽刻 退陣을 要求하고 박근혜 退陣 集會를 繼續 열기로 했다.
[58]
2016年 11月 26日 ~ 2017年 3月 10日: 彈劾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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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年 11月 26日 '박근혜 卽刻 退陣 5次 汎國民行動'李 열렸다. 4次 集會 假處分 申請에서 法院이 낮時間帶의 靑瓦臺 方面 行進을 許容함에 따라 율곡로 北쪽 靑瓦臺로 가는 行進은 낮時間帶에 하고 저녁에는 율곡로까지 行進하는 것으로 申告했다.
[59]
全國에서 190萬名 (警察 推算 33萬名)이 參與해 大韓民國 憲政史 最大의 示威로 記錄되었다.
[60]
[61]
2016年 11月 29日 朴槿惠는 自身의 行動은 公益을 위한 것이었다고 하면서 進退問題를 國會에 맡기겠다고 對國民談話를 했다. 박근혜 退陣을 要求하던 市民社會團體들은 卽刻 退陣을 要求하고 박근혜 退陣 集會를 繼續 열기로 했다.
[62]
2016年 11月 30日에는 朴槿惠 大統領 退陣을 促求하는 總罷業을 벌였다. 이날 總罷業에 22萬名이 參加했으며 集會에는 主催側 推算 6萬名이 參加했다고 밝혔다. 警察은 이날 集會에 8千名이 參加했다고 推算했다.(노동운동계에서 朴槿惠政府에서 拘束되거나 犧牲당한 勞動者數도 參與政府의 두 倍以上 많은 것으로 推定됨)
[63]
2016年 12月 3日에 열린 6車集會에서 主催側 推算 232萬名 (警察 推算 42萬名)이 參加하여 大韓民國 憲政史 最大 示威 記錄을 다시 更新했다.
朴槿惠 大統領은 2016年 12月 3日 6次 촛불集會 以後 2016年 12月 9日 國會에서 不參 1票, 贊成 234票, 反對 56票, 無效 7票로 彈劾案이 可決되었다. 彈劾의 主要 原因 으로는 一旦 第一 큰 것은 勿論 촛불의 市民 輿論 힘이 워낙 剛하기 때문에 國會議員들은 무엇보다도 民心에 宏壯히 敏感하게 作動될 수밖에 없고 彈劾 前에 한국갤럽이 調査한 輿論調査에서도 彈劾에 對해서 贊成한다는 國民이 81% 이르렀다. 그래서 234名이 彈劾에 贊成했는데 比率로 換算하면 78% 程度 되기 때문에 거의 民心과 一致한다.
[64]
2016年 12月 10日, 7次 촛불集會는 서울 80萬 全國的으로 104萬 3400名이 參席하여 박근혜 卽刻 退陣과 拘束 그리고 憲裁의 빠른 彈劾審判을 要求했다.
[65]
2016年 12月 17日, 憲法裁判所가 朴槿惠 大統領 彈劾審判 準備에 本格的으로 着手한 狀況에서 朴 大統領 卽刻 退陣과 憲裁의 彈劾審判 認容, 黃敎安大統領 權限代行 國務總理 辭退를 促求하는 8次 週末 촛불集會가 열렸다.
[66]
이날 主催側은 서울 65萬名, 全國 77萬名으로 推算하였고, 警察은 서울 6萬名, 全國 7萬 7千名으로 推算하였다.
[67]
이렇게 時間이 지나면서 集會 參加者들이 줄어드는 理由는
朴槿惠
大統領
이 國會에서 彈劾이 可決되어 執務가 停止된 만큼
憲法裁判所
의 決定을 기다리는 性向이 나타난다는 分析이 支配的이다. 한便, 集會 參席者는 漸漸 줄어드는 趨勢이지만 이番 事態에 對해 國民 大部分이 表하는 民心 自體는 如前히 식지 않았다는 意見이 많다.
[68]
朴 大統領 側이 憲裁에 提出한 答辯書에서 "彈劾 理由가 없다"고 밝힌 것을 糾彈하며 朴 大統領이 卽刻 退陣해야 하고, 黃 權限代行 亦是 現 事態에 責任을 지고 辭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憲裁가 迅速히 心理를 進行해 하루빨리 彈劾審判을 引用하라는 要求도 强했다.
[69]
2016年
의 마지막 날인
12月 31日
에는 事前에 累積 延人員 1000萬名을 突破할 것이라는 豫想을 받았고 이날 10次 촛불集會에서 主催側 推算 110萬 4千名 警察 推算 8萬 3千名이 參與하여 '송박영신(送朴迎新·朴槿惠 大統領을 보내고 새해를 맞음)' 촛불集會를 열고 朴 大統領 卽刻 退陣을 促求했다. 이날 累積 延人員 1000萬名을 突破하면서 退陣行動 關係者는 "單一 議題로 1000萬 集結한 集會는 歷史上 첫番째 事例"라고 말했다.
[70]
2017年
1月 7日
,
歲月號 沈沒 事故
1000日을 記念한 11次 集會가 열렸다. 主催側 推算 64萬 3380名 警察 推算 3萬 8千名 이 參加하였다. 이날 한
스님
이 서울 都心 示威現場에서
長期 寄贈
을 못함을 아쉬워하면서도
[71]
燒身供養
을 했다.
[72]
그의 家族들의 意見에 따라 延命治療를 하지 않았고 그는 이틀 後 死亡했다.
[73]
2017年
1月 14日
, 體感溫度 零下 13度에도 不拘하고 12次 촛불集會가 열였다. 이날은
1987年
南營洞 對共分室
에서 拷問을 받던 中 死亡한 서울大 學生
朴鍾哲
烈士의 30週期였다. 廣場에는 박종철 烈士를 追慕하는 市民들이
國花
꽃을 들고 줄을 섰으며, 정원스님 焚香所에도 市民들의 弔問行列이 이어졌다. 光化門美術行動에서 準備한 車壁攻略 프로젝트 ‘應答하라 1987! 한 걸음 더 2017’는 懸垂幕을 設置해 ‘박종철, 이한열 烈士 30周忌 追慕市民 퍼포먼스’를 進行했다. 이날은 主催側 推算 14萬6千7百名이 參加하였다.
[74]
退陣行動은 午後 4時 民衆總蹶起 鬪爭宣布大會, 午後 5時 事前發言臺, 午後 6時 本行事, 午後 7時30分 行進 順序로 제13차 촛불集會를 進行할 豫定이라고 밝혔다.
최종진
民主勞總 委員長 職務代行,
三星電子서비스
勞動者 等이 法院 糾彈과 拘束 促求,
헬朝鮮
을 바꾸자 等의 主題로 發言이 豫定됐다. 그리고 이날 主催側 推算 35萬 3千 4百名이 參加하였다.
[75]
봄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立春'이었던
2017年
2月 4日
, 14次 촛불集會가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설날을 쉬고 一週日만에 廣場에 나온 市民들은 ‘박근혜 2月 彈劾, 黃敎安 辭退, 共犯勢力 拘束'等을 외치며 촛불을 밝혔다. 朴槿惠-최순실 게이트로 光化門廣場에 촛불을 밝힌 지 99日째. 이날 集會는 2月에는 彈劾하라라는 主題로 열렸고 市民들은 靑瓦臺의 押收搜索 拒否를 集中 聲討했다. 그리고 이날에는 主催側 推算 42萬 2千 5百名이 參加하였다.
[76]
2017年 2月 11日에 15次 촛불集會가 열였다. '박근혜政權 退陣 非常國民行動'(退陣行動)은 이날 集會에 全國 80萬6千名이 集結했다고 推算했다. 이날 退陣行動은 市民들과 함께 朴槿惠 大統領의 退陣과 憲法裁判所의 早速한 彈劾 引用을 促求했다. 김경자 민주노총 副委員長은 "박근혜 大統領과 그를 庇護하는 犯罪集團은 特檢 搜査가 끝나고 李貞味 憲法裁判官 任期가 끝날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는 期待感을 갖는다"며 "더 緊張하고 촛불을 더 높이 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77]
2017年 2月 18日 16次 촛불集會가 열였다. 이날 集會에 參與한 市民들은 '早期彈劾 特檢延長' '박근혜를 拘束하라' 等의 피켓을 들고 廣場에 자리했다. 이날 촛불集會의 白眉는 朴 大統領을 向한 레드카드 퍼포먼스였다. 參席者들은 빨간色 韓紙 뒤에 덧댄 携帶電話 불빛을 利用해 光化門廣場에 붉은 빛을 수놓았다. 김덕진 退陣行動 대협팀長은 "오늘 光化門에 모인 70萬 촛불은 함께 約束한다"며 "저 뻔뻔한 박근혜 退陣과 彈劾을 위해 촛불을 내려 놓지 않을 것이다. 金淇春, 조윤선, 李在鎔의 오늘이 박근혜와 共犯者들의 來日이 될 수 있도록 촛불을 내려 놓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2月25日 全國의 촛불이 다시 光化門으로 모이고 3月1日 촛불을 들고 박근혜 退陣을 위해 힘을 모으자"고 덧붙였다. 이날 集會에는 84萬4860名이 參加했다.
[78]
2017年 2月 25日 午後 4時부터 進行된 17次 촛불集會는 '박근혜 4年 너희들의 世上은 끝났다'를 主題로
7次 民衆總蹶起
가 열렸다. 촛불集會의 事前行事 格인 이 集會에서 최종진 民主勞總 委員長 職務代行은 "只今 大韓民國에는 촛불과 太極旗의 싸움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正義의 촛불이 犯罪者를 몰아내는 鬪爭이 進行되고 있다"며 "박근혜·財閥總帥 拘束과 헬朝鮮 打破가 歷史의 課題이자 촛불의 命令"이라고 말했다. 이 集會에 107萬8130名의 國民이 모여 大韓民國 憲法裁判所의 朴槿惠 大統領 彈劾 訴追案 引用과 特檢 延長等을 要求했다.
[79]
2017年 3月 1日 3.1節을 맞아 第18次 촛불集會가 열렸다. 臨時政府 當時 使用됐던 太極旗가 내걸리고, 붓글씨를 쓰는 行事와 大學生 風物牌의 四物놀이 公演이 進行되는 等 3.1節을 맞아 다양한 事前行事度 열렸다. 參加者들은 歲月號 慘事를 追慕하는 노란 리본을 묶은 太極旗를 들고 集會 現場에 모였다. 本行事가 始作되자 特檢 延長案을 拒否한 黃敎安 大統領 權限代行의 退陣과 特檢 延長 等을 要求했고, 大統領 彈劾 引用을 要求하는 萬歲를 외치기도 했다. 이날 集會에는 30萬名이 參加했다.
[80]
2017年 3月 4日 19次 촛불集會에는 參加 市民들이 時期上으로는 봄이 됐지만 "彈劾 認容 前까진 봄이 온 게 아니다"라며 彈劾 引用을 促求했다. 또한, 特檢 延長을 拒否한 黃敎安 大統領 權限代行度 함께 彈劾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親朴 團體들이 憲裁를 脅迫하고 있다며 暴力行爲를 멈추라고 糾彈하기도 했다. 市民들은 靑瓦臺와 總理 官邸 方向으로 갈라져 靑瓦臺를 包圍하는 模樣으로 行進을 벌였다. 主催 側은 "촛불民心이 이끄는 彈劾列車는 終着地까지 갈 것이다"며 彈劾이 引用될 때까지 集會를 이어가겠다고 豫告했다.
[81]
2017年 3月 10日 前後?: 最後의 瞬間
編輯
2017年 3月 9日부터 11日까지 20次 촛불集會가 열리는데 11日 大規模 集會에 앞서 9日과 彈劾 宣告日人 10日 事前集會가 열였다. 9日과 10日 彈劾 宣告가 내려지기 前부터 10日 朴槿惠 前 大統領 彈劾審判 宣告가 내려진 後 서울 鍾路區 一帶는 彈劾贊成 集會 參加者들이 行進을 이어가고 있다. 參加 市民들이 都心 곳곳에서 '촛불이 勝利했다'등의 口號를 외쳤다. 9日과 10日 事前集會에는 2萬名의 市民들이 모였다.
[82]
2017年 3月 11日에는 9日과 10日에 이어 2泊3日 촛불集會人 20次 촛불集會가 열렸다. 朴槿惠 大統領의 彈劾 以後 첫 集會였다. 參加者들은 本 集會 前부터 邊將 퍼레이드를 펼치면서 熱氣를 더했다. 光化門廣場을 가득 메운 촛불集會 參加者들은 彈劾 引用을 '촛불의 勝利'로 宣言하고, 朴 前 大統領 拘束搜査와 黃敎安 大統領 權限代行의 退陣 等을 促求하였다. 저녁 6時 半부터는 靑瓦臺와 總理官邸 隣近 그리고 鍾路 一帶를 거치는 經路로 나뉘어 行進이 進行되었다. 이날 촛불集會는 촛불勝利 祝賀콘서트로 끝을 맺었다. 이날 集會에는 70萬名이 모였다.
[83]
結局
朴槿惠
의 최서원(최순실)의 國政介入 事實을 隱蔽한 點(代議民主制 原理와 法治主義 毁損), 崔氏의 利權 介入에 도움을 준 點(職權 濫用, 企業의 財産權 侵害, 企業經營의 自由 侵害), 職務上 祕密을 流出한 點(國家公務員法上 祕密嚴守義務 違背), 檢察·特別檢事의 調査·押收搜索에 不應한 點(憲法守護意志 없음)은 國民의 信任을 배반한 行爲이며, 憲法秩序에 否定的 影響을 미친다는 點이 認定되어 裁判官 全員의 一致된 意見으로 憲政史上 最初로 彈劾되었다.
2017年
3月 10日
以後 政局은 朴槿惠 彈劾 引用에 따른 大統領職 闕位를 解決하기 위한 後任 大統領 選出 選擧인
大韓民國 第19代 大統領 選擧
政局으로 變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