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도서기派 儒學者
유신환
(兪莘煥)의 弟子로
1870年
文科 別試
(別試)에 甁과(丙科)로 合格하였다.
1874年
閔氏 戚族의 首長인
민승호
가 갑자기 죽자
高宗
은 민승호에게 忠情이란 諡號를 내렸다. 그런데 민승호에겐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閔王后는 가까운 親戚을 排斥하고 寸數가 좀 먼
민태호
의 아들 閔泳翊을 養子로 삼겠다고 했다.
[1]
그러자
민태호
는 反對하였고 그의 동생
민규호
가 兄을 脅迫했다. "千의(왕후의 뜻)를 어찌 敢히 어기겠습니까? 養子를 보내어 함께 富貴를 누리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민태호
의 아들 閔泳翊은
민승호
의 養子로 들어갔고, 뒤이어
민규호
는
吏曹判書
兼 都統使가 되었다.
[1]
閔氏 戚族의 首長으로 勢道를 부리던 閔升鎬가 갑자기 暴死瑕疵, 사람들은
흥선大院君
을 疑心하였다. 그리고 민승호와 그의 아들이 同時에 爆死했으므로 閔氏 一族들은 自身의 아들을 閔升鎬의 事後 養子로 세우기 위해 各自 暗鬪와 競爭을 벌였다. 하지만 閔王后는 萬若을 對備하여 오빠의 事後 養子로
민영익
을 일찌감치 점지해둔 狀態였다.
[2]
민태호는 아무리 一家라지만 하나뿐인 아들을 養子로 줄 수 없다고 버텼지만, 민규호 等과 民王后의 거듭된 說得으로 許諾할 수밖에 없었다.
[2]
민태호는 품에서 아들을 잃은 代身 權勢를 손아귀에 움켜쥐었다. 民王后는 親庭아버지의 祭祀를 받드는 唯一한 血肉인 閔泳翊을 끔찍이 아꼈다. 寸數로는 조카였지만, 나이 差異가 9歲밖에 나지 않았기 때문에 親同生처럼 親하게 對했다.
[2]
1875年
京畿道
監司를 지냈고,
1878年
딸이
純宗
의 비인
순명효황후
으로 揀擇되었다. 以後
刑曹判書
,
兵曹判書
,
禮曹判書
,
吏曹判書
를 지냈다.
1883年
통리軍國事務아무獨판, 그 뒤 摠戎使, 御營大將, 武威都統使(武衛都統使), 大提學 等을 지냈다. 閔氏 戚族의 中心人物로서
1882年
壬午軍亂
때, 江華留守(江華留守)로 있었는데
민태호
의 집도 襲擊을 받았다.
그 뒤 從一品으로 昇進하여
議政府
左贊成
을 지냈고
1883年
7月
典圜局 官吏事務(典?局管理事務),
9月
軍國事務獨판을 거쳐 다시
議政府
左贊成이 되었다. 王家의 外戚으로 事大黨(事大黨)의 代表的 人物로서 活躍하였으며
1884年
甲申政變
때
윤태준
(尹泰駿), 前領事(前營使)
한규직
(韓圭稷), 知中樞府事(知中樞府事)
조영하
(趙寧夏), 解放摠管(海防總管)
민영목
(閔泳穆),
內侍
유재현
(柳載賢) 等과 함께 入闕하던 中
景祐宮
大廳 앞에서
김옥균
一派가 보낸 軍士에게 쫓기다가 칼에 맞고 暗殺되었다.
事後 衝문공(忠文公)의 諡號가 내려지고
10月 24日
增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領議政)에 追贈되었다.
高宗
이 보낸 承旨가 直接 致祭하였으며 3年値의 祿俸이 내려졌다.
1907年
純宗
卽位後
이윤용
의 上疏로 女銀府院君(驪恩府院君)李 追贈되었다.
글씨에 能하여 戰서(篆書),예서(?書),행서(行書),초서(草書) 等 다양한 書體를 모두 잘 썼다 한다.
家族 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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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祖父?: 민형수(閔亨洙)
- 曾祖父?:
민백상
(閔百祥)
- 量曾祖父?: 민백흥(閔百興)
- 養祖父?: 民상섭(閔相燮)
- 養아버지: 민치삼(閔致三)
- 否認?: 貞敬夫人 파평尹氏(坡平尹氏), 破聲 夫婦인(坡城府夫人)으로 追贈
- 否認?: 貞敬夫人 鎭川宋氏(鎭川宋氏), 진양 夫婦인(鎭陽府夫人)으로 追贈
- 否認?: 義昌夫婦인 宜寧南氏(宜寧南氏)
[3]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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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태호가 登場한 作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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