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규호
(閔奎鎬,
1836年
8月 20日
~
1878年
10月 15日
)는
朝鮮
時代 後期의 文臣이자 戚臣으로,
민유중
의 아들
민진원
의 5代孫이다.
명성황후
의 12寸 오라버니이며
순명효황후
의 아버지
민태호
의 親同生이자 8寸 동생이다.
哲宗때 司馬試에 合格하고 1859年(哲宗 10年) 文科에 及第하여 官職에 올랐다. 高宗 卽位 初
흥선大院君
의
鎖國 政策
을 正面 批判하였고 興宣大院君 失脚 後
명성황후
에 依해 重用되어
右議政
에 이르렀다. 大院君 失脚 後에는 個項 政策을 펼치며 鎖國을 止揚하고 開港할 것을 내세우는 開國論(開國論)을 主張하고, 閔氏 戚族內에서 幕後 影響力을 行使했다. 字는 경원(景園), 號는 黃沙(黃史), 四號(賜號)는 지당(芝堂), 諡號는 충헌공(忠獻公)이다. 本貫은
餘興
.
漢城府
出生.
민유중
의 아들이며
인현왕후
의 오빠인
민진원
의 孤孫
民治誤
의 아들로 태어났다.
哲宗
때 司馬試에 合格하여
生員
이 되었다.
1859年
文科에 及第하였고, 66年 11寸 아저씨인
민치록
(閔致祿)의 딸이 王妃가 됨에 따라 그 一族으로 特別히 登用되어
李朝
參議
가 되었다. 1867年(高宗 4) 다시 吏曹參議가 되고 吏曹參判으로 昇進한 뒤 漢城府右尹을 지냈다.
1869年
刑曹參判이 되었다가 다시 吏曹參判을 지냈다.
흥선大院君
의 執權中 西歐 文物에 對한 開國論(開國論)을 主張하며
鎖國 政策
에 正面 反對하였다.
1874年
11月
大院君이 失脚하고 高宗이 親政하면서 大院君의 政策을 廢止시켜 나갔다.
그 뒤 禮曹 및 吏曹 判書를 歷任하였으며
흥선大院君
의 鎖國主義에 反對하고 對外에 開國論을 展開하였다.
[1]
以後 奎章閣 提學을 거쳐
大匡輔國崇祿大夫
로 昇進,
議政府
右議政
兼 三軍府史를 지냈다. 그는 平素
민치록
의 養子가 된
민승호
와
민겸호
兄弟를 輕蔑하여 멀리하였다.
高宗
은 민승호에게 忠情이란 諡號를 내렸다. 그런데 閔升鎬의 뒤를 이을 아들이 爆發事故로 죽어서 閔妃는 가까운 親戚을 排斥하고 寸數가 좀 먼
민태호
의 아들 閔泳翊을 養子로 삼겠다고 했다.
[2]
그러자
민태호
는 反對하였고 그의 동생 민규호가 兄을 脅迫했다. "千의(왕후의 뜻)를 어찌 敢히 어기겠습니까? 養子를 보내어 함께 富貴를 누리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민태호
의 아들 閔泳翊은
민승호
의 養子로 들어갔고, 뒤이어 민규호는
吏曹判書
兼 都統使가 되었다.
[2]
그 뒤
1878年
臥病 中
議政府
領議政이 되었다가 다시 右議政으로 고쳐 任命되었으나, 7日만에 죽었다. 隸書, 行書, 草書 等 글씨에 能하였다. 충헌(忠獻)의 諡號가 追敍되었다.
家族 關係
編輯
- 할아버지?: 民상섭(閔相燮)
- 아버지?:
民治誤
(閔致五)
- 어머니?: 金海 金氏 김원식(金元植)의 딸
- 兄?:
민태호
(閔台鎬)
- 아들?:
민영소
(閔泳韶)
같이 보기
編輯
민규호를 演技한 俳優
編輯
- ↑
한영우 (2001年 10月 20日). 《明成皇后와 大韓帝國》 初 1刷판. 서울: 효형출판. 37쪽쪽.
ISBN
89-86361-57-4
.
- ↑
가
나
黃玹, 《매천야록》 (정동호 驛, 一問書籍, 2011) 40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