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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구치 겐지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미조구치 겐지

日本의 映畫 監督

미조구치 겐지 ( 日本語 : 溝口 健二 , 1898年 5月 16日 ~ 1956年 8月 24日 )는 日本 映畫監督 이다.

미조구치 겐지
溝口健二
미조구치 겐지
出生 1898年 5月 16日 ( 1898-05-16 )
日本 아사쿠사
死亡 1956年 8月 24日 ( 1956-08-24 ) (58歲)
日本 교토
다른 이름 고테켄
職業 映畫 監督 , 脚本家 , 映畫 編輯者
活動 期間 1923年 - 1956年

生涯 編輯

도쿄시 아사쿠사 區(現· 도쿄都 다이토구 아사쿠사 ) 出身으로, 아버지는 木手 였다. 그의 家庭環境은 悲慘한 水準이어서 그의 누이를 게이샤로 팔지 않으면 안될 程度였다. 이 일은 겐지의 思考方式에 깊은 影響을 주었다. 어머니와 누이에 對한 아버지의 虐待 사이에서 그는 剛하게 抵抗하곤 했으며, 그는 平生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13歲에 學校를 그만두고 고베 에서 廣告 디자인 일을 始作했으며 同時에 美術을 工夫하기 始作했다. 유우신一步(又新日報)社의 揷畵家로 일하기도 했다. 1920年에 그는 닛카츠 撮影所에 入社하여 映畫界에 入門하였다. 처음에는 俳優로 始作했으며 3年뒤 監督이 되었고 關東大地震 以後 東京撮影所로 옮긴다. 1925年 內緣의 女人에게 面刀칼로 찔리는 事件을 經驗한 以後, 女性을 테마로 한 作品을 獨特한 感覺으로 그려내기 始作했다. 1939年 나카다 마사이치( 永田雅一 )의 다이理致 映畫社( 第一映?社 )에 參加하고 以後 다이에이 映畫社 創立 以後 專屬이 된다.

겐지의 初期 作品들은 探索에 가까운 것으로 유진 오닐 이나 톨스토이 等의 作品들로 文藝映畫를 만들거나 獨逸 表現主義 映畫들을 따라해보거나 하는 것들이었다. 그의 作業速度는 매우 빨라서 몇週만에 映畫 한便을 만들어내기도 했고 興行成績도 좋았다. 그래서 20年代와 30年代 사이에 70餘篇의 映畫를 찍는 것이 可能했는데 現在 이것들은 거의 流失되었다. 뒤쪽의 것들은 所謂 傾向映畫(tendency film)라고 불리는 것들로 겐지는 그 作品들에서 社會主義的인 傾向을 드러내었고 先驅的인 存在가 되었다. 1936年의 《 氣溫의 姊妹들 》과 《 나니와 엘레지 》 以後가 되어서야 겐지는 自身의 人生을 代表할 만한 映畫들을 찍기 始作했다.

그의 中期에 겐지는 前近代와 近代의 轉換期를 담는 社會派 映畫인 '뉴 리얼리즘' 監督으로 脚光받기 始作했다. 《 마지막 國花 이야기 》는 문부성으로부터 賞을 받았는데 앞선 두 映畫처럼 男性中心社會에 반한 女性의 役割에 對해 摸索하고 있다. 이 時期에 겐지는 그의 有名한 方法論인 '元辰, 원샷' 原則을 確立하였다. 그의 섬세하고 正統的인 세트 디자이너인 미즈타니 히로시는 겐지가 廣角렌즈를 자주 利用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戰爭期間동안 겐지는 宣傳映畫를 찍도록 軍部로부터 강요받았다. 이中 가장 有名한 것은 충신장 이야기를 담은 사무라이 時代劇 《 원록충신장 》(1941)이다. 이 時期에 겐지는 問題가 될 만한 素材를 避해서 作品生活을 했다. 日本 女性의 參政權이 認定되던 무렵의 革命的인 映畫 《 女人의 勝利 》(1946)나 《 내 사랑은 불탔었지 》(1949) 以後 겐지는 時代劇으로 轉換하여 傳來되던 이야기들을 再解釋하는 作業을 많이 했는데 主로 悲劇的 趣向이 强했다. 이 때는 시나리오 作家인 饒多 요시타카 와 主로 함께했다. 이 때가 가장 認定받는 時期로 베니스에서 銀獅子賞을 받은 《 우게츠 이야기 》(1953)을 비롯해 그를 國際的으로 有名하게 만든 《 오하루의 一生 》(1951)李 그러하다. 《 山쇼多柳 》(1954)는 封建事大 日本의 儒敎的 道德에 關한 이야기이다. 白편에 가까운 그의 映畫 中에 칼라映畫는 《 신페이가 이야기 》(1955)와 《 楊貴妃 》(1955)뿐이다.

겐지는 교토에서 58歲로 죽었는데 死因은 白血病이었다.

作品世界 編輯

겐지의 映畫는 主로 女人의 勝利를 다루고 있다는 點으로 有名하다. 그는 最初의 大衆的 페미니스트 監督으로 꼽힌다. 그는 더 尊重받아야 함에도 不拘하고 日本 社會속에서 虐待받고 짓밟힌 女人들의 處地를 잘 드러내었다. 그는 게이샤의 困境을 자주 다루곤 했지만 그의 主人公들은 娼女, 勞動者, 거리의 運動家, 主婦 甚至於 封建時代 귀한집 아가씨까지 다양했다.

그의 映畫는 日本 繪畫를 연상시킬정도로 耽美的이다. 그는 롱테이크와 豐盛하고 描寫的인 미장센을 追求했다. 클로즈업과 같은 西歐風의 技法은 거의 쓰지 않았다. 그는 普通 몇分이나 되는 神을 만들곤 했고 스턴버그 (Josef von Sternberg)風의 照明과 세팅을 통해 場所에 포인트를 두었다. 겐지는 觀客과 캐릭터間의 絶妙한 共感을 만들어 特有의 定型化된 아름다움이 튀지 않도록 均衡을 잡는다. 그의 가장 좋은 作品들은 大槪 相當히 感動的이다.

겐지의 리허설에 對한 强迫은 惡名높았는데 特히 女俳優들이 苦生했다. 롱테이크를 좋아했기 때문에 조금의 失手도 再撮影으로 이어졌고 그는 한 샷을 찍기위해 거의 백餘番씩 리허설을 하곤 했다. 다나카 키累요(Kinuyo Tanaka, 田中絹代) 는 겐지 映畫의 단골 女主人公이었는데 한番은 겐지가 그女에게 役割을 위해 圖書館의 모든 冊을 읽으라고 强要한 적도 있다고 한다.

겐지는 자끄 리베뜨 와 같은 評論家에 依해 西歐에서 먼저 再評價를 받았고 特히 張뤼크 고다르 를 비롯한 누벨바그 監督들에게 影響을 많이 준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의 '元辰 원샷' 技法은 앙드레 바쟁 과 같은 評論家들에 依해 리얼리즘의 模範이라는 評價를 받았다.

作品年譜 編輯

같이 보기 編輯

外部 링크 編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