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주왕
(文周王,?? ~
477年
9月
,
在位:
475年
9月
~
477年
9月
)은
百濟
의 第22代 國王이다. 문주(汶洲), 門冤枉(文園王), 門연왕(文淵王) 또는 門연왕(汶淵王)이라고도 하며
개로왕
의 아들이다.
日本書紀
유랴쿠機(雄略紀)에는 蓋鹵王의 모제(母弟, 동생)로 記錄되어 있다. 이름은
南齊書
(南齊書) 백제전과, 梁書(梁書)에서는 茅島(牟都)로 記錄되어있고,
宋書
(宋書) 백제전에는 與도(餘都)로 記錄되었다. 卽位 前에, 父王(父王)
개로왕
을 도와
上佐平
(上佐平)을 지냈다.
[1]
《
三國史記
》와 《
三國遺事
》에는
개로왕
의 아들이라 하나,
日本
側 記錄에는
개로왕
의 동생 說과 蓋鹵王의 아들 說이 있다.
生年月日과 出生地는 未詳이며, 《
三國史記
》와 《
三國遺事
》에 依하면 그의 이름은 門柱이다. 그런데 中國 南北朝時代 南朝의 司書인 良書에는 그의 이름이 茅島(牟都)로 記錄되어있고, 南朝의 다른 司書인 宋書 백제전에는 與도(餘都)라 한다.
《
三國史記
》와 《
三國遺事
》에 依하면 文周王은 蓋鹵王의 아들이라 한다. 그런데
日本
側 記錄에는 두 가지 說이 있다. 日本書紀의 柳라쿠兆에 依하면 文周王은 蓋鹵王의 동생이라 한다. 誤오치氏와 토요타氏 族譜에는 文周王의 別稱인 門冤枉은 蓋鹵王의 아들로 나타난다.
中國
側 記錄인 《
良書
》 백제전에는 文周王은 蓋鹵王의 아들이라 한다. 그의 어머니와 그의 出生에 對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文周王의 性格은 《
三國史記
》에 依하면, 決斷力이 不足하였으나 百姓을 사랑하였다고 記錄되어 있다.
[2]
개로왕
의 太子가 되었으며, 卽位하기 直前에는 父王
개로왕
으로부터
上佐平
에 任命되어 政事에 參與하였다.
475年
高句麗
가 軍士를 일으켜
漢城
을 攻擊하자 門柱는 蓋鹵王의 命을 받아서
新羅
에 가서 援兵을 要請하였다. 軍士 1萬名과 함께 돌아와 高句麗의 軍隊가 물러갔으나, 首都 漢城이 破壞되었다. 一說에는
개로왕
이 自身의 죽음을 豫見하고 문주왕을 避身시킨 것이라는 說도 있다. 蓋鹵王이 죽자 뒤를 이어 卽位하였다.
475年
陰曆 10月, 首都를
漢城
에서
熊進
으로 옮겼다.
476年
여름 4月,
耽羅國
에서 土産物을 바쳐오자 王이 기뻐하여, 그 耽羅國 使臣을 報答으로 恩率(恩率)
[3]
로 임명하였다. 耽羅王에게 백제의 높은 벼슬인 佐平(佐平)
[4]
으로 임명하였다.
文周王은
477年
4月
아들 蔘根을 太子로 삼았는데, 9月에 當時 政權을 掌握했던
兵權佐平
海口
의 쿠데타에 依해 暗殺을 當했다. 海口의 쿠데타 理由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뒤는 王族들의 推戴를 받은 아들
삼근왕
이 繼承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