壬辰倭亂
初期에 벌어진
龍仁 戰鬪
에서 5萬 名의 남도근王軍이 潰滅당한 後
龍仁 戰鬪
參戰 長壽 中 唯一하게 被害를 입지 않았던
權慄
은
理致 戰鬪
에서 勝利한 後 壬辰年 末頃에 麾下 長壽
선거이
, 梳毛絲
변이중
, 조방장
造景
, 義兵將
임희진
과
변사정
, 僧兵長
처영
과 1萬 名의 軍士들을 이끌고 北上한다.
權慄
은
龍仁 戰鬪
의 前轍을 밟지 않기 爲해
水原
의
독성산성
으로 들어갔다. 當時
漢陽
에는 6萬 名의 日本軍이 駐屯하고 있었는데 漢陽 駐屯 日本軍 總司令官이자 第8陣
우키타 히데이에
는
權慄
이
독성산성
에 있으면
漢陽
의 後方 連絡網과 普及 推進로의 어려움을 겪게 될 것으로 豫想해 2萬 名의 軍士를 뽑아
水原
에서
烏山
,
貫穿
,
龍仁
等地로 들어가는 길을 遮斷하고 攻擊을 開始했다.
독성산성
이 攻擊을 받자 朝鮮軍은 少數 兵力을 打擊兆로 編成해 運用하고 隨時로 夜襲을 敢行함으로써 日本軍을 攪亂했다. 이에 日本軍은 城 안으로 가는 물줄기를 막아
독성산성
을 고립시키려 했다. 그러나 朝鮮軍이 堤防을 막고 있던 日本軍을 夜間에 奇襲하여 斷水를 遮斷했다. 그리고
全羅道
道士
최철견
이 義兵을 募集해
權慄
을 救援하기 위해 오자 日本軍은 戰意를 喪失하고 酸性에서 撤收했다. 이로써
京畿道
一部가 收復되었고
明나라
援軍이 오고 곳곳에서 義兵이 일어나는 가운데
1593年
이 가까워 갔다.
독성산성의 食水가 不足하다는 것을 알게 된 倭軍은 持久戰(持久戰)을 펼치려 하였지만, 權慄은 敵이 보는 앞에서 말을 씻기며 倭軍을 嘲弄하였다. 이를 본 倭軍은 食水가 아직 있다고 誤認하여 退却하였다. 그러나 이때 말을 씻긴 것은 물이 아니라 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