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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砲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大砲

火藥의 爆發力을 利用해 砲彈을 發射하는 兵器의 總稱

大砲 (大砲, 英語 : artillery ) 또는 火砲 (火砲)는 火藥 의 爆發力을 利用해 砲彈을 發射하는 兵器의 總稱이었지만 現在의 大砲는 口徑 20mm 以上의 火藥式 發射 兵器를 가리킨다. 또한 大砲는 照準 이 아닌 彈着點 計算을 통해 射擊을 한다.

19世紀 말에 쓰인 프랑스 海軍의 大砲.

大砲는 12世紀 初盤에 대나무 大砲가 登場하였고, 金屬을 基盤으로 最初로 開發된 形態의 大砲는(유럽에서는 1340年頃에 最初 實戰 使用) 缸아리에 火藥을 채우고 그 위에 돌을 덮은 後 날려 보내는 式의 구포( 迫擊砲 )였으며, 以後 發射 거리를 늘리기 위해 砲身 을 늘이게 되었다. 처음에는 '社席砲' 라 불리는 쇠막대기를 連結하여 鎔接한 形態의 大砲가 使用되었지만 16世紀 以後 주조 方式으로 大砲가 生産되었다. 하지만 이 方法은 完全히 똑같은 鑄物틀을 만들 수가 없어 大砲마다 安定性과 性質이 제各各이였고, 무게도 더 무거웠고 砲彈의 速度 亦是 느렸다. 펠리페 2歲 의 初期 痛治期에 純眞한 發明家인 발타사르 데 리오스는 各 部分을 分解해서 數百名의 軍人들이 등에 짊어지고 移動할 수 있는 口徑이 큰 大砲를 發明하여 提示했지만 採擇되지 않았다. [1]

그러나 18世紀 後半 프랑스에서 大砲의 砲身을 깎아 浦口를 만드는 方法(大砲 穿孔機)李 開發되면서 어떤 大砲이든지 安定性과 性質이 똑같게 되었고 또한 砲身의 두께를 얇게 만들어도 安定性에 影響을 주지 않게 되며 따라서 大砲의 무게도 더 가벼워졌다. 또한, 유극(포강과 砲身 사이의 間隔)이 줄어들면서 爆發 가스의 流出이 줄어들어 砲彈의 速度가 더욱 빨라졌다.

그러나 前近代의 大砲는 大部分 必然的으로 前裝式 大砲日 수밖에 없었다. 또한 脯를 얹어두는 砲架의 境遇도 포의 發射反動을 제대로 吸收할 수 없었으므로 大型의 大砲는 製作하기 어려웠다. 砲術 또한 어려운 技術 中의 하나로, 力學 의 發展을 통한 抛物線 運動 에 對한 理解와 均一한 發射裝藥의 製作法이 나오기 前까지는 砲를 명중시킨다는 것이 대단히 어려웠다.

以後 金屬 加工 技術의 發展 및 優秀한 砲架가 出現하면서, 後裝飾 大砲가 出現한다. 따라서 大口徑 野砲의 量産이 可能해졌으며, 砲兵 敎理의 發展으로 現在와 같은 曲射砲 中心의 砲兵隊가 出現하게 된다.

現在는 포의 自主化( 自走砲 )와 場 丘警長 砲身의 採用으로 빠른 진지 間 移動이 可能하며 長距離 速射가 可能한 砲兵旅團級 部隊가 主로 運營된다. 舊 蘇聯式 敎理를 採用하는 國家에서는 砲兵群團級의 集團 砲兵度 運用되고 있다.

어원 編輯

artillery란 單語는 中世時代 에서 由來한다. 一說에서는 'to arrange'를 뜻하는 古代 프랑스語 atelier , 'equipment'를 意味하는 attilement 에서 由來했다고 한다. 13世紀 以後 武器 開發者 사이에서 artillier 란 單語가 言及되었다. 以後 250年 동안 artillery란 名稱이 모든 形態의 武器(all forms of military weapons)에 本格的으로 使用되었다.

種類 編輯

같이 보기 編輯

各州 編輯

  1. 페르낭 브로델 (1995). 〈第6張 技術의 普及: 革命과 遲滯〉. 《物質文明과 資本主義Ⅰ-2 日常生活의 救助 下》. 주경철 옮김. 서울: 까치. 621, 870쪽. ISBN  89-7291-084-8 . 펠리페 2世의 初期 痛治期에 純眞한 發明家인 발타사르 데 리오스는 各 部分을 分解해서 數百名의 軍人들이 등에 짊어지고 移動할 수 있는 口徑이 큰 大砲를 發明하여 提示했지만 採擇되지 않았다. 118) … 118)Arch. Simancas, E° Flandes, 559.  

外部 링크 編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