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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프리드리히 니체

獨逸의 哲學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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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獨逸語 : Friedrich Wilhelm Nietzsche , 1844年 10月 15日 ~ 1900年 8月 25日 )는 獨逸의 哲學者 [1] 이다. 西歐의 傳統을 깨고 새로운 價値를 세우고자 했기 때문에 '망치를 든 哲學者'라는 別名이 있다. 그는 그리스도교 道德과 合理主義 의 起源을 밝히려는 作業에 邁進하였고, 理性的인 것들은 實際로는 非理性과 狂氣로부터 祈願했다고 主張했다. 實際로 그는 안티크리스트에서 유대人들이 그들의 妄想으로 道德이나 宗敎, 文化, 歷史 等을 復舊가 不可能할 程度로 歪曲했다고 말했다. 이는 유대人 嫌惡의 根據가 되기도 했는데, 니체에 依하면 유대人은 世界의 外面은 勿論 內面도 包含해 모든 것을 사기날조로 顚覆하는 運命的 民族이자 奴隸 或은 略字로서 重要性이 있으며 貴族 같은 精神을 가진 高貴한 者들의 眞正한 敵이다. 그러나 니체는 强者의 立場을 讚揚하면서도 때때로 弱者의 道德 等을 稱頌하기도 해서 矛盾도 있다. 觀念論 基督敎 는, 世界를 두 個로 區分짓는다. 이를테면 基督敎는 이승 以外에도 하늘나라 가 있다고 가르친다. 또한 플라톤 은 世界를 現象界와 이데아界 로 二分한다. 니체는 이러한 區分에 反對하며 '大地에서의 삶을 사랑할 것'을 主唱하였다. 또한 現實에서의 삶을 誹謗하는 者들을 가리켜 頹落한 人間 [2] 이라 부르며 批判하였다. 이렇듯, '永遠한 世界'나 '絶對的 價値'를 認定하지 않는다는 點에서 니체는 觀念論的 形而上學 에 反對한다. 니체는 基督敎 信者들이 예수의 가르침과 달리, 안 믿으면 地獄 간다는 滅亡적 敎理만을 傳했다며 基督敎를 批判했다 [3]

프리드리히 니체
學者 情報
出生
Rocken
死亡
바이마르
學歷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大學校 (1864 - 1865)
라이프치히 大學校 (1865 - 1879)
Domgymnasium Naumburg (1854 - )
Landesschule Pforta (1858 - )
宗敎 無神論
父母 Carl Ludwig Nietzsche (簿)
署名

니체는 全體主義 , 民族主義 , 國家主義 , 反유대主義 等을 批判했다. 그러나 그의 思想이 파시스트 들에게 歪曲되기도 했다. 眞理의 價値를 묻는 그의 質問은 解釋上의 問題를 提起했다.

生涯 編輯

出生과 學業 (1844 ? 1868) 編輯

 
니체 1861年 모습

出生 編輯

니체는 1844年 10月 15日 예전의 프로이센 ( 獨逸 )의 작센 地方의 작은 마을인 罍켄(Rocken)에서 루터교 牧師 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프러시아의 王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歲 에게서 빌려온 것으로, 빌헬름 4世는 니체가 태어나던 날에 나이가 49歲를 넘어있었다(니체는 後날 그의 이름에서 가운데에 있던 "빌헬름"을 빼 버렸다. [4] ) 니체의 아버지인 카를 빌헬름 루트비히 니체(1813-1849)는 루터敎會 牧師이자 前職 敎師이었고, 프란치스카 욀러(1826~1897)와 1843年 에 結婚하였다. 그의 女同生인 엘리자베스 니체는 1846年 에 태어났고, 뒤를 이어 男동생인 루드비히 요셉이 1848年 에 태어났다. 니체의 아버지는 腦 疾患으로 1849年 에 世上을 떠났다. 그의 어린 男동생은 1850年 에 죽었다. 그 後 家族은 나움부르크로 移徙를 갔고, 그곳에서 니체의 할머니와 어머니 프란치스카, 아버지의 結婚하지 않은 두 姊妹, 두 下女들과 함께 살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니체의 할머니가 1856年 에 世上을 下直하자, 家族은 그들의 집으로 移徙했다.

學校 編輯

1851年 니체는 少年學校에 出席했고 그 다음에는 그가 구스타브 크루크와 빌헬름 핀터와 親舊가 되었던 곳인 私立學校에 다녔다. 두 親舊는 모두 名望있는 家門 出身이었다. 1854年 그는 나움부르크에 있는 돔 김나지움 에 다니기 始作했으나, 그의 特出한 才能은 音樂 言語 에서 發揮되기 始作했다. 그 後 國際的으로 有名한 슐포르타에 同僚들처럼 入學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그의 學業을 1858年 부터 1864年 까지 繼續했다. 그는 파울 도이쎈, 칼 폰 게르도르프와 親舊가 되었다. 또한 그는 詩를 짓고 音樂을 作曲하는 데 時間을 들였다. 슐포르타에서 니체는 特히 古代 그리스 로마에 對해 배웠다. 그 동안에 그는 살면서 처음으로, 조그만 시골 마을의 基督敎的인 環境에서 이루어지는 家族의 삶으로부터 距離를 둘 수 있었다.

1864年 卒業을 한 後에 니체는 神學 과 古代 哲學을 본 大學에서 工夫하기 始作했다. 짧은 期間 동안, 그는 도이쎈과 함께 大學生 學友會(Burschenschaft Frankonia)의 構成員이 되었다. 한 學期 後에 어머니의 憤怒에도 不拘하고 그는 神學 工夫를 中斷했고, 信仰도 喪失하였다. [5] 그것은 아마도 1835~1836年에 다비드 슈트라우스 가 쓴 《예수의 生涯》( Das Leben Jesus )란 冊에서 그가 擔當한 部分을 읽어나가던 中에, 冊의 內容이 젊은 니체에게 깊은 影響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6]

哲學工夫와 軍服務 編輯

1865年 에 니체는 쇼펜하우어 의 글들을 알게 되었고, 그는 1866年 프리드리히 알베르트 랑게의 冊, 《唯物論의 歷史와 그 顯在的 意味에 對한 批判》( Geschichte des Materialismus und Kritik seiner Bedeutung in der Gegenwart )을 읽었다. 그는 두 사람의 著書 모두와 刺戟的인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의 著書는 니체가 그의 地平을, 哲學을 넘어서는 領域까지 擴張하도록 激勵했으며, 그의 學業을 持續하게 하는 刺戟劑가 되었다. 1867年 니체는 軍에 自願하여, 1867年 10月 軍에 入隊하였다. 그는 哲學科 軍服務에 對해 苦悶하고 있던 途中, 한 꿈을 꾸게 된다. 內容은 어떤 詩集을 읽었다는 것인데,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것을 記憶해내 戰爭과 싸움을 잊고 學問에 邁進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어 哲學工夫에 邁進하게 된다. 그는 나움부르크에서 프로이센 砲兵으로 한 해 동안 服務하였다. [7] 그러나 1868年 3月에 그는 말을 타다가 事故를 當해서, 가슴을 甚하게 다쳐 後送되었으나 軍服務를 持續할 수 없었다. 그는 軍服務를 5年 以上 하였고, 높은 職位에도 올랐었다. [8]

라이프치히 大學 編輯

니체는 長期間의 病暇를 받고, 다시 學業에 關心을 둘 수 있었다. 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리츨 敎授 밑에서 哲學을 工夫하는 데 集中하였고, 1865年 10月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 大學으로 옮겼다. 거기서 그는 에르빈 로데와 親舊가 되었다. 이 무렵 니체의 첫 哲學 著書의 出版이 곧 이루어지게 된다.

바젤 大學校에서의 敎授 生活 (1869?1879) 編輯

 
1869年 모습

바젤大學校 古典文獻學 敎授 編輯

24살에 리츨의 도움으로, 스위스 바젤 大學校 의 古典文獻學 敎授에 就任하였다. 바젤 大學校에 들어선 以後, 그는 프로이센 의 國籍을 抛棄했으며, 죽는 瞬間까지도 公式的인 市民權이 없었다고 한다. [9] 하지만 그는 1870年 에서 1871年 까지 프랑스-프로이센 戰爭 에서 軍醫官 으로 活動했는데, 발터 카우프만 은 그가 軍醫官 活動 當時 梅毒 에 關心이 많았다고 한다. [ 出處 必要 ] . 다시 바젤 大學校로 돌아오면서 그는 獨逸帝國 의 成立과 비스마르크 의 登場을 보았다.

 
1871年 니체와 親舊들-에르빈 로데, 칼 폰 게르도르프, 니체

講演 編輯

그는 大學校에서 就任 講義로 “ 호메로스 와 古典文獻學”(Homer und die klassische Philologie) 을 演說했다. 그는 神學과 敎授인 프란츠 오버베크 와 어울렸으며, 그와 平生동안 親舊로 지냈다. 當時 러시아 哲學者였던 아프리칸 스피르 , [10] 니체가 자주 講義를 들었던 同僚 歷史學者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等도 니체에게 重要한 影響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한便으로 그는 여러 講演會에 演士로 다니며 講演活動을 하기도 했다.

바그너와의 만남과 訣別 編輯

니체는 이미 1868年 부터 音樂家 리하르트 바그너 와 만나기 始作했었는데, 그의 夫人과 그에게 매우 感歎하곤 했다. 또한 바젤에 있을 當時 바그너는 니체와 매우 緊密한 關係에 있었으며, 바이로이트 祝祭 劇場 에 招待하기도 했다. 以後 바그너의 뛰어난 弟子의 한사람으로도 認定받았지만, 바그너가 漸次 基督敎 化되고 〈파르지팔 Parsifal〉에서처럼 基督敎 敵人 道德主義 모티브를 많이 利用하고, 國粹主義와 反유대主義에 빠지자 그와 訣別했다.

博士學位 編輯

1869年 라이프치히 大學校에서 試驗과 論文없이 出版된 著述들만으로 博士學位를 받았다. 니체는 1872年 에 《 悲劇의 誕生 》을 썼다. 하지만 리츨과 같은 니체의 同僚들은 이 冊에 對해 別로 熱情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著述 編輯

1873年 1876年 사이에는 《反時代的 考察》을 썼는데, 總 4篇으로 《다비드 슈트라우스, 告白者와 著述家》, 《삶에 對한 歷史의 功過》, 《敎育者로서의 쇼펜하우어》,《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로 나뉜다. 네 篇의 에세이는 쇼펜하우어 바그너 가 主張하는 대로, 獨逸 文化의 發展 路線에 挑戰하는 文化 批評의 方向을 共有하고 있다. 1873年 이 始作할 무렵, 니체는 또한 古代 그리스 悲劇에 나타난 哲學 같이 死後에 出刊된 記錄을 漸次로 모으고 있었다. 이 時期 동안 바그너와 그의 同僚들 사이에서, 니체는 말碑다 폰 메이센부르크와 한스 폰 뷔로우를 만났고, 1876年에 그에게 影響을 주어 그의 初期 著作解消시킨, 파울 리와 友情을 나누었다. 그러나 그는 1876年에 바이로이트 祝祭에서 陳腐한 公演과 大衆의 淺薄함에 嫌惡感을 느끼고 失望했기 때문에, 結局에는 바그너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1878年 니체는 그 特有의 警句가 가득한 《人間的인, 너무나 人間的인》을 出版하였다. 또한 니체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哲學에서 離脫하기 始作했다. 또한 이즈음에 婚姻을 하려 애쓰기도 했다. 1879年 , 健康이 더욱 惡化되면서 니체는 바젤 大學校의 敎授職을 辭任했다. 事實 그는 어릴 적부터 病치레가 잦았는데, 가끔 頭痛이나 腹痛을 겪기도 했다. 1868年 에 落馬事故와, 1870年 에 걸린 病 때문에 니체의 健康이 더욱 惡化된 것으로 보이며, 實際 바젤 大學校에서 休暇를 많이 갖기도 했다.

退職 編輯

1879年 以後 健康上의 惡化와 自由로운 哲學의 正立을 위해 35歲에 바젤大學校를 退職하고,조용히 山 속으로 들어가 療養과 執筆에 專念했다.

獨立 哲學者 生活 (1879?1888)과 죽음 編輯

35歲에 바젤 大學校에서 退職한 以後 그는 講演도 그만두고, 병든 몸이 適應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유럽 各地 [11] 를 돌아다니면서 執筆生活에 沒頭하였다. 1881年 , 프랑스 튀니지 를 占領했을 때, 튀니지로 旅行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이내 그 計劃을 접고 만다.(건강에 對한 問題로 旅行을 取消한 것으로 보인다.) [12] 1889年 1月 이탈리아 토리노 에서 卒倒한 後 精神病院에 入院하여 生涯의 마지막 10年을 보냈다. 니체는 精神病 發作을 일으킨 後 完全히 精神 喪失者가 되었고, 이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예나에서 居住했다. 어머니가 죽자 누이同生 엘리자베트가 니체를 바이마르 로 옮겼고, 니체는 1900年 8月 25日 바이마르에서 죽었다. 니체가 죽자 엘리자베트는 故鄕 罍켄의 아버지 墓 옆에 니체를 安葬했다. [13]

니체 精神病의 原因 編輯

니체는 末年에 精神的인 崩壞를 겪고 10年 동안 제精神을 回復하지 못한 채 살다가 죽었다. 그의 精神 錯亂이 梅毒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뜬所聞에 不過하다. 니체가 梅毒에 걸렸다는 설을 反駁하는 文書들은 다음과 같다.

史上 編輯

 
프리드리히 니체 (맨 오른쪽) 맨 왼쪽의 女子는 살로메

頹廢性 批判 編輯

그는 旣存의 道德的 世界觀이 삶을 옥죄고 있다고 認識했다.

모든 時代의 賢者들은 삶에 對해 같은 結論을 내렸다: 삶이란 意味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14]

??《偶像의 黃昏》

Weder Manu, noch Plato, noch Confucius, noch die judischen und christlichen Lehrer haben je an ihrem Recht zur Luge gezweifelt. [15] 마누, 플라톤, 孔子, 유대敎 敎師들과 基督敎 敎師들. 이들은 거짓을 지껄이면서도 그것이 自身의 權利임을 믿어 疑心치 않았다.

??《偶像의 黃昏》

그에 基督敎와 佛敎를 包含한 從來의 道德的 思想들을 데카당(頹廢的인 것)이라 稱하며 批判한다.


플라톤 硏究者이기도 한 니체는, [16] 基督敎에 對해 다음과 같은 評價를 내린다.

denn Christenthum ist Platonismus fur’s ?Volk“ [17] "基督敎는 大衆을 위한 플라톤 思想에 不過하다."

??《善惡의 저便》西門.

一元論 (生氣 存在論) 編輯

權力意志를 中心으로 하는 니체의 一元論은 近代 哲學의 二元論과 配置되며 主體와 對象으로 區分되는 데카르트의 二元論에서 脫皮하였다. 니체는 眞理라는 것은 없으며 但只 眞理를 追求하는 힘만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以上 世界는 虛構이며 오직 現象 世界만이 存在하고, 結果가 없이 언제나 過程으로만 남아 있다고 한다. 그는 理性의 哲學이 아닌 半理性의 哲學, 實體의 哲學이 아닌 關係의 哲學, 政敵인 哲學이 아닌 動的인 哲學, 啓蒙의 哲學이 아닌 虛無의 哲學을 主張하였다. [18]

神은 죽었다 編輯

神의 죽음 이란, 人間이 만들어낸 最高價値의 喪失을 의미한다. '神의 죽음'이란, 宗敎 或은 理想主義 等의 信仰이 喪失된 狀態를 가리키는 表現이다. 달리말해, "神의 죽음이란 虛無主義 의 到來를 가리키는 表現이다". 最高價値의 喪失과 虛無主義의 出現은 다음과 같은 質問을 낳는다. "삶의 最高價値가 喪失된 狀態에서 個人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안티크리스트》에서, 니체는 基督敎 佛敎 를 批判的으로 檢討한다. 그 冊에서 니체는 一見 佛敎에 對해 好評을 내리지만 이내 基督敎와 佛敎 兩者를 頹廢的인( 데카당트 ) 宗敎로 규정짓는다. 그에 따르면 基督敎는 道德에서의 奴隸叛亂 [19] 이며, 佛敎는 삶에 지친 老人들을 위한 宗敎이다.

《善惡의 저便》에서, 니체는 自身을 '哲學者 디오니소스의 弟子'로 紹介한다.

나는 디오니소스 神의 마지막 弟子이자 精通한 者이다?: 나는 期於이 한 番쯤 내 親舊인 그대들에게, 나에게 許諾하는 限, 이 哲學을 조금은 맛보게 하는 일을 始作해도 좋을 것이 아닌가?

??《善惡의 저便》 295

여기서 니체는 '디오니소스'를 '그리스 悲劇'에 對한 象徵으로 活用하고 있다. 進化論에 對한 自身의 解釋 탓인지, 니체는 '成長'이라는 槪念을 좋아했는데, 이는 그리스 悲劇 精神에 對한 그의 理解에서도 드러난다. 니체에게서 그리스 悲劇 精神이란, 니힐리즘을 根本으로 하는 苦痛을 힘意志로 승화시키는 態度이다.

"나를 理解했는가? 디오니소스 vs 十字架에 매달린 者." [20]

??《이 사람을 보라》 末尾.

니체는 脫亞의 道德 [21] 을 뛰어넘는 人間을 構想하고 있었다. 이를 위버멘쉬 [22] 라 부를 수 있다. 위버멘쉬는 또한 從來의 安逸한 人間 [23] [24] 을 뛰어넘은 人間類型이다. 이렇게 보면 위버멘쉬는 從來의 性(聖)과 속(俗)을 뛰어넘는 人間이다.

虛無主義 編輯

니체는 《유고》에서 虛無主義 (Nihilismus)에 對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虛無主義: 目標價 缺如되어 있으며?: '왜?'라는 물음에 對한 對答이 缺如되어 있다. 虛無主義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最高 價値들이 脫價値化하는 것.

??1887年 《유고》

虛無主義는 病理的 中間 狀態를 表現한다(병리적이란 全혀 아무런 意味도 없다고 결론짓는 끔찍한 一般化를 말한다)

??1887年 《유고》

니체가 말하는 虛無主義는 두 가지로 區分된다.

  • 能動的 虛無主義 (Der active Nihilismus)
  • 受動的 虛無主義 (Der passive Nihilismus)

'受動的 虛無主義'란 厭世主義라고 생각하면 쉽다. 虛無感에 사로잡힌 狀態를 뜻한다. 달리말해, '虛無하다', '無意味하다', '無價値하다' '없다(니힐하다)'는 느낌에 사로잡힌 狀態를 의미한다. 이러한 狀態의 人間은 結果的으로 人生의 意味를 잃고 享樂主義나 物質主義에 빠져들게 될 公算이 크다.

外部에서 神으로부터 주어진 意味가 없기에 無意味하다는 것이다. 주어진 意味를 찾기에 受動的이다.

다음으로, '能動的 虛無主義'란 '없다는 느낌(=無意味하다는 느낌 = 無價値하다는 느낌 = 니힐하다 = 虛無主義)'에서 더 나아가 外部로부터 주어진 意味를 찾기보다 스스로 意味를 創造해가려는 態度를 의미한다. 簡單히 말해, (意味가) 없으면 만든다는 式이다.

짧게 말해, (유럽에서) 價値와 規範과 意味를 提供해주던 一切가 - 그걸 神이라고 불러도 좋고,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나 칸트라고 불러도 좋다 - 그 確實性을 잃게 되었기에 虛無主義(無意味하다는 느낌)李 到來했다는 것인데, 이에 對해 反應하는 方式의 差異인 것이다.

위버멘쉬 (Ubermensch) 編輯

위버멘쉬 는 語源的으로 '뛰어넘는(Uber) 人間(mensch)'을 뜻한다. 다시 말해 克服하는 人間이며, 克服함으로써 創造하는 人間이다.

새겨두어라 兄弟들이여. 評價하는 것이야말로 創造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世界가 생겨난 以來로 只今껏, 스스로에 對한 批評을 許容하는 權威는 存在하지 않았다.

??《아침놀 序文》

위버멘쉬는 近代的 價値와 道德 및 信仰을 뛰어넘는 人間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從來의 規範들은 人間에게 害로운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25] 道德的인 側面에서, 위버멘쉬는 脫亞의 道德을 克服해내는 人間이다. 이를테면 克己復禮 或은 殉敎者 槪念을 克服해내는 人間이며, 그럼으로서 創造해내는 人間이다. 위버멘쉬 槪念은 '風習의 道德'과 對立될 뿐 아니라, '人間末種(Der letzte Mensch)'過度 對立되는 槪念이다. '人間末種(Der letzte Mensch)'이란 現實에 安住하는 人間型 或은 權力慾에 물든 人間을 가리킨다.

이 원숭이들을 보라. 이들은 權力을 願하며, 무엇보다도 權力의 지렛대人 돈을 願한다. 이들 모두는 높은 權座를 願한다. 그러나 權座 위에는 똥이 있는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偶像에 對하여'

위버멘쉬는 超越的,神的인 힘을 갖춘 存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從來의 탈兒的 價値를 克服하고 새 것을 生成시키는 人間을 의미한다.

힘에의 意志 (Wille zur Macht) 編輯

니체 哲學에서 힘에의 意志란 自己 保存 本能과 對立되는 槪念이다. 다시 말해 쇼펜하우어 가 主唱한 生에의 意志 라는 槪念과 對立되는 槪念. 찰스 다윈 이 主張한 生存 競爭 이라는 槪念過度 對立된다.

니체는 '生存하는 것'李 삶의 目的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Was den beruhmten Kampf ums Leben“ betrifft, so scheint er mir einstweilen mehr behauptet als bewiesen. [26] 그 有名한 生存競爭에 對해 말하자면, 그것은 내게 證明이라기보다 主張으로 보인다.

??《偶像의 黃昏》, 안티 다윈.

Das Genie ? in Werk, in Tat ? ist notwendig ein Verschwender: dass es sich ausgibt, ist seine Grosse… Der Instinkt der Selbsterhaltung ist gleichsam ausgehangt; der ubergewaltige Druck der ausstromenden Krafte verbietet ihm jede solche Obhut und Vorsicht. [27]

天才는 ? 作業이나 業績에서 ? 必然的으로 浪費하는 者이다?; 全力을 다한다는 것. 이것이 그의 偉大함이다......

말하자면 自己 保存 本能이 풀어져 있다; 發散되는 힘의 壓倒的인 壓力이 그에게 그러한 保護와 신중함을 禁한다.

??《偶像의 黃昏》, 나의 天才 槪念

道德批評 編輯

善과 惡에 對해 考察하는 것은 恒常 너무나 危險한 일이었다.

良心, 좋은 評判, 地獄, 境遇에 따라서는 警察 亦是 率直함을 許容하지 않았고 只今도 許容하지 않고 있다. (中略) 世界가 생겨난 以來, 自身을 批判의 對象으로 만드는 權威는 只今껏 存在하지 않았다.

그런데 더구나 道德을 批判한다는 것, 道德을 問題로 삼고 疑問視한다는 것은 非道德的인 일이 아니었을까?

??《아침놀》, 序文 3番글.

니체 哲學에서 道德의 種類는 다음과 같다.

  • 잘 알려진 것은 '奴隸道德'과 '主人道德'의 分類이다.
  • 比較的 덜 알려진 命名法들: 風習의 道德, 脫亞의 道德, 自己犧牲의 道德, 憐憫의 道德 [28]
  • 니체의 道德批評은 '社會學的/政治學的' 側面보다는 主로 心理學的/價値論的 側面에서 進行된다.

니체는 《道德의 系譜》에서 道德的 槪念의 族譜를 다루며, 道德과 그 部隊槪念들이 歷史 안에서 어떻게 形成되어 온 것인지를 記述한다.

  • 主人道德은 自己肯定에서 비롯된 價値評價를 反映한다. [29]
  • 奴隸道德은 抑壓받는 人間의 怨念(怨念)에서 發源한다. 卽 奴隸道德은 怨恨道德이다.

主人道德은 좋음과 나쁨을 [30] 가려 물으며 이를 價値評價의 잣대로 삼는다. 奴隸道德은 形而上學的 意味의 善과 惡을 價値評價의 基準으로 想定한다. 다시 말해, 主人道德은 個人의 好惡(好惡)를 基準으로 하고, 奴隸道德은 社會的 善惡(善惡)을 基準으로 한다. 主人에게 '좋음'이란, 自身과 他者를 高揚시키는 것이다. 主人에게 '나쁨'이란, 懦弱하게 만드는 것이다. [31]

奴隸道德은 主人道德과 對立된다. 主人은 自身을 基準으로 '先'을 上程하지만, 奴隸는 먼저 '악'을 떠올린다. 奴隸道德에서는 '主人에게 復讐하지 못하는 無力感'李, '自發的 容恕'로 遁甲한다. 奴隸道德에서는 奴隸가 느끼는 無力感이 美德으로 僞裝한다. 主人의 美德이 弱者의 눈에는 惡德으로 비쳐진다.

道德에 對한 니체의 立場을 알기 위해서는, 《道德의 系譜》 以外에도 니체가 쓴 《아침놀》이나 플라톤 이 쓴 《고르기아스》를 읽어보면 도움이 된다. 《아침놀》에서 니체는 '慣習의 道德'이라는 槪念을 擧論하며 이를 批判한다. [32] 《고르기아스》를 읽다보면 中間 즈음부터 칼리클레스가 登場하여 自然과 規範에 [33] 對해 이야기한다. 이 冊에서 칼리클레스는 '規範'李 弱者 牌거리의 發明品이라고 主張하며, 規範이란 少數에 不過한 强者를 抑壓하는 道具로 作用한다고 말한다. 니체의 立場은 칼리클레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보인다. [34]

니체 倫理學에서 指稱하는 '主人' 或은 '强者'라는 槪念은 資本을 基盤으로 하는 階級과는 아무런 關聯이 없다. 오히려 그는 商人階級을 [35] 批判하며 다음과 같이 記錄했다.

Seht mir doch diese Uberflussigen! Reichtumer erwerben sie und werden armer damit. Macht wollen sie und zuerst das Brecheisen der Macht, viel Geld ? diese Unvermogenden!" [36] 이 剩餘人間들을 봐라! 그들은 財産을 願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가난해지고 있다. 그들은 權力을 願하며 무엇보다도 權力의 지렛대人 돈을 願한다. 이 無能力한 者들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編輯

" 永遠 回歸 " 思想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의 根本 思想이다. 이 思想은 1881年 실스마리아에서 니체를 壓倒的인 靈感으로 덮친 思想이다. 이것은 到達 可能한 最高의 肯定 形式이다.

美學 理論 編輯

悲劇의 誕生 編輯

니체 美學의 古代的 발板. 音樂 精神에서 태어난 悲劇의 誕生의 決定的 새로움은 한 便으로는 그리스 人들에게서 發見되는 "디오니소스的 現象"에 對한 理解이고, 다른 한 便으로는 "소크라테스主義"에 對한 새로운 接近이었다. 이 冊에서 무엇보다도 "디오니소스的인 것"을 通한 "悲劇의 誕生"과 "소크라테스的인 것"을 通한 "悲劇의 죽음"에 니체의 마음이 쏠렸다. 니체에게 소크라테스는 基督敎 宗敎의 豫備者를 具現하고 있었으며, 그에 反해서 디오니소스는 "飯(反)그리스도"이고 "藝術家 神"이다. 니체는 悲劇의 誕生에서 "善惡을 넘어선" 厭世主義와 非道德的인 디오니소스 神의 "藝術-宗敎"를 通해서, 簡單하게 말해서 現存在가 藝術的 現象으로서만 正當化되어서 나타나는 "藝術家-形而上學"을 통해서 소크라테스에 依해서 具現된 現存在에 對한 道德的 解釋에 反對했다. 소크라테스는 아폴로的 明徵性과 愉快함, "知識의 빛"과 自我 認識의 人間的 具現이다. 그에 反해서 디오니소스는 "바쿠스적 騷動과 춤"의 "어두운 深淵", "사랑의 陶醉에서 생긴 自我忘却"을 代表한다. 아폴로的인 것과 디오니소스的인 것은 니체 美學의 두 가지 根本的 範疇이다. 헤라클레이토스的 意味에서 調和롭게 對立된 두 藝術 衝動의 "接合"의 結果物이 니체에게는 但只 아테네 悲劇의 誕生만이 아니라, 藝術 全體의 誕生이다. 첫 作品에서도 悲劇的-디오니소스的 狀態인 "美學的 狀態"의 特徵과 아폴로的인 것이 지닌 소크라테스主義와의 親近性은 이미 後期 니체의 著書에서 漸漸 剛하게 드러나는 아폴로的인 것에 對한 디오니소스的인 것의 優勢를 認識하도록 만든다. 그 點과 聯關된 디오니소스的 特性이 니체 美學이 지닌 獨特한 새로움이다. 그것은 對立된 槪念이고, 그것을 통해서 初期 니체는 反 古典主義的 美學의 傳令이 되고 後期 니체는 永遠 回歸의 半(反)基督敎的 藝術-宗敎의 先生님이 된다.

니체에게는 藝術 神의 典型이 된 "아폴로的 디오니소스"는 디오니소스 者그레우스이다. 그의 精神으로부터 悲劇이 誕生했다. 그는 悲劇의 誕生 속에서만이 아니라 悲劇的 後期 哲學의 核心 人物이다. 거인족에 依해서 갈가리 찢긴 디오니소스가 아폴로에 依해서 다시 맞추어지는 이야기가 들어있는 오르페우스교의 者그레우스 神話는 니체에게는 悲劇의 神祕的 가르침이다. 그는 悲劇的 神話 그 自體이다. 이런 土壤 속에서만 니체의 未來 美學이 成長하고, 젊은 니체의 藝術家-形而上學이 자라난 것은 아니다. 神들의 黃昏을 쓰는 後期 니체, 디오니소스의 最後의 弟子도 結局 이 土臺 위에 다시 서게 된다.

니체는 클레멘스 알렉산드리아누스, 크로이처와 라살을 通해서 오르페우스교 者그레우스 神話를 알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아폴로的-디오니소스的"이라는 有名한 對立 雙이 決코 니체가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는 것을 立證한다. 니체는 크로이처, 라살, 미슐레 그리고 포이어바흐 等等의 생각을 自己 것으로 消化하고 발전시킴으로써 自身의 獨自的 美學 理論을 만들어냈다. 音樂의 디오니소스的 精神에서 태어난 "悲劇의 誕生"이라는 歡迎 속에서 決定的인 것은 藝術家, 藝術 收容者 그리고 藝術 作品의 分離를 解體하는 것이다. 自然과 "人間이 和解한 祝祭를 기리는" 그리스 디오니소스 祝祭의 모습 속에는 生産者와 消費者 或은 生産者와 生産品의 分離가 들어설 자리가 더 以上 存在하지 않는다. 그리스 音樂劇의 誕生 時期에 對한 重要한 根本 經驗으로부터 藝術의 現在와 未來를 바라보면서 니체는 하나의 發展을 미리 보게 된다. 그러한 發展은 傳來의 "藝術 作品의 藝術", 卽 個人的 藝術家들의 藝術 作品으로부터 바그너가 생각한 意味에서의 "綜合藝術"인 "祝祭劇"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바그너에 對해서 漸漸 距離感을 갖게 되는 것과 同時에 最終的 段階에서 世上을 普遍的 藝術 作品으로 보는 美學的 觀察로 이끈다. 바이로이트의 "祝祭劇"에서 眞正한 綜合 藝術作品인 "世界極"李 생겨난다. 더 以上 藝術 作品은 하나의 世界가 아니다, 오히려 世界가 하나의 藝術 作品으로 觀察된다. "모든 것이 遊戱다", "모든 것이 藝術이다". "正午", 아폴로的 디오니소스가 泫泫하는 瞬間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善한 것으로 드러난다. 完璧하게 되고 美學的으로 正當化된 世界는 스스로를 孕胎하는 藝術作品으로 나타난다.

藝術로서의 힘依支 編輯

사람들이 "힘依支 [37] "라는 魔術的 公式을 解釋하고 評價하기 위해서 애를 쓴지도 이미 100年이 훨씬 더 지났다. 1901年 部分的으로는 어제도 規範的인, 世紀的인 니체 유고의 編輯 本이 權力 意志라는 題目으로 出刊되었다. 사람들은 이 冊을 오랫동안 니체의 主要 著作으로 잘못 看做했다. 오래前에 標語가 되어버린 그리고 政治的으로 잘못 解釋된 權力(爭取) 意志 理論은 實際로는 決코 實行되지 못했던 니체의 計劃을 標示한다. 그 計劃은 니체의 美學 理論에도 決定的으로 重要하다.

쇼펜하우어와는 對照的으로 니체는 自由 意志를 "破局的인 哲學者들의 考案物"로 批判하고 여러 番 "어떤 意志도 存在하지 않는다."고 되풀이해서 말한다. 다른 한 篇으로 그는 權力 意志를 "世上의 精髓", "存在의 가장 內密한 本質"로 考察한다. 그것은 權力 意志가 欲求가 없는 意志, 卽 願하는 自我가 없는 意志일 境遇에만 서로 一致한다. 니체는 權力 意志라는 생각으로 分明 "나는 願한다."라는 文章에서 스스로를 表現하는 것처럼 (힘이 넘치는 위버멘쉬)의 個人的 意志라는 생각을 뛰어넘는다. 이것은 特別히 차라투스트라의 첫 演說("세 가지 變身에 對해서")에서 분명해진다. 精神이 駱駝가 되고 난 다음에, "너는 해야만 한다."는 命令이 駱駝에게 내려진다. 精神이 獅子가 되었을 때, 獅子의 精神은 말한다. "나는 願한다."고. 하지만 窮極的으로 精神은 아이가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精神의 세 番째이고 가장 深奧한 變化이다, 그 變化 속에서 基督敎的 道德 "너는 해야만 한다."는 말 뿐만 아니라, 英雄的인 "나는 願한다."는 말도 아이의 純眞함, 創造의 遊戱 속에서 "磁氣肯定"을 얻기 위해서 克服되어야만 한다. 위버멘쉬는 "金髮의 野獸"가 아니라, 獅子의 精神과 "나는 願한다."는 것을 克服하는 人間이다, 그의 精神은 아이가 된다. 3番째 精神의 變化 後에 생기는 欲求 없는 意志를 지니고, 自我를 잊어버린 主體의 古代的 模範은 헤라클레이토스 短篇 B52에 나오는 遊戱하는 아이다. 이 短篇에서 삶의 遊戱 或은 世界-時間, 卽 아이온Aion은 遊戱하는 아이로 描寫된다.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의 遊戱하는 아이는 神의 세 番째 變化 後에 생기는 니체의 遊戱하는 아이의 先行 人物이다. 卽 그 아이는 위버멘쉬의 先行 人物인 것이다. 이 短篇과 니체가 自身의 생각 속에 再解釋한 것은 接合點으로 드러나고, 그 속에서 悲劇의 誕生을 쓴 初期 니체로부터 차라투스트라를 쓴 後期 니체로 이끌고 永遠 回歸와 權力 意志라는 두 個의 어려운 생각을 結合시키는 것을 許容하는 여러 個의 結合線이 모여 있다. 니체가 헤라클레이토스를 解釋한 것 속에 나타나는 世界-時間의 “偉大한 年도”인 아이온은 永遠 回歸가 神的 形象으로 나타난 것이다. 世界-아이인 아이온이 벌이는 世界-놀이가 지닌 이름이 權力 意志이다. 아이온의 目的 없는 遊戱 속에서는 欲求 없는 意志가 支配하며, 아이온은 權力 意志의 神的 擬人化이다. 權力 意志와 永遠 回歸는 同一한 아이온의 서로 다른 두 얼굴이다. 한 便으로는 아폴로的 디오니소스 그리고 다른 한 便으로는 제우스의 特徵들을 지니고 있는 아이온이 니체의 悲劇的 後期 哲學에서 藝術로서의 永遠 回歸와 權力 意志의 藝術家-形而上學을 主管하는 神으로 합쳐진다.

美學私的 文脈 編輯

美學 理論에서 차지하는 重要性에도 不拘하고 只今까지 거의 注目을 받지 못했던 事實, 니체가 古典 文獻 學者였다는 事實은 古代의 밑바닥에서부터 그가 辛辣하게 批判한 現代의 꼭대기로 곧장 跳躍을 하게 된 한 가지 原因일 수도 있다. 이 같은 跳躍은 特히 니체의 美學的 省察을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니체의 말을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인들로부터 먼저 우리가 直接 經驗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다. 悲劇의 誕生에서 그는 모든 藝術이 內的으로 그리스인들에게 依存되어 있는 狀態를 强調한다. 그는 藝術과 關聯된 分野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리스인들을 "우리 門下의 最高의 스승"으로 稱讚한다. 基督敎 神은 죽었고 그와 함께 形而上學도 죽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形而上學 以前의 時代에서, 卽 悲劇的 그리스인들의 時代에 있던 소크라테스 以前 哲學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니체의 哲學的 古生物學은 古代 土壤의 漸進的 再獲得, 무엇보다도 소크라테스 以前 哲學者들의 散在된 事由들을 發掘하는 것을 目標로 삼았다. 니체는 소크라테스 以前 哲學에서 그보다 앞서 살았던 헤겔처럼 單純하게 臨時的인 것을 본 것이 아니라, 니체보다 나중에 살았던 하이데거처럼 模範的인 것을 보았다. 니체의 退行은 다름 아니라 進步이다. 니체는 플라톤 以前-形而上學 以前의 哲學으로 自身이 되돌아간 것을 未來 美學으로 跳躍을 하기 위한 도움닫기로 理解를 한다("미래의 時間은 나의 것이 될 것이다"). 그는 悲劇 冊이 쓰이던 時期에 未來의 美學이 바그너의 作品 속에서 미리 具現된 것으로 보았다. 그와 反對로 그는 나중에 自身이 꿈꾸었던 悲劇의 誕生을 바그너 音樂 精神에서 태어난 死産(死産)으로 認識을 해야만 했다.

소크라테스 以前 哲學者들의 神殿을 發掘한 것과 헤라클레이토스의 悲劇的 哲學의 再生을 위한 니체의 意志는 포스트모더니즘 美學 理論의 序曲으로 看做될 수 있다. 特別히 初期 形而上學 時期의 헤라클레이토스의 洞察力에 基盤을 두고 있는 美學的 "世界-遊戱"로서의 "삶의 遊戱", 對立되는 것의 調和와 醜한 것 속에도 存在하는 美의 偏在性에 對해서 느낀 經驗을 통해서 니체는 後期形而上學的 포스트모더니즘의 偉大한 先祖가 되었다. 그것으로써 니체가 同時的으로 보여주는 소크라테스 以前과 以後의 特徵Nachvorsokratismus은 同時에 存在하는 모더니즘 以前과 以後의 特徵Vorpostmodernismus이기도 하다.

評價 編輯

生前에는 學界로부터 徹底히 無視當했다. 宗敎界 道德主義 者들로부터 酷毒한 批判을 받았으며 社會를 타락시킨다는 惡意性 誹謗과 陰害에 시달렸으나, 死後 유럽의 哲學과 文學에 至大한 影響을 미쳤다. 現在에는 19世紀 最高의 哲學者 가운데 한 名으로 看做된다.

니체의 思想은 그 顚覆的 性向으로 인해 자주 誤解되고 批判받았다. 이런 니체 의 性向은 온갖 權威에 不服했던 쇼펜하우어 의 影響을 받아서 形成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니체에 對한 評은 極으로 갈릴 때가 많다. 그에 對한 評價는 宗敎人들에게서는 酷評으로, 포스트 모던 哲學者들에게서는 好評으로 나타나는 便이다. 하지만 確實한 것은 그가 現代 哲學史(特히 포스트모더니즘 )에 끼친 影響이 絶對的이었다는 것이다. 니체는 프로이트 마르크스 等과 함께 近代哲學을 전복시킨 思想家 가운데 한 名이다.

니체는 가끔 나치즘 과 反유대主義, 人種主義의 始初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는 나치政權과 니체의 女同生이 共同으로 니체 의 思想을 歪曲한 結果 擴散된 認識에 不過하다. 니체의 女同生 엘리자베스가 니체의 著書를 짜집기해서 나치政權에 유리하게 阿附한 것이다. 이 때문에 後日 硏究者들의 勞苦로 '批評版 니체 全集'이 出刊되었다. [38] 엘리자베스는 흩어졌던 그의 著書들을 모아 一種의 保管所까지 열었으며, 미쳐 있던 니체에게 흰 私製服 을 입혀 展示하기도 했다. 게다가 엘리자베스는 히틀러 에게 '니체의 위버멘쉬란 當身을 念頭에 둔 것'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니체에게 붙어다니는 駭怪한 이미지와는 別個로 實際 니체는 個人主義者였으며 半(反)國家主義者였다. [39]

그러나, 實存主義 哲學者 하이데거 가 1961年 《니체》를 出刊한 以後 달리 評價되어 오늘날 니체에 對한 異常한 誤解는 거의 解決되었다. 實際 니체는 자국인 獨逸 을 매우 싫어했고 民族主義 또한 매우 嫌惡했다. [40]

受容 編輯

니체 本人은 自身의 著書에 對한 反應을 渴望했지만 虛事였다. 그가 精神을 잃기 몇 年 前에서야 그의 思想이 收容되기 始作했다. '詩人이자 哲學者' [41] 인 니체는 哲學이 理論에 그치지 않고 삶에 寄與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哲學과 文體 그리고 삶의 樣式을 통해서, 니체는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샤르트르 그리고 카뮈 같은 作家들, 프로이트와 융과 같은 心理學者, 슈펭글러와 슈타이너와 같은 비밀스런 宗敎의 스승, 벤, 게오르게, 지드, 헤세, 호프만슈탈, 말로, 하인리히 萬과 토마스 萬, 모르겐슈타인, 무질, 오닐, 릴케, 쇼, 예이츠 等等의 詩人들에게 影響을 끼쳤다.

20世紀-例를 들면 造形 藝術에서 "發見한 對象"(뒤샹)의 境遇에 드러나는 "作品의 不在"와 같은 現象으로 특징지어지는-가 始作되기 直前에 니체는 現在의 大部分의 美學 理論보다 20世紀 藝術 精神을 생각으로 捕捉하고 드러내는 것에 더 많은 寄與를 했다. 쉽게 誤解할 수 있는 “위버멘쉬”와 “힘에의 意志”라는 核心 槪念과 挑發的인 文章 때문에 보이믈러의 解釋에 나타나는 것처럼 最初의 나치로 쉽게 誤解받았던 니체가 特別히 東歐圈에서는 오랫동안 파시즘의 豫備者와 "파시즘 美學의 先驅者"로 誤解되고 歪曲되고 謀陷을 當한 以後에, 그는 現在 그 곳에서, 特히 舊東獨 地域에서 漸漸 人氣를 얻고 있다. 니체의 前 著作을 批判的으로 檢討하고 編輯한 콜리와 몬티나리의 대단한 作業은 오래前부터 이탈리아에서 始作되어 現 時代에도 持續되는 指摘 反響의 表示이다. "世界의 遊戱에 對한 美學的 基本 遲刻"을 지닌 니체의 포스트모더니즘 以前의 "藝術家-形而上學"의 收容은 프랑스에서는 오늘날까지 中斷되지 않은 채 維持되고 있다. 발터 카우프만의 니체 硏究 以後로 美國에서도 니체에 對한 硏究는 强化되었다. 니체와 하이데거는 더불어 東아시아에 많이 알려졌다

咀嚼 編輯

文獻學 編輯

  • 《테오그니스 選集의 歷史》, 1867.
  •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原本에 對하여》, 1868~1869.
  • 《호메로스와 古典 文獻學》, 1869.
  • 《Analecta Laertiana》, 1870.
  • 《Der florentinische Tractat uber Homer und Hesiod》, 1870.
  • 《그리스 音樂劇》, 1870.

哲學 編輯

니체 著作의 版本 編輯

니체가 쓰러진 뒤 編輯

1889年 1月 이탈리아 토리노 의 길거리를 散策하던 中 갑작스럽게 쓰러졌다. 以後 間歇的으로 제精神을 回復했다는 말이 있지만, 事實上 죽기 前까지 精神的 能力을 完全히 喪失했다. 니체 ( Friedrich Wilhelm Nietzsche )는 1888年 ~ 1889年 해가 바뀔 무렵 精神的 暗黑에 빠졌다. 그의 著作들은 正本이라 할 만한 形式을 갖추지 못한 狀態였다. 部分的으로 예전 著作들은 여러 出版社에서 여러 版本으로 나와 있었으나, 두 著作은 ? 니체가 잘못된 곳들을 指摘한 가운데 ? 印刷作業이 進行 中이었고, 아울러 印刷되지 않은 資料들이 다양한 마무리 水準 狀態로 存在했다. 이 印刷되지 않은 資料는 프란츠 오버베크( Franz Overbeck )가 하인리히 쾨젤리츠( Heinrich Koselitz )(페터 가스트( Peter Gast ))와 協議하여 처음으로 蒐集했다. 이들은 또한 니체의 最終 出版業者인 콘스탄틴 게오르크 나우만( Constantin Georg Naumann )과 함께 繼續的인 出版作業을 두고 論議했다. 그리고 1890年 末에 처음으로 파라과이 에서 歸鄕한 니체의 누이 엘리자베트 푀르스터-니체( Elisabeth Forster-Nietzsche )가 家族을 代表하여 論議에 參見했다. 그間에 니체 著述의 販賣高가 올랐다는 事實을 看過해서는 안되겠다. 1892年 初에 처음으로 全集版에 對한 合意에 到達했다. 이 全集판은 나우만 出版社에서 刊行되었으며, 쾨젤리츠가 이를 擔當했다.

니체 歪曲과 事後 編輯

니체는 全體主義 , 道德主義 , 國家主義 , 宗敎 , 實體論 , 資本主義 , 共産主義 , 社會主義 , 無政府主義 等을 批判하였다. 그러나 니체는 事後 게오르크 헤겔 과 함께 파시즘 의 象徵的 存在로 歪曲되고 惡用되었다. 니체의 이름이 아돌프 히틀러 파시즘 과 連結된 것은 그의 死後 그의 누이 엘리자베드 때문이었다. 엘리자베드는 狂的인 國家主義 者이며 反유대主義 者였던 베른하르트 푀르스터 와 結婚하였다. 그러나 1889年 푀르스터가 自殺한 뒤 엘리자베드는 니체를 푀르스터의 이미지로 改造하려 했다. 이무렵의 니체는 精神이 崩壞된 狀態였기에 [42] 女同生의 멍청한 짓거리에 對處할 수 없었다. 엘리자베드는 니체의 作品들을 無慈悲하게 統制하고 破壞하려 하였다. [43] 그러다가 히틀러 가 니체의 咀嚼에 關心을 보이고, 市中에서 니체의 思想이 流行하게 되자 貪慾에 사로잡혔던 그의 누이는 니체의 버려진 글들을 짜집기해서 〈힘에의 意志 Der Wille zur Macht〉(1901) 等을 出刊했다. 엘리자베드는 히틀러 의 熱烈한 支持者이기도 했는데, 히틀러 의 니체 追從 보다는 히틀러 에 對한 그女의 熱烈한 支持 때문에 大衆은 니체를 히틀러 와 連結짓게 되었다.

1930年 著作權 保護期間의 滿了 編輯

1930年, 니체의 著作權 保護期間이 滿了되었다.

作曲 編輯

니체는 專門的인 音樂 敎育을 받았다고 생각되지 않지만, 13歲 무렵부터 20歲 무렵에 걸쳐 歌曲 과 피아노曲을 作曲 했다. 그 後 作曲하는 일은 없게 되었지만, 바그너와의 만남을 통해 刺戟을 받고, 바젤 時節에 몇 個의 曲을 남겼다. 作風은 電氣 浪漫派 敵으로, 슈베르트 슈만 을 聯想케 한다. 그가 後에 全혀 作曲을 하지 않게 된 것은 本業으로 바쁘게 보냈다고 하는 理由 外에, 自身의 作品인 《 만프레드 冥想曲 》을 한스 폰 뷜로 에게 酷評 받은 것이 理由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現在에 이르기까지 니체가 作曲家로서 認識되는 일은 全無하지만, 著名한 哲學者가 作曲한 作品이라는 理由로 一部 演奏家가 錄音하게 되었고, 徐徐히 그의 '作曲도 하는 哲學者'로서의 側面이 밝혀지고 있다. 그의 作品은 모두 歌曲이나 피아노曲이지만, 2人 연탄곡 作品 中에는 《맨프레드 冥想曲(Manfred-Meditation)》 交響詩 《에르마나리히(Ermanarich)》 等, 오케스트라 를 念頭에 두고 쓰여졌을 것이라 여겨지는 作品도 있다. 또, 오페라 의 스케치를 남기고 있는데, 2007年 에 지크프리트 마트스가 그의 스케치를 骨子로 한 오페라 《코지마(Cosima)》를 作曲했다.

Wie wenig gehort zum Glucke! Der Ton eines Dudelsacks.

? Ohne Musik ware das Leben ein Irrtum. Der Deutsche denkt sich selbst Gott liedersingend. [44]

幸福을 위해 巨創한 것이 必要하지는 않다! 백파이프 演奏소리.

- 音樂이 없는 삶이란 잘못된 것이다. 獨逸人들은 神조차도 노래를 흥얼거린다고 想像했다.

??《偶像의 黃昏》

같이 보기 編輯

關聯 書籍 編輯

  • 들어라 偉大한 人間의 조용한 외침을 (淸夏, 1982)
  • 안티 크리스트 (이너北, 2005)
  • 어떻게 살 것인가 (해누리企劃, 2005)
  • Friedrich Nietzsche - Selected Writings (Essential Thinkers) (Collector's Library, 2005)
  • 니체의 숲으로 가다:니체의 사랑과 苦惱, 그리고 人間과 삶에 對한 熱情! (지훈, 2004)
  • 神은 죽었다 (휘닉스, 2004)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장희창 驛, 민음사, 2004)
  • 言語의 起源에 關하여 外 (冊世上, 2003)
  • 어느 쓸쓸한 날의 選擇 自殺 (北스토리, 2003)
  • 니체의 孤獨한 彷徨 (범우사, 2002)
  • 善惡의 저便·道德의 系譜 (冊世上, 2002)
  • 디오니소스 讚歌 (민음사, 2000)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冊世上, 2000)
  • 有故:1887年 가을∼1888年 3月) (冊世上, 2000)
  • 善惡의 彼岸 (民成事, 2000)
  • 니체 最後의 告白 (작가정신, 1999)
  • 人間的인 너무나 人間的인 (청하출판사, 1999)
  • 悲劇的 思惟의 誕生 (문예출판사, 1997)
  • 悲劇의 誕生 (洪신문화사, 1996)
  • 悲劇의 誕生 (범우사, 1995)
  • 偶像의 黃昏 半 그리스도 (청하출판사, 1984)
  • 曙光 (청하, 1983)
  • 道德의 系譜, 이 사람을 보라 (청하출판사, 1982)
  • 善惡을 넘어서 (淸夏, 1982)

韓國語로 된 參考 文獻 編輯

  • 고병권.《니체의 危險한 冊,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린비, 2003.
  • 백승영.《니체 "偶像의 黃昏"》. 서울(서울대학교哲學硏究所), 2006.
  • 카를 뢰비트.《헤겔에서 니체로. 마르크스와 키兒케고어. 19世紀 思想의 革命的 決裂》. 민음사, 2006.
  • 정동호 外 지음. 《오늘 우리는 왜 니체를 읽는가》. 冊世上, 2006.
  • 김정현. 《니체, 生命과 治癒의 哲學》. 冊世上, 2006.
  • K. 야스퍼스. 《니체와 基督敎》. 철학과현실사, 2006.
  • 백승영. 《니체, 디오니소스的 肯定의 哲學》. 冊世上, 2005.
  • 뤼디거 사프란스키. 《니체, 人生을 말하다》. 現實課科學, 2004.
  • 신경원. 《니체, 데리다, 이리가레의 女性》. 소나무, 2004.
  • 에른스트 벨러. 《데리다-니체, 니체-데리다》. 冊世上, 2004.
  • 박찬국. 《解體와 創造의 哲學者, 니체》. 東녘, 2001.
  • 김정현. 《니체의 몸 哲學》. 文學科現實社, 2000.
  • 게르하르트 슈베펜호이저. 《니체의 道德 哲學》. 蔚山大學校出版部, 1999.
  • 질 들뢰즈. 《니체와 哲學》. 민음사, 1998.
  • 앨런 D. 슈리프트. 《니체와 解釋의 問題》. 푸른숲, 1997.
  • 이진우. 《信足과 巨人族의 鬪爭》. 한길사, 2008.
  • 피에르 클로소프스키. 《니체와 惡循環》. 그린비, 2009.
  • 고명섭. 《니체 劇場》. 2012, 김영사
  • 뤼디거 者프란스키. 《니체; 그의 生涯와 思想의 電氣》. 문예출판사, 2003.
  • 김진석.《 니체가 뒤흔든 哲學 100年》. 민음사, 2000.
  • 차하순·정동호 共著.《부르크하르트와 니이체》. 西江大學校 出版部, 1986.
  • 박찬국.《니체와 佛敎》. 씨아이알, 2013.
  • 마르틴 하이데거. 《니체와 니힐리즘》. 知性의 샘, 1996.
  • 마르틴 하이데거. 《니체1》. 길, 2010.
  • 마르틴 하이데거. 《니체2》. 길, 2012.
  • 마르틴 하이데거. 《니체 哲學講義 1》. 이成果現實, 1991.
  • 질 들뢰즈. 《니체와 哲學》. 민음사, 2001.
  • 키스 안셀 피어슨. 《how to read 니체》. 熊進知識하우스, 2007.

프리드리히 니체의 名言 編輯

  • 너는 安易하게 살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恒常 群衆 속에 머물러 있으라. 그리고 群衆 속에 섞여 너 自身을 잃어버려라.
  •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剛하게 만든다. [45]
  • 옛사람들이 神을 위해서 行했던 것을 요즘 사람들은 돈을 위해서 行한다.
  • 實際의 世上은 想像의 世上보다 훨씬 작다.
  • 애初에 얻고 싶은 바가 明確하지 않았던 者들에게는 잃을 것도 明確하지 않다.
  • 내게 있어서 無神論이란 證明이 不必要한 卽刻的인 事實이다.
  • 苦痛을 통해 精神이 成長하고 새 힘을 얻게 된다.
  • 神은 죽었다. 神은 죽어있다. 우리가 神을 죽여버렸다. [46]
  • 한낱 빛이 어둠의 깊이를 어찌 알겠는가.
  • 自己 自身을 사랑하고 尊敬하라.
  • 人生의 目的이 있는 사람은 거의 모든 逆境을 堪當할 수 있다.

各州 編輯

  1. "내가 문헌학자였던 것이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아마 나는 如前히 문헌학자다. 卽 천천히 읽을 것을 가르치는 敎師 말이다."《아침놀》, 序文 5番글.
  2. 데카당. 代表的으로 소크라테스, 基督敎, 佛敎 等.
  3. 《니체는 왜 民主主義에 反對했는가》 , 김진석, 2009, 蓋馬高原
  4. Kaufmann, Walter, Nietzsche: Philosopher, Psychologist, Antichrist, p.22.
  5. a b Schaberg, William, The Nietzsche Canon ,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6, p.32.
  6. a b Schaberg, William, The Nietzsche Canon ,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6, p.32. 다비드 슈트라우스는 神學者 利子 哲學者 로서 헤겔의 弟子이었다. 그는 《예수의 生涯》라는 冊에서 예수 傳承이 神話的으로 變形되었다고 主張하였다. 그 當時 슈트라우스의 冊은 社會的으로 엄청난 指彈을 받았으며, 出刊 以後 슈트라우스는 社會로부터 孤立되어 生을 마감해야 했다. 게르트 타이쎈 , 아테네 메르츠, 《歷史的 예수》, 손성현 옮김, 茶山글房, 2001, 32쪽 參考: 《 歷史的 예수 》- 옛 硏究.
  7. 《化粧室 哲學者》.  
  8. 《化粧室 哲學者》.  
  9. Hecker, Hellmuth: "Nietzsches Staatsangehorigkeit als Rechtsfrage", Neue Juristische Wochenschrift, Jg. 40, 1987, nr. 23, p.1388~1391; and His, Eduard: "Friedrich Nietzsches Heimatlosigkeit", Basler Zeitschrift fur Geschichte und Altertumskunde, vol.40, 1941, p.159~186. 도이쎈과 몬티나리를 包含한 一部 著者들은 니체가 스위스 市民權을 獲得했었다는 잘못된 主張을 하기도 했다.
  10. ^ A biography of Spir.
  11. 主로 이탈리아 北部 ·프랑스 南部 地中海 近方에 長期間 療養하였다.
  12. ^ Stephan Guntzel, "Nietzsche's Geophilosophy", p.85 in: Journal of Nietzsche Studies 25 (Spring 2003),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University Park (Penn State), 2003-10-15; re-published on HyperNietzsche's website (English)/(German)
  13. 지만지 善과 惡의 저便 冊紹介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4. 소크라테스의 問題點 1番글
  15. http://www.nietzschesource.org/#eKGWB/GD-Verbesserer-5
  16. 니체가 著述한 文獻學 書籍의 題目을 參考할 것. 《플라톤의 對話 硏究 入門》
  17. http://www.nietzschesource.org/#eKGWB/JGB-Vorrede
  18. “프리드리히 니체” . 2022年 2月 16日에 確認함 .  
  19. 卽 "悲慘한 者만이 오직 착한 者다. 가난한 者, 無力한 者, 卑賤한 者만이 오직 착한 者다. 苦痛받는 者, 窮乏한 者, 병든 者, 醜한 者 또한 唯一하게 敬虔한 者이며 神에 歸依한 者이고, 오직 그들에게만 祝福이 있다. ㅡ이에 對해 그대, 그대 高貴하고 强力한 者들, 그대들은 永遠히 邪惡한 者, 殘忍한 者, 淫亂한 者, 탐욕스러운 者, 無神論者이며, 그대들이야말로 또한 永遠히 祝福받지 못할 者, 詛呪받을 者, 亡할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이러한 紐帶의 價値 轉換의 遺産을 누가 相續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즉 유대人과 더불어 道德에서의 奴隸 叛亂이 始作된다 《道德의 系譜》
  20. 이 글句에서 니체는 디오니소스를 生의 肯定으로, 그리스도를 生의 否定으로 놓고 對照하고 있다. 디오니소스는 그 語源上 두番(Dio) 태어난 者(nysos)를 뜻하며, 예수보다 그 連帶가 오래된 神이다. 다음 텍스트를 參照할 것. "記錄된 바 나무에 달린 者마다 詛呪를 받은 者라 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3:13. "나무에 달린 者는 하나님께 詛呪를 받았음이니라." 申命記 21:23
  21. 儒敎式으로 말하면 克己復禮, 基督敎式으로 말하면 이기는 者(Wer uberwindet), 啓示錄 21:7
  22. 뛰어넘는 人間 或은 克服하는 人間. Ubermensch. 獨逸語 Uber + mensch. 英語式으로 옮기면 Over + man 或은 Super + man.
  23. 이를테면 生意志를 主要한 價値判別基準으로 삼는 功利主義的 人間 或은 부르주아. Der letzte Mensch.
  24. 아침놀 175番글, '商人文化의 根本 價値' 參照
  25. 니체 硏究者 고병권은 다음과 같이 評한다. "니체는 價値들의 價値를 묻는 사람입니다." 基督敎的 價値 中 하나는 肉體 輕蔑이다. 그렇기에 基督敎는 스페인을 占領한 後 가장 먼저, "코르도바에만 260個가 있었던 沐浴湯을 閉鎖한다." 니체의 觀點에서 보자면 基督敎的 價値는 非衛生的이다. 心理的으로도 그렇고, 身體的으로도 그렇다.
  26. http://www.nietzschesource.org/#eKGWB/GD-Streifzuege-14
  27. http://www.nietzschesource.org/#eKGWB/GD-Streifzuege-44
  28. 달리 말해 同情(同情)의 道德. 니체에 따르면 哲學者들은 同情心을 輕蔑했다는 데 共通點이 있다. 甚至於는 "플라톤도 同情心을 輕蔑했다."
  29. "高貴한 靈魂은 自己 自身에 對한 敬畏心을 품고 있다." ,《善惡의 저便》 Die vornehme Seele hat Ehrfurcht vor sich.
  30. 獨逸語 Gut und Schlecht.《道德의 系譜》 第1論文에서, Schlecht라는 單語는 그 語源上 賤民의 어리섞음이나 劣等함을 나타낸다고 解釋된다.
  31. 이를테면 同情心. 니체는 同情心이 同情하는 사람을 意氣銷沈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여 이 槪念을 一貫스레 批判하였다. 獨逸語에서 同情Mitleiden이란 苦痛을leiden을 함께한다Mit는 뜻이다.
  32. 風習의 道德이라는 槪念. -《아침놀》, 第1卷, 9番글. Begriff der Sittlichkeit der Sitte.
  33. 自然과 規範. 各各 그리스어 Physis와 그리스어 Nomos. Nomos는 規範, 慣習, 法 等을 의미한다.
  34. Nietzsche and Callicles on Happiness, Pleasure, and Power
  35. 부르주아. 니체는 商人의 價値評價를 肯定的으로 評價하지 않았다. 니체에 따르면 商人이란 需要에 따라 價値를 評價하는 者이고, 그 스스로가 事物 속으로 價値를 불어넣지는 못한다. 이는 藝術的이거나 創造的인 態度가 아니다.
  36. [1]
  37. 힘意志 或은 힘에의 意志[Wille zum Macht]. 生存意志[Wille zum Leben]와 對立되는 槪念.
  38. 슈테판의 時間旅行, 막스 크루제 저
  39. "國家라는 새로운 偶像이 무너진 저便을 바라보라. 무지개와 위버멘쉬에 이르는 다리가 보이지 않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偶像에 對하여' 便 末尾.
  40. 哲學, 歷史를 만나다.
  41. 플라톤과 對比되는 特徵이다. 플라톤은 詩人들을 都市國家에서 追放시켜야 한다고 主張한다. 《이온》 參照.
  42. 니체는 1889年 初에 精神이 崩壞되어 以後 1900年에 死亡할 때까지 제精神을 回復하지 못했다.
  43. 그러나 一部 追從者들에 依해서 그의 作品들은 保存되었다.
  44. http://www.nietzschesource.org/#eKGWB/GD-Sprueche-33
  45. Was mich nicht umbringt, macht mich starker
  46. Gott ist tot! Gott bleibt tot! Und wir haben ihn getotet!

參考 文獻 編輯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內容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
      본 文書에는 知識乙만드는지식 에서 CC-BY-SA 3.0 으로 配布한 冊 紹介글을 基礎로 作成된 內容이 包含되어 있습니다.

外部 링크 編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