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述한다는 것은, 自己의 主張이나 意見을 論理的으로 敍述한다는 뜻이다. 요즘 大學에서 치러지고 있는 論述 考査의 問題는 그 內容이 汎敎科目的이며, 脫敎科目的이다. 그리고 論述 考査에서는 受驗生들의 批判力·創意力·表現力 等 高次的인 思考 能力을 測定할 것을 大原則으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해, 讀書와 思索을 통해 形成된 批判力·論理力·思考力을 體系的으로 表現할 수 있는 能力을 測定·評價하는 試驗이 論述이다.
論述 考査에서는 事故의 內容이 測定 對象이 아니라
思考의 過程
이 主된 測定 對象이므로, 受驗生이 지닌 世界觀과 價値觀은 評價의 對象이 아니다.
論述 考査에서는 受驗生의 思考 能力을 測定하기 위해 單一 題目만을 提示하고 자유롭게 意見을 開陳하도록 하는 初步的인 問題는 大體로 排除되는 傾向이 있다. 卽, 일정한 資料를 提示하고 그 資料를 바탕으로 理解力과 批判力을 動員하여 答案을 提示하는 資料提示型이 主流를 이루고 있다.
資料를 提示하는 類型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一般的인 資料나 論說의 一部를 提示하고, 이를 바탕으로 妥當한 結論을 이끌어 내게 하는 類型이다. 또 다른 하나는 資料를 解釋하고 일정한 條件에 맞추어 自身의 見解를 論述하도록 하는데, 이 境遇 提示된 條件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大學 入試에서 論述 科目이 採擇된 지 벌써 몇 年이 지났다. 하지만 論述 考査를 實施하는 大學마다 論述 考査의 出題 水準과 範圍가 千差萬別이다.
다른 試驗과는 달리 論述 考査의 特徵은 어떤 大學에서 어떤 問題가 出題될지 모른다는 데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論述 考査가 修能 試驗과 마찬가지로 思考力과 想像力을 測定하기 위한 것이라는 點이다.
論述의 核心은 根據 있는 主張을 내세우는 것이다. 具體的으로 말해서 自身의 主張을 提示하고 그 主張에 對한 根據를 댈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主張과 根據의 關係가 論理이다. 이렇게 볼 때 論述은 論理的인 思考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고, 그래서 모든 學問 活動의 基礎라고 할 만하다.
論述을 글쓰기의 範疇에서 보면 分明히 作文의 一種이다. 그러나 作文이 곧 論述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 하면 論述은 感想을 적거나 事實을 單純히 記述하는 글쓰기와는 分明히 區別되는 論理的인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論述은 글쓰기에 焦點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論理性
에 焦點을 맞춘다.
하지만 論理的 思考 能力은 論述의 必要 條件일 뿐이다. 다시 말해 論理는 論述의 形式이다. 따라서 論理的 形式에 담길 內容이 있어야 한다. 豐富하고 斬新하면서 獨創的인 內容을 담기 위해서는 論述의 主題가 될 만한 것들에 關한 背景 知識을 쌓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背景 知識을 바탕으로 獨創的인 代案을 마련할 수 있는 想像力을 갖추어야 한다.
想像力은 單純히 幻想的인 생각이 아니다. 想像力은 日常 生活 속에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問題를 헤쳐 나가는 힘이다. 想像力이 豐富할수록 다양한 解決策을 考案해 내고, 또 가장 適切한 解決策을 찾아낸다. 論述이란 주어진 課題에 對해 自身의 立場을 選擇하여 나름대로 올바른 解決策을 提示하는 것이기 때문에, 豐富한 想像力은 論述에 있어서 반드시 必要한 힘이다.
想像力은 一次的으로 우리의 直接 經驗에서 나온다. 그러나 우리의 直接 經驗은 極히 制限的이다. 그래서 間接 經驗이 必要하다. 間接 經驗은 豐富한 讀書를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論述 敎育은 注意力 있는 直接 經驗을 可能하게 할 뿐만 아니라, 讀書를 통해 다양하고 豐富한 間接 經驗을 쌓을 수 있게 한다.
[1]
論述의 接近 方法은 다음과 같다.
[2]
論述文은 어떤 問題에 關해서 自己 나름대로의 意見이나 主張을 내세우는 글이다.
例를 들어, '여름철 學校給食 꼭 해야 하는가'라는 問題는 主張이나 意見 提示를 要求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물음에 對해 答하는 形式의 글을 쓴다면, 이는 글쓴이의 主張이나 意見을 밝히는 論述文이 된다. 論述文은 結局 論說文과 같은 것이므로 글을 쓰는 目的面에서 본다면 相對方을 說得하거나 確信시키기 위한 글이다.
日常生活에서 우리가 읽는 글들은 갖가지 冊이나 新聞記事·廣告文案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그 글들은 나름의 目的을 지니고 있다. 讀者에게 '무엇'을 '어떻게' 傳達하고자 하는가에 따라 글의 性格이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은 언제나 '무엇'을 '어떻게' 表現해야 하는가를 스스로 가늠해야 한다. 읽는 사람도 當然히 글의 種類에 따라 讀書의 方法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論述은 이와 달리 '主張'을 論證的으로 開陳하는 글이어야 한다. 그러나 主張을 담는 글은 많다. 論文, 新聞의 社說·時評·解說記事, 그리고 甚至於 廣告文案에도 나름대로 主張하는 바가 있다. 勿論 主張만 있다고 해서 論述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主張이 없는 論述은 成立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主張을 담고 있는 글이라면 一旦 그것은 論述의 基本要件을 갖춘 것이라 할 수 있다. 論述이라고 쓴 글에 主張이 분명하지 않다면 좋은 論述이 될 수 없다. 그런만큼 論述을 쓸 때는 一次的으로 무엇을 主張하는가를 글쓰는 사람 스스로 明確하게 認識하지 않으면 안 된다.
論證的인 글을 읽을 境遇에도 마찬가지로 그 글의 主張을 明確히 把握하는 것이 重要하다. 여러 個의 主張이 섞여 있거나 問題 自體가 複雜해 模糊한 境遇도 있다. 그럼에도 이런 模糊한 글에서 主張을 찾아내 整理할 줄 알아야 하는데, 이는 緻密하게 읽고 批判하는 訓鍊을 거치지 않고서는 해낼 수 없다. 좋은 論述을 쓰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글을 緻密하게 批判的으로 分析하면서 讀書하는 것이 무엇보다 必要하다.
演繹法은 一般的 法則으로부터 具體的인 結論을 얻어내는 方法으로, 一種의 推理와 같다.
例를 들어 "나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사람이란 태어나면 結局은 죽게 마련이니까"라고 생각했다면 이는 演繹法에 依한 推理로 볼 수 있다. 이러한 推理는 '모든 사람은 죽는다'라는 一般的 事實로부터 '나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라는 具體的인 事例를 이끌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大前提-一般的인 事實)
- 나는 사람이다. (小前提)
-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 (結論-具體的인 事例)
이미 普遍的으로 認定된 생각에서 特殊한 생각 하나를 얻어내는 方法을 우리는 演繹法이라 하는데, 그 代表的인 것이 위의 三段 論法이다. 이 方法을 쓰자면 普遍的으로 認定된 생각이 있어야 하며, 그것은 歸納法에 依해 얻어진다.
歸納法이란 具體的인 事例로부터 一般的인 結論을 이끌어 내는 方法이다. 많은 論述 問題가 '抽象的 敍述에 치우치지 말고 具體的 例를 提示할 것'을 要求하는데, 이 要求는 歸納의 方法으로 論證이라는 것이다. 歸納은 여러 가지 例에 呼訴하여 어떤 主張을 뒷받침하는 論證 方法이다. 具體的인 例는 다음과 같다.
최희준은 人氣 歌手였는데 人氣가 시들었다.
南
珍島 人氣 歌手였는데 人氣가 시들었다.
김건모도 人氣 歌手이니까 人氣가 시들 것이다.
歸納은 또한 確率에 呼訴할 수도 있다.
"平均的으로 隕石에 맞아 죽는 사람은 20億 名 中에 하나꼴이다. 그러므로 내가 隕石에 맞아서 죽는 일은 거의 發生하지 않을 것이다."
卽, 確率에 呼訴해서 '그럴 確率이 매우 낮다'는 式으로 推理하는 論證이다. 다음 論證도 確率에 呼訴하고 있다.
우리 나라 40代 男子 中에서 65퍼센트는 담배를 피운다.
저 男子는 우리 나라 40代 男子이므로 아마도 담배를 피울 것이다.
다음은 大衆 媒體가 現代人에게 미치는 影響을 묻는 물음에 對한 두 答案의 一部이다. 두 答案을 比較해 보자.
A:大衆 媒體는 政治的 機能도 遂行한다. 大衆 媒體는 政府의 政策, 여러 政派의 政治的 見解, 國民의 輿論을 報道함으로써 民主 政治 秩序를 維持하는 데 한몫하고 있다. 그러나 大衆 媒體는 政府의 政策을 一方的으로 弘報하고 特定 政派의 政治的 見解만 代辯함으로써 民主 政治 秩序를 歪曲할 수 있다.
B:또 大衆 媒體는 特定 政治 集團의 利益을 위해 그릇된 情報를 大衆에게 흘려 民主 政治 秩序를 破壞할 수 있다. 例를 들어 1980年 5月, 新聞·텔레비전 等은 光州 民主化 運動을 政府의 그릇된 發表대로만 報道함으로써 社會 正義 實現에 逆行한 적이 있다.
A와 B의 決定的 差異는 무엇일까? A에는 大衆 媒體의 否定的 影響을 뒷받침하는 具體的 例가 없지만 B에는 例가 있다. B가 A보다 더 높은 點數를 받는 것은 當然하다. 例를 드는 것은 어떤 主張을 뒷받침하는 根據를 提示하는 데 아주 좋은 方法이다.
옛날 어느 마을에 높고 險한 고개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누구든지 그 언덕에서 넘어져 구르면 3年 안에 죽는다는 말이 있었다. 하루는 마을의 한 老人이 밤中에 언덕을 넘다가 그만 넘어져 구르고 말았다. 다음날 老人은 自己는 3年 안에 죽는다며 엉엉 울면서 마을을 돌아다녔다. 그 마을에는 지혜로운 한 少年이 있었는데, 그 老人에게 한 番 구르면 3年을 사니까 열 番 구르면 30年을 살지 않겠느냐고 얘기했다. 그러자 老人은 크게 기뻐하며 고개에 올라가 열 番, 스무 番 繼續 굴렀다.
고통스러워하던 마을 老人은 少年의 智慧로 오히려 더 큰 기쁨을 얻게 되었다. 새로운 한 생각을 보탠다는 것은 이렇게 값진 일이다.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으면 풍요로운 人生을 지킬 수 있다. 論述은 바로 이렇게 생각을 바꾸어 思考 領域을 擴大해 나가는 것이다.
周圍의 사람들을 關心있게 살펴보면 누구나 좋은 點만 있거나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 좋은 點과 나쁜 點이 함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卽 누구나 두 個 以上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일이든 좋은 點과 나쁜 點이 있다.
周邊에서 벌어지고 있는 事件이나 事實에 對해 肯定的인 面과 否定的인 面을 찾아보자. 이렇게 두 가지 觀點에서 把握하다 보면 論爭에 對한 意見·主張이 서게 되고 보다 合理的인 새로운 觀點도 생겨난다.
論述이 '主張을 論證的으로 開陳하는 글쓰기'라면 第一 먼저 해야 할 일은 問題의 爭點을 正確하게 把握하는 일이다. 爭點이 없는 論題에 對해 主張을 開陳한다는 것은 不可能한 일이기 때문이다. 좋은 論述의 作成은 먼저, 어떤 爭點에 對한 글인가를 確定하고, 그 다음에 무엇을 主張할 것인가를 決定하는 일에서 始作된다. 이 點에 對備하여 글읽기에서 爭點을 正確히 把握하는 訓鍊을 해야 한다. 爭點은 글 앞머리에 質問의 形態로 提起될 수도 있고, 또 감춰진 境遇도 있다. 어떤 爭點을 다루는 글인가를 把握하지 않고서는 그 글을 理解할 수 없다. 어떤 主張을 開陳하는가를 把握하는 것은 그 다음의 問題다.
論點 찾기는 銳利한 判斷力을 基本으로 한다. 여러 가지 서로 다른 事項에서 共通 論點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正確한 글읽기를 必要로 한다. 例文을 消化한 다음에는 核心 事項을 抽出하고 그것들의 連結點을 찾아내어야 한다. 그리고 論點을 찾아낸 다음에는 그에 對한 意見을 提示해야 한다.
- "이番에 改閣이 있습니까?"
- "改閣은 大統領의 固有 權限이기 때문에 저로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몇 年 前 記者와 與黨 責任者 사이에 주고받은 對話의 內容이다. 이 對話에서 記者가 물은 것은 改閣 斷行 與否이지 改閣이 누구의 權限인가에 對한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論點을 回避하는 對話는 日常的인 對話에서도 자주 使用된다. 그러나 論述에서 이런 式으로 論點을 벗어난 主張을 한다면 그 答案은 낮은 點數를 면할 수 없다.
94學年度 서울대 論述試驗에 '資本主義의 根本的 矛盾에 對해 說明하라'는 論題가 出題된 적이 있다. 採點 敎授에 따르면 相當히 많은 學生들이 資本主義의 矛盾을 說明하기보다는 社會主義의 矛盾을 指摘했다고 한다.
프랑스 바칼로레아에서 出題된 '社會에서 暴力이 果然 正當化될 수 있는가'라는 論題를 例로 들어 보자. 이 境遇에도 暴力의 殘忍性만을 指摘했다면 論點을 벗어난 答案이 된다. 論題가 要求하고 있는 것은 暴力이 社會的으로 正當化될 수 있는지, 있다면 根據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또 正當化될 수 없다면 어떤 根據에서 그러한가를 說明해야 한다.
양시(兩是)·量비(兩非)론도 論點을 벗어나는 代表的인 境遇다. 論述은 明白한 結論, 主張을 要求하지 듣기 좋은 答을 要求하는 것이 아니다. 高等學校 敎科書에 많이 言及되는 主題 中 '自由와 平等'을 例로 들어 보자. 이 主題로부터 '自由와 平等 中에 어떤 要素가 社會的 原則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論題가 出題될 수 있다.
이 論題의 結論으로는 當然히 自由와 平等 中에 하나를 結論으로 提示해야 한다. 그 根據가 充分해야 하는 것은 勿論이다. 그러나 이에 對해 어떤 斷定的인 結論을 내리기 어려운 學生들은 危險을 最少化하기 위해 模糊하게 얼버무리는 境遇가 있을 수 있다.
"自由와 平等이 調和를 이루어야 한다", 或은 "自由와 平等이 調和를 이루도록 努力해야 한다"는 式의 對答이 代表的인 境遇다. 그러나 이 論題는 '兩者가 調和되도록 努力해야 하느냐 마느냐'에 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答은 論點을 벗어난 것이 된다.
글을 쓸 때는 論點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어떤 結論으로 끝맺음을 할 것인가를 恒常 念頭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新聞紙上을 통해 政治的·社會的 爭點에 對해 서로 意見을 달리해 社會的으로 問題가 되는 境遇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大部分 自身의 主張을 說得力 있는 論理的 根據를 통해 正當化하는 데는 弱하다. 主張의 論理的 正當性을 꼼꼼히 따져보는 訓鍊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態度로는 絶對 좋은 論述을 作成할 수 없다. 論述의 要諦는 어떤 主張을 選擇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理由로 '왜' 그 主張이 正當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根據 없는 主張'은 論述로서 아무런 價値가 없다. 주어진 爭點에 對해 어떤 主張을 選擇했는지 與否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說得力 있게 正當化하느냐에 따라 點數 偏差가 날 수밖에 없다.
要컨대 論述은 주어진 爭點을 얼마나 正確하게 把握하는가, 그리고 얼마나 說得力 있는 正當한 論理的 根據를 갖고 爭點에 正確한 主張을 展開하는가를 測定하는 試驗 形式이다. 따라서 論述을 作成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點, 卽 爭點이 무엇인가, 어떤 主張을 擇할 것인가, 그 主張을 어떻게 正當化할 것인가를 반드시 點檢해 보아야 한다.
名探偵 셜록 홈스의 推理小說을 보면 어떤 事件의 端緖에서 犯人을 推理하는 過程이 매우 흥미롭게 展開된다. 推理小說의 白眉는 왜 꼭 特定의 人物이 犯人일 수밖에 없는 理由와 根據를 밝히는 데 있다. 論述의 關鍵은 어떤 主張을 提示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主張(或은 結論)을 뒷받침하는 根據(或은 前提)가 얼마나 說得力 있게 提示되는가가 論述의 點數를 판가름하는 要素다. 例는 다음과 같다.
- 예1) 탤런트 金希善은 女子다. 그는 金(金)某氏의 딸이기 때문이다.
- 예2) 탤런트 金希善은 女子다. 그는 드라마에서 未婚女性의 役割을 主로 맡기 때문이다.
예1)의 境遇 '탤런트 金希善이 女子'라는 主張은 '金某氏의 딸이다'는 根據로 充分히 正當化될 수 있다. 탤런트 金希善이 金某氏의 딸인 限, 다른 餘地가 없기 때문에 女子라는 것은 論理的으로 妥當하다. 그러나 예2)에서처럼 未婚女性의 役割을 主로 맡는다는 理由로 탤런트 金希善이 女子라고 主張하는 것은 充分하지 않다.
왜냐 하면 男子이면서도 드라마에서 女性의 役을 할 수 있으며, 論理的으로 볼 때 女裝을 한 男性일 수도 있는 可能性을 排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主張에 對해 그 根據를 提示하는 過程을 論證이라 한다면, 論證의 妥當性 與否는 어떻게 判斷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返禮가 不可能하다'는 것을 意味한다. 예2)의 境遇처럼 탤런트 金希善이 드라마에서 未婚女性의 役을 主로 맡는다 하더라도 그가 女子가 아닐 可能性이 있다면 그것은 妥當한 論證이 아니다. 그러나 論述에서는 論理學에서와 같은 嚴格한 妥當性을 要求하는 것은 아니다. 單 論理的 一貫性을 維持하는 데 留念할 必要가 있다.
論述은 위의 例처럼 單純한 文章으로 돼 있는 것이 아니라 大部分 긴 글이다. 普通 2百字 原稿紙 6張(1,200字) 分量의 긴 論述을 作成할 境遇 자칫하면 論理的 一貫性을 잃고 自身의 主張에 充分한 根據를 提示하지 못하는 것은 勿論, 甚至於는 그 主張을 否定하는 境遇도 있다.
따라서 論述을 作成하기 前에 自身의 主張에 對해 어떤 根據를 내세울 것인가를 整理해 보는 것은 勿論, 그 根據가 얼마나 論理的으로 妥當한지 點檢해 보는 訓鍊이 必要하다.
論述은 論理學 試驗이 아니라 綜合的 知識을 묻는 試驗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論理學의 規則을 지켜야 할 必要는 없다. 그러나 다시 한 番 强調하면 論述의 要諦는 어떤 主張을 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主張에 얼마나 說得力 있게 根據를 提示하느냐에 있기 때문에 說得力 있는 根據를 提示하기 위해서는 論理的 一貫性을 維持하는 일이 必要하다.
한 가지 例를 들어 보자. 最近 몇몇 醫學者들이 國內에 反人倫的 凶惡犯罪가 增加하자 이를 遺傳的 要因에서 說明하려는 '生物學的 決定論'을 主張한 바 있다. 이로부터 '人間의 社會的 犯罪를 遺傳因子로부터 說明하는 것이 可能한가'라는 論題를 抽出해 볼 수 있다. 이에 對해 '可能하다'고 主張할 境遇 遺傳的 要因과 犯罪 사이의 因果關係를 分明히 밝혀야 한다. 그러나 犯罪가 遺傳的 要因이 아니라 社會文化的 要因에 따라 發生되는 것이라는 反論에 제대로 對應하지 못한다면 正當하다는 主張은 說得力이 없게 된다.
要컨대 論爭 過程에서 恒常 相對의 論理的 弱點을 파고드는 것은 避할 수 없는 일이고, 自身의 主張을 說得力 있게 하기 위해 相對의 批判을 效果的으로 防禦해 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主張을 펼 때는 相對方이 어떻게 나의 論理的 弱點을 攻擊할 것인가를 念頭에 두고 그것에 積極的으로 對應할 必要가 있다.
論述도 마찬가지다. 主張에 對해 根據를 提示할 때 相對가 指摘할 만한 論理的 誤謬가 없는지 念頭에 둔다면 보다 說得力 있는 論述을 作成할 수 있다. 글을 쓸 때 우리가 흔히 犯할 수 있는 誤謬들은 大部分의 論理學 敎科書의 '誤謬론'이라는 腸(章)에서 紹介하고 있다. 몇몇의 특수한 事例를 一般化해 普遍的 結論을 내리는 '躁急한 一般化의 誤謬', 어떤 普遍的 規則을 특수한 事例에 機械的으로 適用할 때 犯하는 '直接 偶然의 誤謬' 等이 部分的으로 高等學校 敎科書에도 紹介되고 있다. 그 內容을 알아두는 것도 글을 쓸 때 보다 論理的 一貫性을 갖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論述 告詞는 基本的으로 避試驗者가 特定 事實을 아느냐 모르느냐를 따지는 데 目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知識을 얼마나 適切하게 活用할 수 있는가를 測定하는 데 있다. 따라서 主題가 무엇인지를 미리 아는 일이 重要한 것이 아니라 主題를 얼마나 깊이 있게 消化하여 問題의 要求에 充實하게 副應하느냐 하는 것이 重要하다.
그런데 斷片的이고 散發的인 知識은 主題를 自身의 것으로 소화시키는 데 別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알고 있는 知識을 問題의 要求 水準에 맞게 適用하기 위해서는 廣範圍한 讀書를 통해서 다양한 主題를 익혀 두는 것이 좋다. 따라서 出題될 만한 主題만을 따로 뽑아서 學習하는 것보다는 다양한 主題를 다루어 보는 것이 論述 考査에 效果的으로 對備할 수 있는 길이다.
이때 어떤 主題에 對한 背景 知識을 習得하는 것만으로는 不足하다. 問題는 恒常 背景 知識을 活用해서 出題者가 願하는 方向으로 論議를 進行시키도록 要求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出題者의 問題 意識을 受容할 수 있는 方向으로 學習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