早産(造山)棟에서 南쪽으로 約 4 km 떨어져 있었던 녹둔도는 둘레가 8 km 남짓
[2]
되고 面積은 約 3~4 km
2
(
汝矣島 面積
의 1.1~1.3倍)
[3]
[4]
였던 것으로 推定된다.
[5]
이 섬에서 朝鮮人들은 벼, 兆, 옥수수, 보리 等을 栽培하였고, 섬 周邊에서는 鰱魚, 붕어, 黃魚, 숭어 等이 主로 잡혔다고 記錄되어 있다.
녹둔도는 1430年代에
世宗大王
이
6陣
을 開拓
[6]
한 以後 土城과 木柵을 쌓았고, 以前에 '社차마度'라 하던 것을 世祖 때 '녹둔도(鹿屯島)'라 부르게 되었다. 1583年(宣祖 16) 경흥부 現地 軍事들의 軍糧(軍糧)李 不足하자 녹둔도에 軍事用 屯田(屯田)을 造成하였고, 農民들은 배를 타고 이 섬에 들어와 農事를 지었는데, 兵士 若干을 두어 防備하도록 하였다. 1587年(宣祖 20年)
李舜臣
이
早産步
萬戶(造山堡 萬戶)를 겸해 鹿島 屯田社(鹿島屯田事)로서 녹둔도의 屯田을 管理하였다.
1860年
10月 18日
베이징 條約
으로
外滿洲
를 모두 獲得한
러시아 帝國
은
沿海州
에 붙은 녹둔도까지 無斷으로 占領하였고, 以後
소비에트 聯邦
을 거쳐
러시아聯邦
의 領土가 되었다.
朝鮮
政府는
러시아 帝國
이 이 땅을 占領했다는 事實을 뒤늦게 안 뒤
1880年代
에 數次例
淸나라
에 抗議하였다.
[7]
또
러시아 帝國
과 修交한
1884年
부터 10餘 次例에 걸쳐 러시아에 녹둔도의 返還을 要求했고,
[8]
1885年
에는 淸나라와 러시아에 3國의 共同 減髻案(勘界案)을 提議했으나 無視當했다.
[8]
1890年
에는 漢城(
서울
) 駐在 러시아 公使를 불러 녹둔도의 返還을 再次 要求하였으나 러시아 側은 아무런 會報도 하지 않았다.
[5]
1984年 11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
소비에트 聯邦
사이의 國境 會談에서 녹둔도 問題가 論議될 것인지 關心을 끌었다.
[5]
그러나, 兩國은 國境協定(1985年)과 國境設定議定書(1990年)를 締結하면서
豆滿江
을 境界로 合意했다.
[7]
當時 協商過程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은 녹둔도 問題를 提起했지만, 現在
豆滿江
週
水路
의 中間線을 國境으로 合意함으로써 結果的으로
豆滿江
駐水路의 東쪽에 位置한 녹둔도에 對한
蘇聯
의 領土權을 認定하고 말았다.
[7]
[9]
2000年 가을에는 서울대 地理敎育科 이기석 敎授陣이 現地探査를 試圖했으나 軍事機密 地域이라는 理由로 探査時間이 3時間으로 制限된데다 갈대의 키가 2m에 이르는 等 現地의 惡條件 때문에 別 所得없이 돌아와야 했다.
- 지리
- 領有權 條約
- 肝도
- 獨島
- 離於島
(韓國과 中國 間 排他的 經濟 水域(EEZ) 葛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