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국대장공주 牌阿只근氏
(魯國大長公主 ?兒只斤氏,?? ~
1365年
3月 8日
(
陰曆 2月 15日
)
[1]
)는
高麗
공민왕
의 敵後(嫡后)이다.
원 純宗
(元 順宗·推尊)의 孫子인
위왕
(魏王) 베이르 테뮈르 (?羅 帖木兒,
몽골語
:
????
?????
Bayir Temur
)의 딸로, 本名은
보르지긴 부다시리
(
몽골語
:
????????
????????
Bor?igin Buda?iri
,
韓國 漢字
:
?兒只斤 寶塔實里?
牌亞遲筋 보탑實利
)이다.
稱기스 칸
의 7代孫이다.
1365年
(恭愍王 14年)에 難産으로 逝去했다.
시호
는 처음
인덕공명자예선안왕태후
(仁德恭明慈睿宣安王太后)를 내렸다가
[2]
此後 원에서 내린
휘醫노국대장공주
(徽懿魯國大長公主)로 交替토록 하고
[2]
, 結局 이를 合成해
인덕공명자예선안휘의노국대장공주
(仁德恭明慈睿宣安徽懿魯國大長公主)로 했다. 禑王 때는
人德太後
(仁德太后)라 했다.
[3]
올바른 呼稱은 아니지만 이 때문에
人德王后
(仁德王后)로 알려져 있다. 陵은
黃海北道
開豐郡
해선리
現정릉
內에 位置한 정릉(定陵)이다.
生年은 알려지지 않는다.
1349年
(忠定王 1年)
元나라
에서
공민왕
과 結婚하였으며, 以後 恭愍王이 高麗로 돌아갈 때
원
으로부터 勝醫公州(承懿公主)에 冊封되었다.
[4]
노국대장공주는 恭愍王이 班員 政策을 實施하자 自身이 태어난 故國을 排斥하고, 男便을 도왔으며, 恭愍王의 사랑을 獨차지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노국대장공주는 1365年에 겨우
妊娠
하여 恭愍王은 後嗣가 생겼음을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나 公主는
難産
으로 아들을 流産하고 世上을 떠났다. 그女가 죽자 恭愍王은 매우 슬퍼하였다. 그女가 죽은 지 얼마 後 政治權을
辛旽
(辛旽)에게 讓渡했다. 恭愍王은 그女의 肖像畫를 그려 壁에 걸고 밤낮으로 바라보면서 그리워했다고 한다. 또한 恭愍王은 그女의 靈魂을 慰勞하기 위해 魂制를 지냈으며, 그 陣營을 모시기 위해 豪華로운 榮轉을 짓도록 하였다.
露國대장公主가 登場하는 作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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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화
, 《多情佛心》(1942年, 박문서館)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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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高麗史》 卷41 〈勢가〉 卷41 - 恭愍王 14年 2月 甲辰(甲辰) 記事
- ↑
가
나
《高麗史》 卷89 〈列傳〉 卷2 后妃 列傳 - 공민왕 后妃 휘醫노국대장공주
- ↑
《高麗史》 卷133 〈列傳〉 卷46 신우 列傳 - 禑王 卽位年 11月 記事
- ↑
《
東文選
》 第 119卷 悲鳴(碑銘), 狂通報制禪師悲鳴 兵書(廣通普濟禪寺碑銘 幷序)
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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