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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억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남궁억

大韓帝國 朝鮮 황조 末期의 敎育者, 啓蒙運動家이자 日帝 强占期의 獨立運動家 (1863?1939)

南宮 億 (南宮 檍, 1863年 12月 27日 ~ 1939年 4月 5日 )은 大韓帝國 朝鮮 황조 末期의 敎育者, 啓蒙運動家이며 日帝 强占期의 獨立運動家이자 敎育家, 社會運動家, 是認, 著述家, 작사가, 作曲家, 言論人이다.

속초초등학교 에 세워진 翰西 南宮檍 先生像.

履歷 編輯

그의 者(字)는 치만(致萬)이고 號(號)는 漢書(翰西)이며 本貫은 함열 (咸悅)이다. 朝鮮 漢城府 에서 出生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朝鮮 江原道 洪川 에서 暫時 幼兒期를 보낸 적이 있고 그 後 朝鮮 慶尙道 東萊 에서 暫時 幼年期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三千里 半島 錦繡江山」을 비롯한 노래들을 作曲하였으며 佐翁 윤치호 의 査頓이기도 하다.

1887年 英語學校를 卒業하고 高宗의 通譯官이 되어 官職에 나갔으며 1894年 內務部 土木局長이 되어 京城府 탑골公園 (파고다 公園) 公使의 監督을 맡아 完工시켰다. 또한 京城府 內의 道路 整備와 都市 計劃을 主導하였다. 그뒤 開化, 啓蒙運動을 推進하다가 1903年 부터 城主牧師, 襄陽郡守(襄陽郡守)를 지냈으나 1905年 乙巳 保護 條約 으로 官職을 辭退하고 大韓協會長, 관동학회(關東學會) 會長 等으로 活動하며 啓蒙, 敎育 活動에 專念하였다.

1910年 10月 强制 韓日合邦 以後에는 培花學堂 敎師와 相同學院 院長을 겸하며 敎科書를 編纂하고 敎會와 學校를 세웠으며, 新編言文體法(1914), 家庭敎育(1914) 等의 敎科書를 著述하였다. 1918年 故鄕 洪川 耗穀으로 落鄕하여 敎會와 學校를 짓고 無窮花 普及 運動을 推進했다. 1933年 12月 朝鮮總督府 의 不審檢問에 逮捕되어 西大門刑務所 에서 服役하다가 1935年 釋放되었다. 性이 남(南)이고, 이름이 宮億인 것으로 錯覺하기 쉬우나, 實際로는 性이 南宮이고 이름이 億이다.

生涯 編輯

젊은 時節 編輯

出生과 數學(學問을 다룸) 編輯

翰西 南宮檍은 1863年 (哲宗 14年) 12月 27日 , 漢城府 鍾路房 정동 왜송골(倭松洞)에서 中樞府 道士(都事)를 지낸 남궁영 (南宮泳)과 덕수 李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幼年 時節에는 正式으로 受學하지 못하고 漢文 工夫를 하다가 1883年 (高宗 20年) 美國人 이 經營하는 英語學校에 다녔다.

1884年 (高宗 21)에는 英語學校 1學年 在學 中 解官(海關) 묄렌도르프 (P.G. Von Mollendorff)의 見習生이 되었고, 1886年 內部主事(內部主事)로 特採되었다. 1887年 初 英語學校를 卒業하고 高宗 의 御殿通譯觀이 되었다.

官僚 生活 編輯

1887年 全權大臣 조민희 (趙民熙)의 遂行書記官으로 상하이 에도 갔다. 英國, 러시아, 獨逸 巡訪길을 計劃하고 홍콩까지 갔으나, 淸나라 의 干涉과 妨害로 2年間 홍콩에서 머물다가 結局 다시 召喚되어 돌아왔다. 以後 1889年 宮內府 別軍職(宮內府別軍職), 1893年 漆谷府使를 歷任하고, 1894年 에는 甲午更張 으로 內務部 土木局長에 拔擢되어 서울 鍾路와 정동 一帶 및 六曹 앞과 南大門 사이의 道路를 整備하고 京城府 탑골公園 (파고다 公園) 公使의 監督을 맡아 完工시켰다. 以後 흥화학교 (興化學校)에서 敎師로 英文法과 局社(國史)를 가르치고 獨立協會에 加入했다. 1895年 에는 周邊 調整 官僚들의 反對에도 不拘하고 漢城府 의 民家를 整備, 허물고 道路를 整備하여 길을 닦았다. 그뒤 1896年 2月 官職을 辭退하였다.

啓蒙, 救國 運動 編輯

獨立協會, 獨立新聞 活動 編輯

1895年 12月 서재필 이 歸國하자, 以後 歸國한 서재필 (徐載弼), 유길준 , 윤치호 , 李承晩 等과 開化 運動을 펼친다. 또한 徐載弼과 함께 言論社 創立을 推進한다. 1896年 초에는 서재필 , 윤치호 獨立新聞 創刊에 參與하고 獨立新聞 의 記者이자 筆陣의 한사람으로 活動하며 獨立精神을 鼓吹하였다. 그해 2月 俄館播遷 이 斷行되자 官職을 辭退하였다.

그해 別軍職으로 任命되었으나 閑職이었다. 1896年 7月 2日 서재필 , 윤치호 , 이상재 (李商在) 等과 獨立協會 의 創立總會에 參與했으며, 이때 南宮檍은 獨立協會의 中央委員 兼 首席 總務로서 또 書記가 되었다가 獨立協會 評議員, 司法 委員을 겸하였다. 1897年 官職을 辭退하였다. 한便 獨立協會 機關紙인 《大朝鮮獨立協會會報 (大朝鮮獨立協會會報)》의 發行에도 參加하였다.

1898年 (光武 1年) 獨立協會 關係로 投獄되었다가 釋放되었다.

言論 活動 編輯

그해 9月 나수연(羅壽淵), 幼根(柳瑾) 等과 함께 財政難에 허덕이던 윤치소 京城新聞 을 引受하고 다시 皇城新聞 社(皇城新聞社)를 創刊하여 社長이 되었다. 以後 皇城新聞 을 日刊紙로 發行하고 國漢文 混用體를 採擇했다. 그밖에 國民 啓蒙과 獨立協會 活動을 支援하는 데 힘을 쏟았다. 大韓帝國의 政治體制를 專制君主制에서 立憲君主制로 改革, 議會를 設立하고 大大的 改革을 斷行해야 된다는 主張을 하며 獨立協會運動과 萬民共同會 의 指導者로 活動하다,

1898年 11月 王黨派로부터 王政打倒와 共和政 을 樹立하려 한다는 理由로 彈劾당하고 17名의 指導者와 함께 京城府 外郭에 숨었으나 結局 警務廳 刑事들에 依해 逮捕되었다. 1899年 12月 獨立協會 가 强制로 解散당하자 言論 活動에만 專念하였다. 1900年 7月 皇城新聞 러시아 日本 의 韓國分割說을 主張하고 이를 飜譯하여 外國 新聞에서 옮겨 실어, 러시아와 日本의 韓國 侵略 野慾을 暴露하는 論評을 揭示했다가 警務廳에 逮捕, 拘禁되었다.

啓蒙, 開花 活動 編輯

1902年(光武 5年) 5月에도 皇城新聞 에 日本이 ' 1894年 東學亂 以來 朝鮮 을 侵略해 들어오면서 러시아와 맺은 條約이라며 러日協定 의 性格을 論駁한 社說을 실었다. 이 事件으로 皇城新聞 總務 羅壽淵과 함께 다시 警務廳에 逮捕, 拘束되어 拷問을 當하다가 4個月 만에 釋放되었다.

1902年 에는 러시아 帝國 日本 帝國 의 韓國 分割說과 러日 協定을 攻駁하였으며, 1903年 領官(領官)을 지낸 유동근(柳東根)李 '皇城新聞 社長이던 南宮檍과 新聞社 總務 羅壽淵 等과 함께 日本 으로 亡命한 박영효 (朴泳孝) 等과 公募,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하였다'고 謀陷하였다. 이 때문에 다시 警務廳에 拘束되었으나 嫌疑 없음으로 4個月 뒤에 釋放되었다. 出獄한 뒤 皇城新聞 社長職을 辭任하였다.

1903年 3月 高宗의 懇曲한 要求로 特別히 성주牧師로 赴任하였다. 以後 성주牧師와 1904年 襄陽郡守를 歷任하면서 腐敗한 土豪들과 討索질을 일삼는 鄕里들을 嚴히 團束하여 處罰하였으며 調整 高官들의 非理를 彈劾하기도 했다. 江原道 襄陽郡守 在職 中 弊習打破와 斷髮令, 新式 學校 誘致, 道路 整備, 病院 誘致 等을 推進하였다. 1905年 11月 乙巳保護條約 이 締結되자 條約의 不當함을 諫하다가 失敗하자 官職을 辭退하였다. 1906年 2月 다시 襄陽郡守로 復職하여 愛國啓蒙運動에 參加하여, 1907年(光武 10年) 7月 襄陽의 東軒 뒷山에 襄陽에 현산학교 (峴山學校)를 設立하고 新敎育을 實施하였다. 1907年 11月에는 권동진(權東鎭), 여병현(呂炳鉉), 幼根, 유길준 , 李愚英(李宇榮), 오세창 (吳世昌), 尹孝貞 (尹孝定), 안국선 , 장지연 , 鄭雲復(鄭雲復), 홍필주(洪弼周), 윤치호 等과 大韓協會 를 組織하고 大韓協會 會長이 되었다. 이어 機關誌로 大韓協會月報와 大韓民報를 發行하였다. 1907年 7月 日本 헤이그 特使 派遣 事件 을 理由로 高宗 에게 退位 壓力을 加하여 辭退시키고 이완용 , 박제순 等과 丁未七條約 을 締結하자 이를 反對하다가 結局 官職을 辭任하고 洪川 耗穀으로 落鄕하였다.

1908年 (隆熙 2年) 4月 江原道 地方의 愛國啓蒙運動團體로 관동학회(關東學會)를 創立하였으며 1908年 , 敎育 啓蒙 雜誌인 교육월보 를 刊行하였다. 1909年 관동학회의 會長이 되었으며 江原道 내 신문물, 新式 學校의 建立과 新式 敎育을 普及하는 努力을 기울였다.

日帝 强占期 活動 編輯

敎育 啓蒙 活動 編輯

1910年 (隆熙 4年) 10月 韓日 合邦 條約 이 締結되자 培花學堂 (培花學堂)의 한글 , 歷史 , 家庭 敎師가 되고 1911年 基督敎 에 入敎하였다. 培花學堂 敎師로 있으면서 《家庭敎育》 《新編言文體法(新編諺文體法)》 等 敎科書를 지었고 '우리의 歷史', '諺文 體法', '家庭 敎育', '無窮花 地圖', '育兒法' 等의 冊을 執筆, 發刊하고 詩와 노래를 지었다. 1912年부터는 相同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院長을 겸하면서 獨立思想 鼓吹, 愛國歌社 普及, 한글書體 創案 및 普及에 힘썼다.

1910年 부터 培花學堂 과 相同청년학원 敎師로 在職하다, 1918年 健康이 惡化되면서, 親知들의 勸告에 따라 鬱寂함을 달래기 위해 江原道 洪川郡 (洪川) 서면 모곡리 보리울로 落鄕하여 1919年 9月 耗穀(牟谷)에 敎會와 모곡학교를 세웠다.

落鄕 初期에는 敎會를 設立한다 하여 住民들의 偏見과 誹謗에 시달리기도 했다. 文盲 改善이 必要하다고 본 그는 20代에서 30,40代의 學生들도 받아서 가르쳤다고 한다. 낮에는 學校 敎師로 밤에는 部落의 마을 指導者로 活動하고 週末에는 敎會에서 說敎를 하였다. 또한 朝鮮이야기 와 同史略 等을 執筆, 刊行하였다. 後에 모곡학교는 總督府 學制 改編에 依해 漢書國民學校와 한서중학교로 分離되었다.

그는 洪川郡 모곡리 유리酸에 올라 每日 '不義의 日本을 이 땅에서 물리쳐 住所서.', '이 民族에게 不義에 屈하지 않는 힘을 주소서.'하고 每日과 같이 祈禱하였다 한다. 또한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로 始作하는 三千里半島 錦繡江山을 비롯한 몇몇 노래와 詩 等을 直接 作詞 作曲하였다. 그는 學校 안에 無窮花 苗圃를 만들어 나라꽃인 無窮花를 全國에 普及하기 위해 努力하였다. 또한 勞動과 愛國心을 主題로 한 讚頌歌와 詩, 歌詞 等을 지어 全國의 敎會와 基督敎界 學校들에 普及하였다. 特히 그가 지은 窓가(唱歌) 家事 無窮花동산, 기러기 노래, 朝鮮의 노래, 運動家, 朝鮮地理가(朝鮮地理歌) 等은 民間에 널리 流行하였다.

1918年 , 南宮檍은 自身의 先鄕인 江原道 洪川郡 서면 모곡리에 내려와 耗穀 監理敎會를 세우고 傳道師로 牧會하면서 더불어 敎會內에 4年制 普通學校 를 設立하였다. 그는 '無窮花 심기 運動'을 大大的으로 펼치고 無窮花 苗木을 가꾸어 普及하였으나 日帝는 無窮花 苗木 8萬株를 불태우고, 이들을 拘束하였으며, 學校는 公立學校로 强制 편입시켜 버렸다.

投獄과 釋放 編輯

그뒤 〈無窮花 苗圃〉(苗圃)를 만들었으며 1933年에는 無窮花동산이라는 노래를 지어 學生들에게 가르쳤다는 罪目으로 逮捕되었다가 8個月만에 풀려났다. 그러나 假釋放된 뒤 1933年 9月 基督敎 系列 獨立運動 祕密結社인 十字架黨 (十字架黨)을 組織, 活動하다가, 1933年 12月 , 總督府 警察의 不審檢問에 걸려, 洪川 모곡리 無窮花 事件 [1] 으로 飛火되면서 洪川警察署로 넘겨졌다가 京城府 西大門刑務所 로 넘어가 服役한다. 一齊 가 民族 精神을 抹殺하기 위하여 日章旗 벚꽃 을 普及하고 奬勵하려는 것에 抗拒해 當時 모곡리의 監理敎 傳道師 로 일하던 南宮檍은 그의 同志들과 더불어 民族精神 高揚을 위해 無窮花 苗木을 全國에 配布하였다.

最後 編輯

그뒤 朝鮮總督府 警務局과 學務局의 懷柔를 받았으나 모두 拒絶하고 拷問을 當하였다. 1935年 , 服役 中 病으로 釋放되어 開城 윤치호 自宅에서 얼마間 療養하다가 故鄕인 洪川 으로 落鄕하였다. 著書로는 《同史略(東史略)》, 《朝鮮이야기》, 《家庭敎育》, 《朝鮮語補充(朝鮮語補充)》, 《新編言文禮法》, 《朝鮮語文法(朝鮮語文法)》 等이 있으며 이 中에는 基督敎系列 學校의 敎科書, 敎材로도 活用되었다. 釋放된지 4年 만인 1939年 4月 5日에 拷問 後遺症 等으로 死亡하였다.

1937年 1月 夫人 梁氏의 葬禮式을 치른 뒤 그는 弟子들과 親知들에게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과일나무 밑에 묻어 거름이나 되게 하라"는 遺言을 남겼다.

事後 編輯

  • 弟子들에 依해 洪川郡 서면 모곡리 耗穀 점말 앞山 先塋下에 弟子들과 地域有志들에 依해 葬禮式이 擧行된 뒤 安葬되었으며 墓所 近處에 特別히 神道碑 가 세워졌다. 解放 後 1966年 江原道 洪川郡 書面 모곡리 468-1番地 산 큰말교회 뒤便으로 移葬되었으며, 성역화되었다.
  • 1962年 3月 1日 大統領 表彰이 追敍되고 1977年 建國訓長 國民腸이 追敍되었다.
  • 그해 江原道 道民들의 誠金과 政府의 支援下에 琉璃峯 近處로 다시 移葬하고 聖域化하였다.

咀嚼 編輯

  • 桶史略(同史略, 東史略) 5卷
  • 죠션니약이 (朝鮮이야기) - 兒童用 韓國史
  • 기러기
  • 朝鮮의 노래
  • 讚頌歌 ‘三千里 半島 錦繡江山’(統一讚頌歌 371張) [2] - 一部 歌詞가 沈熏 의 小說 《 상록수 》의 청석골 學校 落成式 場面에 言及되어 있다 [3] .

家計 編輯

같이 보기 編輯

各州 編輯

  1. 十字架黨 事件으로 불린다.
    1. 三千里 半島 錦繡江山, 하나님 주신 동산. 三千里 半島 錦繡江山, 하나님 주신 동산. 이 동산에 할 일 많아, 四方에 일꾼을 부르네. 곧 이날에 일 가려고 누구가 對答을 할까?
    2. 三千里 半島 錦繡江山, 하나님 주신 동산. 三千里 半島 錦繡江山, 하나님 주신 동산. 봄 돌아와 밭갈 때니 四方에 일꾼을 부르네. 곧 이날에 일 가려고 누구가 對答을 할까?
    3. 三千里 半島 錦繡江山, 하나님 주신 동산. 三千里 半島 錦繡江山, 하나님 주신 동산. 穀食 익어 거둘 때니 四方에 일꾼을 부르네. 곧 이날에 일 가려고 누구가 對答을 할까?
    後斂: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三千里 江山 위해 하나님 命令 받았으니 半島 江山에 일하러 가세.
  2. 귀에 익은 손風琴 소리가 들리며, '三千里 半島 錦繡 江山'을 부르는 讚美 소리가 일어났다. 그제야 將來는 活氣가 돌기 始作하는데,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목청을 높여,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하고 소리를 지를 때는, '그런 讚頌歌 는 꽤 좋군.'하고 동혁이度 따라 부르고 싶은 衝動을 느꼈다.

    ??《상록수》, 第12張

參考 資料 編輯

  • 김세한, 《翰西南宮檍先生의 生涯》 (翰西南宮檍先生記念事業會, 1960)
  • 윤치호, 《尹致昊 日記 1916~1943:한 知識人의 內面世界를 통해 본 植民地時期》 (김상태 便역, 人物과 思想史, 2001)
  • 피정만, 〈漢書 南宮檍과 江原道 近代敎育〉,《講院文化硏究 11》, (강원대학교, 1992)
  • 김동면, 〈漢書 南宮檍의 歷史觀〉, 《韓國史硏究 46》, 1984
  • 鄭鎭奭, 〈남궁억: 皇城新聞 初代 社長〉 (圖書出版 기파랑 2014)

外部 링크 編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