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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州 복암리 古墳群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羅州 복암리 古墳群

羅州 복암리 古墳群 (羅州 伏岩里 古墳群)은 大韓民國 全羅南道 羅州市 다시면 복암리에 있는 三國時代 무덤들이다. 1998年 2月 20日 大韓民國의 史跡 第404號로 指定되었다.

羅州 복암리 古墳群
(羅州 伏岩里 古墳群)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私的
種目 私的 第404號
( 1998年 2月 20日 指定)
面積 25,090m 2
時代 三國時代
位置
나주 복암리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나주 복암리
羅州 복암리
羅州 복암리(大韓民國)
住所 全羅南道 羅州市 다시면 복암리 873-17番地 外
座標 北緯 34° 59′ 42″ 東經 126° 39′ 0″ ? / ? 北緯 34.99500° 東京 126.65000° ? / 34.99500; 126.65000
情報 國家遺産靑 國家遺産포털 情報
羅州복암리古墳群
(羅州伏巖里古墳群)
대한민국 全羅南道 記念物 (解止)
種目 記念物 第136號
( 1988年 12月 21日 指定)
( 1998年 2月 20日 解止)
情報 國家遺産靑 國家遺産포털 情報

槪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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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州 복암리에 있는 三國時代 무덤들이다. 95∼97年까지의 調査를 통해 하나의 封墳(3號무덤)을 비롯하여 32基의 다양한 무덤이 發見되었다.

무덤의 形態는 독무덤 (甕棺墓), 구덩式돌房무덤 (竪穴式石室墓), 돌덧널무덤 (石棺墓), 窟式돌房무덤 (橫穴式石室墓), 앞트기式돌房무덤 (橫口式石室墓)들로 多樣하다. 出土 遺物은 金銅製신발, 冠帽, 고리자루큰칼(三葉鐶頭臺도)를 비롯하여 여러 種類의 遺物이 出土되어 죽은 사람의 身分이 最高 支配層임을 보여준다. 4世紀 돌무덤에서 6世紀末∼7世紀初의 窟式돌房무덤까지 볼 수 있다.

(近肖古王(在位,346~375)때 馬韓의 一部地域을 倂合하였고, 聖王(在位, 523~554)때 馬韓 全體를 病 合하였다.)

긴세월 동안 다양한 무덤樣式을 한 封墳이 나타나는 것은 榮山江流域의 土着勢力인 독무덤界 사람과 百濟勢力인 돌房무덤界 사람이 融合하면서 封墳을 繼續 擴大한 結果이다. 卽 이地域에 進出한 백제勢力이 土着勢力인 馬韓勢力을 支配한 決定的 資料로서 4∼7世紀 集團무덤 性格과 무덤變遷過程 硏究에 重大한 資料를 提供해 주고 있다. 特히 돌房무덤과 독무덤은 盜掘이 되지 않아 屍體를 묻는 方法 및 遺物硏究의 基準을 提示할 수 있는 重要한 遺跡이다.

現地 案內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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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墳은 三國時代 以來, 社會的 地位나 身分이 높았던 支配層의 무덤을 말한다. 이곳에는 4基의 古墳이 있다. 이 地域은 榮山江의 本流를 낀 丘陵地帶로서 元來 3期 程度가 더 있었으나, 耕地整理를 하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3號墳에서는 榮山江流域에서 確認되는 옹礦苗 橫穴式石室墓, 石槨甕棺墓 等 7種類의 墓祭는 勿論 金銅신발과 銀製冠飾 큰칼 金귀고리 等 다양하면서도 最高의 權威를 象徵하는 遺物 790點이 出土되었다. 이와 같이 다양한 遺物이 出土된 것은 盜掘되지 않은 狀態에서 發掘調査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1]

복암리 3號墳은 甕棺 (土器 缸아리棺) 中에서 이른 時期(3世紀)에 該當하는 甕棺墓 를 비롯하여 橫穴式石室墳 (窟式 돌房무덤 中에는 7世紀 前半까지 내려오는 墓祭가 한分區 안에서 確認되고 있어 3世紀 後半에서 7世紀 前半까지 400餘年間 同一한 文化的 傳統을 지닌 集團에 依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斟酌된다. [1]

이렇게 한分區 안에서 다양한 墓祭가 確認되는 複合墓祭古墳은 韓國에서 처음 確認된 事例이다. 이를 通해서 榮山江 流域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多腸(多葬)과 大型분구의 聲討方法 過程 各 墓祭間의 關係, 甕棺墓와 夕食分의 變遷過程, 賣場方法 및 副葬遺物, 日本과의 關係, 榮山江流域 土着勢力과 백제와의 關係 等 只今까지 풀리지 않은 榮山江流域 古代史 硏究와 糾明에 決定的 資料를 提供하는 重要한 古墳이다. [1]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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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現地 案內文 認容

參考 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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