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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通精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金通精

高麗의 무신

金通精 (金通精,?? ~ 1273年 )은 高麗 元宗 三別抄 (三別抄)의 將軍으로 元宗 11年( 1270年 ) 裵仲孫 을 中心으로 强化 에서 蜂起해 抗몽(抗蒙)의 旗幟를 들어 珍島 를 據點으로 몽골과 高麗 政府에 抗拒하다 鎭壓된 뒤 濟州島로 달아나 繼續하여 몽골에 抵抗하였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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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別抄는 몽골과 和議를 맺은 高麗 朝廷의 出六環刀 및 三別抄 解散 命令을 拒否하고 江華島에서 蜂起, 西海의 沿岸 一帶를 공략하면서 南下하여 珍島 를 據點으로 高麗 陸地部 沿岸의 漕運路를 遮斷하고 提州를 攻擊해 後方 基地로 삼으며, 高麗의 內陸 地域을 攻掠해 몽골軍과 高麗 官軍을 죽이는 等 勢力을 떨쳤으나, 元宗 12年( 1271年 ) 5月 15日 高麗의 김방경 , 몽골의 勳둔 等이 거느린 與·몽 聯合軍이 進度를 陷落시켰다. [1] 裵仲孫을 비롯하여 많은 指導者가 戰死하자 金通精을 爲始한 三別抄들은 軍士를 이끌고 앞서 三別抄가 掌握하고 있던 濟州道 로 들어갔다. 《元士》勸第208 熱前提95 外耳1 耽羅에는 支援 6年(1269年) 7月에 몽골이 明威將軍 度統領 脫他我·무덕將軍 通靈 王國窓·武略將軍 副統領 流乞을 보내 高麗로 가서 耽羅 等地의 길들을 살펴 보게 하면서 高麗國王 王式(元宗)에게 管理를 뽑아 길 案內를 하라고 하였다는 記錄에 이어 "高麗의 반炙 林衍 (林衍)의 盞當人 金通精이 耽羅로 숨어 들어갔다 [2] 고 적고 있다.

濟州로 들어간 金通精 麾下 三別抄 勢力은 濟州道 本고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位置한 항파두리性 을 據點으로 삼았는데, 이는 高麗 以前부터 濟州 地域을 支配해오던 耽羅 성주와 王子 等 濟州의 土着 勢力들과의 關係를 考慮한 措處였다. 高麗의 元宗은 11月 23日 이창경 문선렬 을 新年賀禮社 兼 世子 (諶)의 婚姻을 許諾한 것에 對해 死義하는 使節로 몽골로 보내면서, 濟州로 달아난 三別抄 軍勢가 高麗 陸地部의 여러 섬과 浦口 사이를 橫行하며 陸地로 나올까 念慮되니 그들을 殲滅해야 한다고 要請하였다. [3] 한便으로 元宗 13年( 1272年 ) 3月 9日 金勳 (琴熏)을 濟州逆賊招諭使로 삼아 散員 李霆(李貞)과 함께 耽羅로 보내 三別抄 勢力들을 初有하게 하였으나, 金훈은 步馬島 隣近에서 三別抄에 抑留되어 추자도 까지 끌려갔다가 種子와 船員들은 殺害되고 타고 있던 배도 빼앗겼으며, 金勳 自身은 몇 안 되는 生存者들과 함께 다 낡아 못 쓰게 된 배 한 隻에 태워져 바닷가에서 한 달餘를 漂流하다 4月 29日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4] 또한 三別抄는 3月과 4月에 會寧郡 을 쳐서 漕運船 4隻을 掠奪하고 이어 解除縣 과 海南縣에도 侵入하였으며 [5] 5月에는 大砲 (大浦)를 쳐서 漕運船 13隻을 掠奪해가고 [6] 20日에는 會寧과 탐진현에도 出沒하는 等 等 韓半島 陸地部에 對한 攻勢를 멈추지 않았으며, 慶尙道 地域에서는 三別抄의 諜者가 慶尙道按察使에 依해 逮捕되기도 했다. [7]

6月에는 韓半島 西南海뿐 아니라 忠淸道 沿岸까지 三別抄가 出沒하였는데, 高麗史 元宗 13年(1272年) 6月 2日(戊子)組 全羅都指揮使가 開京 調整에 "三別抄의 敵船 여섯 隻이 안行糧 (安行梁)을 지나 (景氣 方面으로) 올라갔다"고 報告하여 開京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8] 6月 14日에 三別抄의 勞效制라는 人物이 陸地部로 도망쳐 와서 開京 調整에 "逆賊(三別抄)李 배 11隻에 軍事 390名을 나누어 태워서 慶尙, 全羅道의 漕運船을 奪取하려고 하며, 또 沿海의 주현을 쳐서 陷落시키려 한다"고 알렸다. 26日 高麗 調整은 郎將 이유비를 元에 보내어 三別抄가 韓半島 陸地部 沿岸을 侵略해 漕運船을 掠奪하고 원이 日本遠征을 推進하면서 이에 動員할 배를 建造하는 工事 亦是 三別抄의 攻擊으로 어렵게 되었음을 알리며 원의 軍事를 全州와 羅州로 派遣해 줄 것을 要求하였다. 이 時點까지 三別抄가 高麗 朝廷에 입힌 被害는 倍 20隻에 糧穀 3,200섬 掠奪에 12人 被殺, 24人 拉致였다. [9] 29日 高麗 調整은 將軍 羅裕 를 보내 1550名의 募兵한 軍士를 거느리고 全羅道 方面에서 三別抄를 攻擊하게 하였다. [10]

8月 1日 圓에서는 示威親軍千戶 王잠을 보내어 紅茶區와 함께 耽羅를 攻擊하기 위한 戰略을 議論하게 하였는데, 紅茶구는 金通精의 一黨이 開京에 많이 있다며 그들을 시켜 懷柔하게 한 다음 듣지 않으면 그때 가서 치자고 主張하였고, 紅茶구는 羅州度(全羅道)로 가서 電線 乾燥를 監督하고 또 濟州로 使者를 보내 그들에게 降伏을 勸誘하였다. [11] 그러나 濟州 三別抄에 降伏을 勸誘하러 갔던 郎將 金瓚(金贊) · 이소(李邵), 三別抄 將軍 誤認節 (吳仁節)의 一族인 烏桓(吳桓)·오문(吳文)·五百(吳伯) 等 5名은 濟州에 到着하여 金瓚을 除外하고 모두 죽임을 當했다. 金瓚은 金通精의 조카였다. [12] 이어 三別抄는 全羅道의 貢納美 8百 섬을 掠奪하였다.

9月에 三別抄는 고란도 를 쳐서 傳함 6隻을 불태우고 배무이하던 匠人을 죽였으며, 배무이를 監督하던 高麗의 紅酒府使 이행검 (李行儉) 및 結成 (結城) 및 南浦 (藍浦) 等地의 監務를 잡아갔다. [13] 이는 中道按察使에 依해 高麗 朝廷에 보고 되었으며, 다음날 高麗 調整은 近仗將校를 中道로 보내어 三別抄의 動態를 살피게 하였다. 11月 15日에는 高麗의 安南都護府( 全州 )를 攻擊해서 高麗의 안남부社 共有 (孔愉) 부처를 잡아갔으며, 또한 합포를 쳐서 傳함 20隻을 불사르고 몽골의 烽卒 4名을 잡아가기도 하였다. [14] 24日에는 거제현 에 侵入해 戰艦 3隻을 불사르고 縣令을 잡아갔으며, 靈興島 隣近에까지 出沒해 附近 地域을 橫行하여 元宗이 원의 怨讐 勳둔 에게 50期(騎)를 請해 開京의 宮闕을 宿衛하게 要請할 程度였다. [15]

濟州 三別抄의 攻勢에 韓半島 陸地部 沿岸은 거의 텅 비다시피 했으며, 景氣 사이의 道路가 통하지 못할 程度였다. [16] 또한 三別抄는 韓半島 沿岸에서 이루어지던 戰艦 乾燥를 妨害하는 等 원이 推進하던 日本遠征 計劃에도 蹉跌을 가져왔다. 《元士》에는 이 해 원의 中書省과 樞密院의 臣僚들이 濟州 三別抄와 日本 攻擊을 놓고 日本이 아직 거스를지 따를지의 情況을 確實하게 밝히지 않은 데다 耽羅國王(耽羅星州)李 일찍이 원에 照會한 적이 있는 만큼 耽羅國王을 내쫓고 섬을 차지한 金通精을 먼저 치는 것이 優先이라는 論議가 決定되었고, [17] 11月 15日 원은 屯田軍 2千 名, 韓君 2千 名, 高麗軍 6千 名에 이어 武威群 2千 名을 보태어 耽羅를 征伐하도록 하였다. [18] 高麗 朝廷은 12月 11日 원의 濟州 攻擊 方針과 軍事 6千 明과 船員 3千 名을 徵發하라는 要求를 傳達받고 15日에 樵軍別監을 各 道에 보내어 軍士를 徵集하게 하였다. [19] 이듬해 正月 4日 원 朝廷에서는 2月 初에서 3月 中旬까지의 期間에 耽羅를 征伐하는 것이 마땅하며, 耽羅를 치는 將軍으로는 勳鈍을 1等, 武威君의 精銳케바토르(鄭也可拔都, 定溫)를 2等, 車쿠(察忽, 紅茶區)를 3等으로 하고 쿠빌라이 칸의 認准을 받았다. [20]

元宗 14年( 1273年 ) 正月 22日, 三別抄 船團 10餘 隻이 낙안군 에 쳐들어왔으며, 28日에는 합포에 쳐들어 와서 傳함 32隻을 불사르고 몽골 兵士 10名을 잡아죽였다. [21] 2月 20日 高麗 調整은 김방경을 中軍行營病魔怨讐로 삼아 水軍 1萬餘 名을 거느리고 勳鈍과 紅茶區와 함께 提州를 攻擊하게 하였으며, 30日에는 大將軍 김백균 (金伯鈞)과 板刻文士 이신손 (李信孫)을 慶尙道와 忠淸道의 수로방호사로 삼고 원 調整에 三別抄 平定 뒤에는 濟州 사람들을 陸地部로 나오게 하는 일 없이 그대로 生業에 從事하게 해 줄 것을 要請해 受諾을 받아냈다. [22] 한便 반남현 에 駐屯하고 있던 高麗의 行營病魔元帥 김방경은 3月 20日 調整에 "敵(三別抄)李 耽羅縣(탐진현의 傲氣)에 들어와 방수산원 정국보 等 15名을 죽이고 郎將 五段 等을 잡아갔다"고 報告하였다. [23] 반남현에서 船團이 出發할 즈음에는 서해도에서 오던 傳함 20隻이 伽倻소도 에서 颱風으로 沈沒해 115名이 빠져 죽는가 하면 慶尙道 割當 戰艦 27隻도 風浪으로 沈沒해 [24] 全羅道 傳함 160餘 隻만으로 추자도에 머무르면서 바람을 살피던 김방경度 한밤中에 이르러 始作된 바람이 耽羅 가까이 이르러서는 더욱 거세지는 바람에 김방경 自身도 하마터면 죽을 뻔하였다.

元宗 14年( 1273年 ) 4月 28日 高麗의 怨讐 金方慶과 원의 經略使 勳둔·홍차구 等의 餘원 聯合軍 戰艦 160餘 隻이 耽羅에 到着하였다. 金方慶이 이끄는 中軍은 函덕포 에서 三別抄 軍士들과 交戰하였는데, 대정 고세화 等이 三別抄에 맞서 交戰하는 渦中에 高麗의 羅裕 가 이끄는 軍勢가 뒤이어 到着해 金方慶과 合勢하였고, 한便 餘원 聯合軍의 左軍 戰艦 30隻이 비양도 에서 곧장 三別抄의 本陣을 攻擊하였다. 三別抄 軍勢는 函덕포에 이어 비양도에서도 敗北하고 自省으로 退却하였으나, 聯合軍은 外城을 타 넘고 들어가서 불화살을 四方으로 쏘며 三別抄軍의 氣勢를 꺾었으며, 이때 三別抄로부터 降伏해 온 者가 敵(三別抄)은 이미 勢가 다해서 도망칠 생각만 하고 있음을 傳하였다.

守勢에 몰린 가운데 金通精은 無理 70名을 거느리고 漢拏山 으로 달아났고, 三別抄 將軍 이순공 (李順恭), 조시적 (曺時適) 等은 웃옷을 벗고 降伏하였다. 이로써 3年을 끌었던 三別抄 抗爭은 幕을 내렸다.

三別抄를 鎭壓한 뒤 김방경은 自省에 들어가 우두머리만 誅殺할 뿐 나머지는 해치지 않겠다며 濟州 百姓들을 慰勞하고, 三別抄 要因 김윤숙 (金允叔) 等 6名을 逮捕해 引渡邊에서 斬刑, 親堂 35名은 生捕하고 降伏한 無理 1,300名은 배에 나누어 싣고 歸還하였다. 앞서 三別抄에 잡혀갔던 안남부社 공유와 紅酒府使 이행검은 목숨을 건져 開京으로 歸還하였다. 한便 원은 實利百을 耽羅國招討使로 任命하고 陳辯群 1,700名을 駐屯시켰으며 해마다 모시抛 1百 匹을 工夫로 바치게 하였다. 耽羅國招討使는 뒤에 耽羅軍民度다루가치摠管部에서 다시 郡民按撫使로 고쳤으며, 耽羅摠管府 의 前身이 되었다.

尹6月 6日 耽羅에 머무르고 있던 高麗의 有進將軍 송보연 (宋甫演)李 高麗 朝廷에 金通精의 屍身을 찾아냈다고 報告한 [25] 것으로 보아 自決한 것으로 推定된다. 또한 三別抄의 將軍 김혁정, 이기 等 70名도 逮捕되어 紅茶區 앞으로 押送되었는데, 紅茶구는 그들을 모두 죽였다고 한다. 한便 支援 16年(1279年) 8月 己亥에 金通精의 조카 김온(金溫)李 잡혀 왔는데, 쿠빌라이 칸은 金通精은 이미 죽었다며 그를 赦免하게 하였다고 한다.

金通精 舌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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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通精은 江華島에서 태어났다. 傳說에 滿朔이 된 女人은 玉童子를 낳았는데, 아이는 온몸에 비늘이 돋아 있었고 겨드랑이에 작은 날개가 돋아나고 있었다고 한다. 正確한 理由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사람들은 質通情 으로 불렀다고 한다. 質이 金과 비슷하므로 金氏가 되었다고 한다. 金通精은 자라면서 활을 잘 쏘고 武藝에 뛰어나 三別抄을 이끄는 將軍이 되었다.

金通精은 全南 珍島, 光州 地域에서 몽골에 對抗하다가 高麗 官軍에 敗北하고 濟州島로 據點을 옮겼다. 濟州島 說話에 따르면 김방경 은 金通精을 죽이고, 그의 아내도 胎氣가 있자 불에 태워 誅殺했다고 한다. 高麗는 그를 叛亂者로 記錄하였으나 濟州島 사람들, 卽 民衆들에게 金通精은 外勢에 抵抗하는 自主的인 英雄으로 認識이 있어서, 金通精에 對한 여러 說話와 이야기가 傳해진다.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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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高麗史》勸第27 歲假題27 元宗 12年(1271年) 5月 丁丑(15日);《元士》權7 世祖本紀7 世祖 支援 8年 辛未(1271年) 5月 기유(17일) 및 같은 冊 勸第166 熱前提53 왕준
  2. 《元士》勸第208 熱前提95 外耳1 耽羅
  3. 《高麗史》勸第27 歲假題27 元宗 12年(1271年) 11月 癸未(23日)
  4. 《高麗史》勸第27 歲假題27 元宗 13年(1272年) 5月 甲申(27日)
  5. 《高麗史》勸第27 歲假題27 元宗 13年(1272年) 3月 戒喩(15日) 및 같은 冊 勸第27 歲假題27 同王 13年(1272年) 6月 임자(26日)組
  6. 《高麗史》勸第27 歲假題27 元宗 13年(1272年) 5月 辛酉(4日)
  7. 《高麗史》勸第27 歲假題27 元宗 13年(1272年) 5月 乙丑(8日)
  8. 《高麗史》勸第27 歲假題27 元宗 13年(1272年) 6月 2日(戊子).
  9. 《高麗史》勸第27 歲假題27 元宗 13年(1272年) 6月 임자(26日).
  10. 《高麗史》勸第27 歲假題27 元宗 13年(1272年) 6月 乙卯(29日)
  11. 《高麗史》勸第27 歲假題27 元宗 13年(1272年) 8月 初하루 丙戌;《元士》勸第154 熱前提41 홍복원
  12. 《高麗史》勸第27 歲假題27 元宗 13年(1272年) 8月
  13. 《高麗史》勸第27 歲假題27 元宗 13年(1272年) 9月 無盡(13日)
  14. 《高麗史》勸第27 歲假題27 元宗 13年(1272年) 11月 乙亥(21日)
  15. 《高麗史》勸第27 歲假題27 元宗 13年(1272年) 11月 無人(24日)
  16. 《高麗史》勸第27 歲假題27 元宗 13年(1272年) 6月 乙卯(29日) 및 같은 冊 勸第104 熱前提17 김방경列傳
  17. 《元士》勸第208 熱前提95 外耳1 耽羅兆
  18. 《元士》勸第7 本紀7 世祖4 支援 9年 妊娠(1272年) 11月 記事(15日)
  19. 《高麗史》勸第27 歲假題27 元宗 13年(1272年) 12月 乙未(11日) 및 期해(15일).
  20. 《원考慮記事》 支援 10年(1273年) 正月 4日
  21. 《高麗史》勸第27 歲假題27 元宗 14年(1273年) 正月 病者(22日) 및 壬午(28日).
  22. 《高麗史》勸第27 歲假題27 元宗 14年(1273年) 2月 癸丑(30日).
  23. 《高麗史》勸第27 歲假題27 元宗 14年(1273年) 3月 戒喩(20日).
  24. 《高麗史》勸第27 歲假題27 元宗 14年(1273年) 3月 己卯(26日) 및 같은 冊 김방경列傳
  25. 《高麗史》勸第27 世가 第27 元宗 14年(1273年) 尹6月 丙辰(6日)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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