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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박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김재박

大韓民國의 野球 選手

김재박 (金在博, 1954年 5月 23日 ~)은 前 KBO 리그 MBC 靑龍 LG 트윈스 遊擊手 이자 前 현대 유니콘스 LG 트윈스 의 監督이자 現 漣川 미라클 諮問委員으로 活動 中이며 選手 時節에는 그라운드의 여우 라고 불렸었다. 2010年 KBO 의 競技 運營委員으로 選任되었다. [1] 캥거루 번트 또는 개구리 번트를 한 選手로 잘 알려져 있다. 1979年 2月 10日 結婚한 夫人 정복희 氏이며, 1男 2女들 두고 있다.

김재박

基本 情報
國籍 大韓民國
生年月日 1954年 5月 23日 ( 1954-05-23 ) (70歲)
出身地 大韓民國 大邱廣域市 中區
신장 174cm
體重 77kg
選手 情報
投球·打席 우투右打
守備 位置 遊擊手 , 2窶籔
프로 入團 鳶島 1982年
드래프트 順位 元年 멤버 ( MBC 靑龍 )
첫 出張 KBO / 1982年 10月 2日
大邱 三星
마지막 競技 KBO / 1992年
獲得 타이틀
經歷

選手 經歷

코치 經歷

監督 經歷

大韓民國 國家代表팀
월드컵 1982年 서울

選手 時節 編輯

高校, 大學 時節 編輯

初等學校 5學年 때인 1965年 野球를 처음 接하여 始作했다. 耕耘中學校 를 卒業할 當時 경북고등학교 를 中心으로 大邱 地域의 高等學校들이 全盛期를 누리던 時節이었다. 그러나 相對的으로 身體가 작았던 김재박은 경북고등학교 入學에 失敗하자 서울 에 있는 대광高等學校 로 進學하여 서울 에서 高等學校 生活을 하게 된다. 대광高等學校 時節에는 그리 注目받지 못하였으나 배성서 監督을 筆頭로 한 新生 팀 영남대학교 에서 打擊과 走壘, 野球 센스, 및 守備力을 兼備한 注目받는 內野手 로 자리잡았다.

아마추어 & 實業 野球 時節 編輯

1977年 實業 野球 打擊 7冠王을 차지한 바 있으며, 1982年 世界野球選手權大會 優勝 멤버이기도 하다. 1982年 世界野球選手權大會 에서 優勝을 놓고 벌어진 日本 과의 마지막 競技에서 ‘ 캥거루 번트(또는 개구리 번트)’를 한 것으로 有名하다.

  • 캥거루 번트 (개구리 번트)

1-2로 지고 있던 8回 末 1死 3壘의 狀況에서, 日本 팀의 니시무라 投手 는 功을 밖으로 뺐는데, 김재박은 어우홍 監督의 사인을 스퀴즈 사인 인 줄 잘 못 알고 避치 아웃한 공에 번트 를 가져다 댄다. 當時 3壘 走者인 김정수는 미리 스타트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結果的으로는 safety squeeze 플레이가 됐다. 김재박이 이 공에 번트를 대기 위해 바깥쪽으로 뛰어오르는 바람에 後날 이 번트는 캥거루 번트 또는 개구리 번트 라 불리게 되었다. 번트 打毬는 3壘 쪽 內野 安打가 되었으며, 이 번트로 大韓民國 日本 과 劇的으로 2-2 同點을 만들었고, 이것을 始作으로 結局 限對話 의 3點 홈런으로 게임을 逆轉勝으로 이끈다. [2]

KBO 리그 活動 編輯

MBC 靑龍 & LG 트윈스 & 太平洋 돌핀스 時節 編輯

1982年 世界野球選手權大會 가 끝나자마자 프로 元年 시즌이 끝나 갈 무렵 MBC 靑龍 에 入團하여 1軍 3競技에 出戰했다. 김재박은 當時 野球 選手로서는 隱退할 나이였던 30歲 무렵이었음에도 不拘하고 攻擊, 守備, 走壘 플레이 兩面에서 華麗한 記錄을 남겼다. 1985年 盜壘王에 오르는 等 뛰어난 走壘 能力을 지니고 있었으며, 特히 進壘한 後 後續 安打가 나왔을 때 다른 選手들에 비해 한 壘를 더 進壘하는 能力이 돋보였다. 守備로서도 相對의 打毬를 미리 把握하여 守備 位置를 달리하는 高級 플레이를 선보였던 遊擊手 로도 有名하다. 現役 時節 遊擊手 部門 골든 글러브를 5回에 걸쳐 受賞하였다.

1982年 MBC 에 入團하여 1990年 MBC를 引受하여 創團한 LG 를 거치면서 1990年 韓國시리즈 첫 優勝의 榮光을 맛보았다. LG 트윈스 에서 2年 동안 活躍하고 난 뒤 LG 트윈스 球團에서 그에게 隱退를 勸誘했으나 그는 現役으로 더 活動하겠다는 意思를 밝혀 1992年 太平洋 돌핀스 로 아무런 代價 없이 넘겨졌다. 太平洋 돌핀스 에서의 김재박은 老衰化로 뚜렷한 活躍을 보이지 못하였고, 主로 플레잉 코치로 活動했다. 1992年 시즌이 끝난 뒤 太平洋 에서 隱退하고 코치 生活을 始作한다.

指導者 生活 編輯

太平洋 돌핀스 코치 生活 編輯

1992年 太平洋 돌핀스 에서 隱退한 그는 太平洋 돌핀스 에서 首席코치 提議를 받아 首席 코치를 맡았고, 이를 거치면서 정동진 監督을 이어 1996年 現代 의 創團 監督으로 赴任한다.

현대 유니콘스 時節 編輯

1996年 현대 유니콘스 의 創團 監督으로 赴任한 後, 創團 첫 해에 팀을 正規시즌 4位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시켰고 以後 韓國시리즈 에 올려 놓으며 底力을 보여 주었지만 해태 타이거즈 에 敗하면서 準優勝에 滿足해야만 했다. 以後 1998年, 2000年, 2003年, 2004年 모두 4次例나 正規 리그 및 韓國시리즈 優勝을 거머쥐었다. 현대 유니콘스 在任 期間(1996年~2006年) 동안 그는 1997年, 1999年, 2005年 單 3시즌만 포스트 시즌에 進出하지 못한 記錄을 除外한 나머지는 每年 현대 유니콘스 가 上位圈 成跡을 記錄하는 底力을 이끌었던 名將이었다. 2004年 시즌 中 5月 初에는 監督으로서 通算 700勝 을 記錄하기도 하였다. 다만, 1999年에는 中盤 以後 포스트시즌 進出과 距離가 멀어지자 8月 28日 쌍방울戰에서 先發勝으로 19勝을 거둔 [3] 에이스 정민태 를 팀 事情上 舊怨으로도 出擊시켰으며(4월 28日 한화戰 세이브 [4] , 7月 12日 해태戰 救援勝 [5] , 9月 27日 두산戰 세이브 [6] , 9月 29日 쌍방울戰 세이브 [7] ) 이 같은 코칭스태프의 마구잡이 起用 탓인지 정민태 는 컨디션 調節에 失敗한 데다 及其也 막판 3次例의 先發登板에서 3敗만 記錄했고 結局 10月 7日 쌍방울戰에서 先發勝으로 千辛萬苦 끝에 20勝을 記錄할 수 있었으나(1구원승이 包含되어 있어서 先發 20勝은 아님) 팀은 포스트시즌 進出과 距離가 멀었으며 正規시즌 MVP도 홈런,打點 2冠王인 三星 李承燁 에게 빼앗기는 受侮를 當했다. 게다가, 2000年에는 정민태 金守經 임선동 이들 같은 所屬 投手 3名을 共同 多勝王이 되도록 [8] 調整인지 造作인지 모를 行爲까지 했다는 非難을 샀고 이 탓인지 정민태 는 3年 連續 最多 先發勝(98年 17, 99年 19, 2000年 18)을 記錄하긴 했으나 모두 正規시즌 MVP와 距離가 멀었으며 2003年에는 多勝-勝率 2冠王에 올랐지만 防禦率이 2點臺 以上(3.31)이라 그 해 當時 아시아 最多홈런 新記錄을 세운 [9] 홈런-打點 2冠王 李承燁 한테 正規시즌 MVP를 빼앗겨야 했다.

LG 트윈스 時節 編輯

2006年 10月 20日 契約 期間 3年, 契約金 5億원 , 年俸 3億 5,000萬 원 等 總額 15億 5千萬원을 받고 그의 프로 첫 親庭팀인 LG 트윈스 의 第 7代 監督으로 赴任했다. 이 契約 額數는 KBO 리그 監督으로는 史上 最大 規模였다. 처음 監督으로 赴任했을 當時 球團으로부터 커다란 期待와 注目을 받았었다. 2007年 正規 시즌 5位를 記錄하여 可能性을 보였으나, 이듬해 2008年에 最下位로 떨어졌고 2009年 7位를 記錄하여 期待와 달리 自身의 親庭 팀에서 監督 在任 期間 동안 한 番도 포스트 시즌에 進出하지 못하는 等 性的 不振에 시달려야 했다. 結局 2009年 正規 시즌 後 契約이 滿了되어 한때 현대 유니콘스 에서 코치로 함께하였고 當時 두산 베어스 2군 監督이던 박종훈 에게 監督 자리를 넘기고 물러났다. 그의 在任 마지막 해에는 뼈아팠던 金相賢 의 트레이드와 더불어 選手團 內에서 심수창 , 서승화 等의 事件이 터져 選手團 雰圍氣도 어수선했다.

2009年 5月 9日, 三星 라이온즈 와의 競技에 勝利하여 監督 最年少 通算 900勝 을 達成하였다. [10]

大韓民國 野球 國家代表팀 監督 編輯

그는 國家代表팀 監督으로 2次例 選任되었으나, 2次例 모두 失敗하여 不名譽만 남긴 채 退陣하였다. 2004年 아테네 올림픽 豫選에서 大韓民國 野球 國家代表팀 의 監督을 맡았으나 日本 삿포로 에서 열린 아시아 地域 豫選에서 臺灣 日本 에 敗해 올림픽 本選 進出에 失敗했으며, 2006年 아시안 게임 에서 다시 代表팀 指揮棒을 잡아 아테네 올림픽 豫選 脫落의 雪辱을 다짐했으나, 臺灣 과 社會人 野球 選手로 이루어진 日本 에게 敗하는 不振 끝에 銅메달에 그쳤다. [11]

에피소드 編輯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 編輯

2005年 시즌 初盤, 지난 시즌 最下位였던 롯데 자이언츠 는 氣勢를 올리며 上位圈에 랭크되고 있었고 지난 시즌 優勝 팀이었던 현대 유니콘스는 뜻밖의 不振으로 下位圈에 처져 있었다. 그 時節 그는 한 스포츠新聞과의 인터뷰에서 "5月이 되면 내려가는 팀이 나온다."라고 말했다. [12] 그의 發言대로 롯데 자이언츠는 여름 以後부터 順位가 下落하여 포스트시즌 進出에 失敗하였다.

그런데 그가 LG 트윈스 의 監督으로 赴任한 以後, LG의 成績 推移는 시즌 上半期에는 上位圈에 랭크되었다가 날씨가 더워지면서 負傷者와 不振選手가 續出하며, 차츰 힘에 부쳐 下位圈으로 시즌을 마무리하는 樣相이 反復되었다. 그러자 그의 예전 發言은 부메랑이 되어 그가 監督한 LG 트윈스에 그대로 되돌아왔고,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는 形態로 變形되어 有名稅를 타게 되었다. [13]

出身學校 編輯

經歷 編輯

등番號 編輯

通算 記錄 編輯

打擊 成績 編輯

鳶島 所屬 京畿 打數 得點 안타 홈런 打點 盜壘 볼넷 三振 打率 長打率
1982 MBC 3 13 0 0 0 0 0 0 3 .000 .000
1983 97 373 53 108 5 46 34 52 23 .290 .399
1984 91 343 53 103 7 37 26 41 33 .300 .423
1985 100 377 54 118 3 36 50 44 29 .313 .393
1986 102 386 67 102 4 43 38 43 36 .264 .363
1987 100 399 53 113 1 24 33 44 26 .283 .373
1988 99 409 49 109 2 26 25 29 23 .267 .330
1989 101 357 64 102 3 27 39 57 33 .286 .345
1990 LG 109 381 49 91 2 45 14 38 24 .239 .289
1991 82 247 34 65 0 18 15 30 23 .263 .332
1992 太平洋 82 276 36 61 1 19 10 31 26 .221 .272
通算 成跡 966 3561 512 972 28 321 284 409 279 .273 .353

投手 成績 編輯

鳶島 所屬 勝利 敗戰 平均自責點 京畿 세이브 이닝 被安打 失點 自責點 被홈런 四四球 脫三振
1985年 MBC 1 0 0.00 1 0 0 2/3 0 0 0 0 0 0
通算 成跡 1 0 0.00 1 0 0 2/3 0 0 0 0 0 0

같이 보기 編輯

各州 編輯

  1. 김재박 前 LG 監督, KBO 競技 運營委員 活動 - 스포츠조선
  2. 나의 젊음, 나의 사랑 프로野球 현대 監督 김재박 (10) 韓國野球社 남은 '캥거루 번트'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 京鄕新聞 1998年 2月 15日
  3. 정유미 (1999年 10月 8日). “40日만에 아홉數 脫出” . 京鄕新聞 . 2020年 3月 3日에 確認함 .  
  4. 장환수 (1999年 4月 29日). “LG 차명석"사랑해요 中間繼投 " . 東亞日報 . 2020年 3月 3日에 確認함 .  
  5. 聯合 (1999年 7月 13日). “정민태 20勝投手 誕生 豫告 現代,해태 2代1勝(승)” . 每日經濟 . 2020年 3月 3日에 確認함 .  
  6. 손원제 (1999年 9月 28日). “프로野球 홍현우"나도 30-30클럽 " . 한겨레新聞 . 2020年 3月 3日에 確認함 .  
  7. 이인우 (1999年 9月 30日). “프로野球 로마이어 傭兵 最高大砲” . 한겨레新聞 . 2020年 3月 3日에 確認함 .  
  8. 장환수 (2012年 9月 8日). “[O2/장환수의 數포츠]內 食口 타이틀 챙기기… 野球監督 ‘4金의 祕法’” . 東亞日報 . 2020年 3月 3日에 確認함 .  
  9. 박태훈 (2017年 10月 2日). “[이番 週 歷史 속 스포츠] 2003年 10月 2日 이승엽 56號 홈런, 아시아 新” . 世界日報 . 2020年 3月 3日에 確認함 .  
  10. 金成願 (2009年 5月 10日). “김재박 監督, 史上 5番째 通算 900勝 達成” . 《일간스포츠》 . 2017年 12月 14日에 確認함 .  
  11. 'Why not 손시헌...??', 《OSEN》, 2006, 9, 7
  12. 김형태 記者 (2005年 4月 27日). ' 만만디' 現代, '理由가 있었군 ' . 조이뉴스24 . 2013年 1月 17日에 確認함 .  
  13. 한세희 記者 (2012年 8月 16日). “인터넷 이디嚴<108>DTD” . etnews . 2013年 1月 17日에 確認함 .  

外部 링크 編輯

第1代 현대 유니콘스 監督
1995-09-01~2006-10-19
後任
김시진
前任
양승호 (代行)
第8代 LG 트윈스 監督
2006-10-20~2009-9-26
後任
박종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