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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김일손

朝鮮 中期의 文官으로 金宗直의 文人이었으며 史觀을 지냈으며 戊午士禍에 犧牲되었다.

김일손 (金馹孫, 1464年 2月 13日 ( 陰曆 1月 7日 )~ 1498年 8月 14日 ( 陰曆 7月 27日 ))은 朝鮮 成宗 · 연산군 때의 文臣이며 學者, 士官, 詩人이다. 本貫은 金海 이며, 字는 계운(季雲), 號는 탁영(濯纓) [2] , 소미산인(少微山人)이다. 諡號는 文民(文愍)이다.

김일손
出生 1464年 2月 13日 ( 陰曆 1月 7日 )
朝鮮 慶尙道 淸道郡 상북면 韻桂洞
死亡 1498年 8月 14日 ( 陰曆 7月 27日 )
死因 陵遲處斬
性別 男性
國籍 朝鮮
別稱 者(字)는 계운(季雲) 號는 탁영(濯纓), 소미산인(少微山人) 諡號는 文民(文愍)
學歷 이맹전 에게서 修學하다 김종직 에게서 數學
職業 文臣, 學者, 政治人, 作家
宗敎 儒敎 ( 性理學 )
父母 아버지 김맹 , 어머니 李氏
配偶者 于氏 , 金氏
子女 2男 諜者와 兩者 大將
탁영校誌 [1] (濯纓敎旨)

成宗 때 春秋館의 史觀(史官)李 되어 스승 金宗直이 쓴 弔義帝文(弔義帝文)을 世祖를 非難한 目的으로 史草(史草)에 실었고 이 事實이 國文 途中에 드러나 反逆罪로 處刑된다.

號(號) 탁영(濯纓)은 ‘갓끈을 씻는 사람’이란 뜻으로서 楚나라 屈原(屈原)의 ‘어부사(漁父詞)’ 中 “滄浪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滄浪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리”에서 따온 것이다.

生涯 編輯

出生과 家計 編輯

金馹孫은 1464年 (世祖 10) 慶尙北道 淸道郡 상북면 韻季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龍仁 李氏 의 꿈에 歲 龍馬(龍馬)를 보고 세 아들을 낳아, 아들의 이름을 모두 마(馬)변이 있는 글字를 넣어서 各各 準손(駿孫), 기손(驥孫), 일손(馹孫)이리 하였다. 아버지 김맹(金孟)은 世宗朝에 集賢殿 校理가 되었다가 계유정란 에 辭職하고 歸鄕하였다가 成宗 때에 佐郞功臣이 되었다. 벼슬은 司憲府 집醫이다. 큰 兄 김준손은 成宗朝에 弘文館 直提學을 지냈고 流配地에서 燕山君의 虐政을 糾彈하는 檄文을 宣示하였고 작은 型 김기손은 司憲府監察과 兵曹·吏曹佐郞, 昌寧縣監을 지냈으며, 孝誠의 龜鑑으로 後世에 알려지는 김극일 (金克一 )의 孫子이다.

成長期 編輯

1471年 (成宗 2年) 8歲에 아버지 김맹이 藝文館 奉敎로 赴任하자 外家 近處 龍仁 壓고리(鴨皐里)에 移住했다.

兄弟들과 옥수정社(玉樹精舍)에서 〈小學〉·〈通鑑綱目〉·사서(四書) 等을 배웠다. 1478年 15歲에 成均館에 入學하고 같은 해 3月에 丹陽 于氏 (丹陽 禹氏)와 婚姻하였다.

1480年 (成宗 11年) 17歲에 아버지의 老患으로 家族이 故鄕 淸道에 돌아갔다. 生六臣 의 한사람인 이맹전 의 門下에서 受學하다가 9月에 密陽 의 佔畢齋 김종직 (金宗直)의 門下에 찾아가 그의 弟子가 되었다. 그는 김굉필 (金宏弼)· 정여창 (鄭汝昌)· 姜渾 (姜渾)· 남효온 (南孝溫) 等과 사귀었다. 1483年 9月 11日 20歲에 父親喪을 當하였다.

2年間 이맹전 김종직 의 門下에서 受學하다가 이맹전 이 病死하자 김종직 의 門下에서 生活하다시피 하며 그에게서 性理學 과 글, 事物을 배웠다. 그 當時 士林의 代表的 으뜸이던 김종직 의 門下生인 그는 오래 스승의 門下에서 受學하다가 1486年 (成宗 17年)에 初試에 合格하여 生員 (生員)에 장원(壯元)으로 眞사(進士)에서는 2等으로 合格하였다. 當時 大提學(大提學)이었던 서거정 (徐居正)은 金馹孫을 非凡한 사람이라며 極讚하였다.

官僚 活動 編輯

科擧 及第와 官僚 生活 初盤 編輯

上京한 뒤 같은 해 式年 文科 에 及第하였다. 처음 承文院(承文院)에 들어가 官職 生活을 始作해, 곧 亭子(正字)로서 春秋館記事官(春秋館記事官)을 겸하였다. 承政院, 司諫院, 司憲府 等의 官職을 두루 거쳤는데, 이는 請要職(淸要職)이었다.

夫人像을 當하고 그 뒤 母親 奉養을 위해 진주목學의 敎授(敎授)로 나갔다 2年 동안 晉州에 머물면서 晉州牧使 警大小 (慶大素)를 비롯한 文人 30餘 名이 矗石樓 (矗石樓)에서 진양수界(晉陽修?)을 結成하였다. 病을 핑계로 敎授職을 辭任하고 故鄕에 돌아가 운계情事(雲溪精舍)를 열고 學問 硏究에 沒頭하였다.

1489年 (成宗 20年)에 정여창(鄭汝昌)과 頭流山 (頭流山)을 遊覽하고 〈두류기행록(頭流紀行錄)〉을 남겼다. 忠淸道 목천 에서 瘞安 金氏 (禮山 金氏)와 再婚하였다. 같은 해 9月에 成宗 에게 치도(治道) 12項을 上疏했다.

言官 活動 編輯

1491年 (成宗 21年) 賜暇讀書 (賜暇讀書)를 했고, 뒤에 吏曹正郞(吏曹正郞)李 되었다. 州서(注書)·부수찬·장령·정언·이조좌랑·헌납·이조정랑 等을 두루 지냈다. 그는 主로 言官(言官)으로 있으면서 유자광(柳子光)·李克墩(李克墩) 等 勳舊派(勳舊派) 學者들의 腐敗와 飛行을 앞장서서 批判하였고, 한치의 굽힘이 없었다.

成宗 때 春秋館 獻納(獻納) 在職時에 李克墩과 成俊 (成俊) 等이 새로 朋黨의 紛爭을 일으킨다고 上疏하여 이극돈을 비롯한 勳舊派의 怨恨을 샀다. 그 뒤 質正官(質正官)으로 明나라 에 派遣되었을 때는 精油(鄭愈) 等의 中國 學者와 交遊하며 思想을 주고 받고, 精油가 지은 〈小學執說 小學集說〉을 가지고 歸國하여 朝鮮 에 傳播했다.

1495年 (燕山君 1年) 1月 忠淸道道社로 있을 當時 時局에 關한 時弊(時弊) 26個條를 上疏하면서 少陵復位를 上疏文을 올렸다. 3月 母親喪을 當했다. 3年喪을 마치고 1498年 初 公職에 復歸했다.

士官 活動 編輯

春秋館의 四館(史官)으로 있으면서 全羅道 觀察使 이극돈 (李克墩) 等의 飛行을 고뱔했고 윤필상 等의 腐敗 行爲도 告發했다.

또한 世祖 簒位 의 不當性을 諷刺하여 스승 金宗直이 지은 <弔義帝文(弔義帝文)>을 史草에 실었다. <弔義帝文>은 그의 스승 김종직 項羽 (項羽)가 初 회왕 (懷王), 卽 議題(義帝)를 죽이고 簒奪한 것을 記錄한 것으로, 初 議題 를 弔喪하는 形式이었지만 實은 斷種 을 議題에 比喩한 것으로 世祖의 簒奪을 批判한 것이었다. 이 弔義帝文에 對해서 1498年 (燕山君 4年) 柳子光·李克墩 等 勳舊派가 일으킨 戊午士禍(戊午士禍) 때 그 結果로 金宗直은 剖棺斬屍(剖棺斬屍)를 當하였고, 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 等 士林派 여러 人物들과 함께 처형당하게 된다.

그의 言行 가운데 勳舊派에서 問題로 삼았던 것은 德宗 의 後宮인 昭訓 尹氏(昭訓尹氏)에게 理由 없이 지나치게 많은 田民(田民)과 家事(家舍)를 내렸다고 世祖의 實情을 批判했고, 世祖 가 昭訓 尹氏와 소의 權氏 等 長男 德宗 의 後宮을 犯하려다가 失敗한 것을 記錄했으며, 〈弔義帝文〉을 그대로 史草에 記錄하였다.

學祖 批判 編輯

學祖 가 王室의 威勢를 업고 海印寺 住持를 自身의 手下로 갈아치운 事實을 記錄한 것이 問題가 된 것이었다. [3] 또한 學祖가 世宗 의 아들인 광평대군 영응대군 의 땅과 百姓들을 詐取한 事實도 問題가 된 記錄이었다. [3] 僧侶 學祖 世祖 의 佛事에 參與하여 寵愛를 받았고, 世祖 의 側近인 功臣 김수온 의 兄弟였다.

영응대군 否認 宋氏 는 軍將사란 절에 올라가 說法을 듣다가 계집종이 깊이 잠들면 學祖 와 四通을 했다. [4] 그는 學祖 帶方郡夫人 宋氏 의 姦通 事實을 成宗 의 面前에서 直接 言及하며 이를 批判하였다.

生涯 後半 編輯

勳舊派 批判 編輯

그는 世祖 의 꿈 때문에 어이없이 剖棺斬屍된 斷種 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顯德王后)의 少陵(昭陵)을 復舊할 것을 主張하였고, 황보 人 (皇甫仁)· 김종서 (金宗瑞) 等을 節義를 지킨 人物로 評價하고, 熟議權氏(淑儀權氏)의 奴婢와 土地를 권람(權擥)이 가로챘다고 批判하였다. 이러한 그의 批判은 同僚들로부터도 危險한 것으로 여겨져 정광필 이나 南袞 , 김굉필 , 金前 , 김안국 等은 그런 辛辣한 指摘을 한 그에게 되도록 外部에 發說하지 말라고 忠告하거나, 오히려 그를 나무라고 叱責했다.

그의 直言을 批判한 정광필 김안국 , 南袞 , 金前 , 김굉필 等은 살아남았지만, 그의 直言에 同調했거나 肯定的이었던 김종직 의 門下生들은 大部分 戊午士禍 甲子士禍 로 犧牲된다.

世祖 정희왕후 尹氏의 喪中에 全羅道 觀察使 이극돈 이 長興의 官妓(官妓)을 가까이 했던 事件, 賂物을 받은 事件, 世祖 앞에서 佛經을 잘 외워 出世했다는 일을 史草에 記錄했다.

이극돈 이 實錄廳의 堂上이 되어 史草를 살펴보니, 自身에 對한 좋지 않은 評價가 그대로 실려 있는 것을 보고 史草의 內容을 빼줄 것을 要求하였으나 金馹孫은 이를 斷乎하게 拒絶한다.

戊午士禍와 죽음 編輯

怏心을 품은 李克墩은 世祖의 銃身이었던 유자광 (柳子光)과 史草 問題를 論議했다. 柳子光은 當時의 勳舊 大臣들과 이 問題를 論議한 後,

1498年 에 《 成宗實錄 》을 編纂할 때 스승 金宗直이 쓴 弔義帝文 을 史草에 실은 것을 노사신·한치형·윤필상·신수근· 유자광 等을 통해 연산군 에게 알려졌다. 그 內容은 世祖 를 誹謗하고, 魯山君 의 抑鬱한 죽음을 哀悼하는 글이었다.

史草를 본 燕山君은 震怒하여 金馹孫을 붙잡아오도록 命했다. 世祖 代의 일을 함부로 史草에 썼다는 것이 그 理由였다. 金馹孫은 當時 故鄕에 내려가 病 治療 中이었다. 그는 逮捕되어 甚한 拷問 끝에 大逆罪로 7月 광통방(廣通坊) [5] 에서 陵遲處斬 되고, 스승 金宗直은 剖棺斬屍되고, 권경유 · 권오복 · 許磐 等 다른 많은 士類度 禍를 當하게 되었다.

이 일을 戊午士禍 라 한다. 이를 契機로 世祖 때 登場하여 成宗 때에 날개를 펴며 勢力을 擴張해나가던 新進 士林은 執權層인 勳舊派에게 肅淸되었다.

事後 編輯

金馹孫이 刑罰을 當할 때, 그의 故鄕에 있는 냇물이 瞥眼間 붉게 물들어 3日 동안이나 되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그 냇물은 붉은 市內라는 뜻의 自戒(紫溪)라 불리게 되었다.

연산군 1504年 (燕山君 10)에 甲子士禍 때 ‘金馹孫의 집 땅을 깎아 平平하게 하라’고 命하고 아버지 김맹(金孟)을 剖棺斬屍 하고, 그의 諜者 김청이(金淸伊)·김숙이(金淑伊)는 梟首刑 에 處해졌다. 그의 家族이 滅門之禍(滅門之禍)를 當해 夫人 金氏(金氏)가 조카 김대장(金大壯)을 後嗣(後嗣)로 삼았다.

中宗反正 以後 身元되었고, 文民(文愍)이라는 諡號가 내려졌으며, 中宗 때 直提學, 顯宗 承政院 都承旨 , 順調 때 吏曹參判에 各各 追贈되었다. 慶尙北道 淸道 의 自戒서원(紫溪書院), 慶尙南道 咸陽 의 청계서원(靑溪書院), 忠淸南道 목천(木川)의 道東書院(道東書院) 等에 配享되었다. 文集에 《탁영文集》이 있다.

그는 거문고 를 좋아했고 能熟한 演奏家였다. 그가 남긴 거문고는 탁영금이라고 해서 貴重한 遺物이다. 金馹孫이 타던 거문고는 1490年 頃 만든 것으로 推定되며, 옛 선비들이 使用한 樂器로는 唯一하게 國家文化財(寶物)로 指定되었다.

著書 編輯

  • 《탁영文集》
  • 《回路當基》
  • 《속두柳綠》

評價와 批判 編輯

肯定的 評價 編輯

일찍이 스승인 金宗直을 닮아 社長(詞章)에 能했으며, 當時 高官들의 不義와 腐敗를 糾彈하였다.

稗官雜記에는 그를 評하기를 "계운(季雲·金馹孫의 者)은 참으로 世上에 드문 선비였으나, 不幸한 時代를 만나 禍를 입고 죽었다"고 哀惜해 했다. <社友名行錄>(師友名行錄)은 "功은 참으로 世上에 드문 재주요, 廟堂(廟堂)의 그릇이었다. ...(以下 中略)... 人物을 是非하고 國事를 論議함은 마치 靑天白日 같았다. 哀惜하도다. 燕山君이 어찌 차마 그를 거리에 내놓고 죽였는가"라고 하였다.

지족당 南袞 은 그의 文章力과 市 재주가 同門 數學들 中에서는 가장 뛰어났는데, 不幸하게도 일찍 죽음을 當했다며 恒常 哀痛해하였다.

남효온 은 ‘金馹孫은 世上에 보기드문 資質을 타고났으며, 宗廟에서 使用할 수 있는 그릇’이라고 추켜세웠다.

南冥 曺植 은 그에 對해 “살아서는 서리를 업신여길 切開(凌霜之節)가 있었고, 죽어서는 하늘에 통하는 원통함이 있었다”고 하면서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1668年 老論의 領袖 尤庵 송시열 은 "탁영先生은 文章과 節行으로서 한 時代의 으뜸이었던 분인데 不幸하게도 燕山君을 만나 同時(東市)에서 처형당하는 禍를 입었고, 그 化는 온 士林(士林)에 미치었다. 只今도 當時의 일을 말할 때면 氣가 막히고 목이 메지 않는 사람이 없다. 中國 사람들까지도 稱讚하여 말하길 ‘동국(東國)의 韓愈’라 하였다."라고 탁영先生文集 序文을 지었다.

否定的 評價 編輯

그러나 過激하다는 批判도 있다. 後代에 月定 윤근수 가 지은 <月정만필>에 依하면 "金馹孫이 鄭光弼과 兩南御史(兩南御史)가 되어 龍仁의 客觀에 같이 묵었을 때 ‘示唆를 論하는데 慷慨하여 過激한 말을 많이 했다"고 傳한다. 정광필 等은 그가 너무 過激하다며 이를 나무랐다고 한다.

思想과 信念 編輯

  • 立異以爲高 君子不取(입이이위고 君子不取) ?: 남다름을 대단하게 보는 것은 君子가 할 바가 아니다. [6]

社長(詞章) 重視 編輯

김종직 의 文人 中에는 김굉필 · 정여창 等과 같이 經學(經學)을 重視하면서 ‘手記(修己)’를 志向하는 系列과, 남효온 · 曺偉 等과 같이 社長(詞章)을 重視하면서 ‘癡人(治人)’을 志向하는 系列이 있었는데, 金馹孫은 後者의 代表的 人物이었다.

그는 일찍이 스승 金宗直을 닮아 社長(詞章)에 能通했다.

두류視(頭流詩)

푸른 물결 넘실넘실 櫓젓는 소리 부드러워

옷소매 스치는 맑은 바람 가을인양 서늘하다.

머리 돌려 다시 보니 正말 그 모습 아름다워

閑暇한 구름 痕跡 없이 頭流山을 넘어가네.

智異山 遊覽 때 지은 詩

度漢江(渡漢江)

말 한마리 느릿느릿 漢江을 건너는데

꽃잎은 물결 따라 흐르고 버들은 찡그린 듯하네.

微賤한 臣下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오겠는가

그래도 고개 돌려 南山을 돌아보니 이미 봄은 저물었더라.

辭職을 請하고 落鄕하면서 지은 詩

한便, 現實 對應 姿勢는 매우 果敢하고 進取的이었다. 예컨데 少陵 復位 上訴나 弔義帝文 을 史草에 收錄한 事實 等에서 政治的 性向을 엿볼 수 있다. 이는 世祖 의 卽位 事實 自體와 그로 인해 輩出된 功臣의 存在 名分을 間接的으로 否定한 것으로서, 當時로서는 極히 冒險的인 일이었다.

外禁內고(外今內古) 姿勢 編輯

1493年 (成宗 24年) 겨울 讀書堂에서 工夫하다 틈날 때 마다 거문고를 배웠는데, 권오복 이 물었다. “여러분께서는 옛것을 좋아하면서 왜 五鉉琴 이나 七絃琴 을 곁에 두지 않습니까?" 金馹孫이 答하기를 “只今의 音樂은 옛날 音樂에 말미암은 것이오. 邵康節 이 옛날 옷인 審議를 입지 않고 ‘只今 사람은 마땅히 只今의 옷을 입어야 한다’ 고 했는데, 나는 이 말을 取한 것이오”

金馹孫은 只今의 六絃琴 萬 固執했던 것은 아니었다. 六絃琴을 讀書堂에 備置해 두었고, 또 五鉉琴을 집안에 두었다. 어떤 손님이 보고 疑問하니 金馹孫이 答하기를 “겉으로는 只今의 것을, 마음으로는 옛것을 따르고자 합니다.”

公納의 弊端 批判 編輯

智異山 紀行文 《속두柳綠》에 깊은 山中에까지 미친 市井의 弊端에 눈살을 찌푸리는 光景을 서슴 없이 記述하고 있다.

河東 五代史 隣近 住民들이 이정의 橫暴로 煩雜한 租稅와 過重한 賦役에 시달린다고 하소연하였고, 智異山에 잣이 많이 난다는 俗說을 믿고 해마다 官廳에서 잣을 督促하느라 住民들이 山地에서 사다가 貢物로 充當한다는 事實을 숨김 없이 吐露하였다. 또한 河東 雙磎寺 에 들렀을 때는 官廳에서 隱語를 잡는데, 불어난 물로 如意치 않자 僧侶들에게 殺生에 必要한 物件들을 準備하라 재촉하는 모습 等 記述하였다.

또한 굶주림을 이기지 못한 山속 百姓들이 밭을 일구려고 左方社 앞의 밤나무를 도끼로 찍어 남긴 것을 본 탁영의 “높은 山 깊은 골까지 開墾하여 耕作하려 하니, 나라의 百姓이 많아진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生活을 넉넉하게 하고, 그들을 敎化시킬 方道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라는 말에서 現實的이고 合理的인 思考를 重視하는 朝鮮 初期 新進學者의 意識世界를 가졌다.

金馹孫이 登場한 作品 編輯

關聯 文化財 編輯

기타 編輯

學脈 編輯

學統상으로는 정몽주 의 學派였다. 學脈상으로는 백이정 安珦 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백이정 , 安珦 이제현 異色 정몽주 吉再 김숙자 김종직 →金馹孫으로 이어진다.

백이정 , 安珦 이제현 異色 정도전

             → 이숭인
             → 정몽주 倦勤
                  → 權遇 世宗大王
                     → 정인지
                  → 吉再 김숙자 김종직 정여창
                             → 김굉필 조광조
                                 → 김안국
                                 → 김정국
                             → 主計否定 이심원
                             →김일손
                             → 金前
                             → 南袞

南袞의 醜都市 編輯

南袞 은 그의 同門이자 親舊였으며 같은 스승 김종직 의 門下에서 工夫했다. 戊午士禍 로 죽임을 當한 탁영(濯纓) 金馹孫의 墓를 中宗反正 後 移葬할 때 南袞은 글을 지어 "공(公)은 참으로 世上에 드문 재주요 廟堂(廟堂)의 그릇이었다. 所長(疎章)과 차자(箚子)의 文章이 넓고 깊음이 큰 바다와 같았고, 人物은 是非하고 國事를 論함이 마치 靑天白日(靑天白日) 같았다. 艾石(哀惜)하도다 燕山君이 어찌 차마 그를 거리에 내놓고 죽였는가, 공은 실로 世上에 드문 선비였다.불행한 때를 만나 禍(禍)를 입고 죽었구나" 하고 哀惜해 하면서 만시(輓詩)를 지었다.

鬼神(鬼神)은 아득하고 어두운데 天道는 眞實로 알기도 어렵구나.
鬼神도 遷都는 좋아하고 미워함이 人間과는 달라 禍와 福을 恒常 거꾸로 베푸나니,
길고 긴 이 宇宙(宇宙)에 오래 사나 짧게 사나 하루살이와 같은 것이라.
髑髏의 즐거움이 人間의 賃金보다 나은지 어찌알랴,
達觀으로 한 웃음에 부치니 뜬 구름처럼 아득하다.
다만 아깝기는 世上에 이름난 사람은 한番 나기 매양 어렵도다.
數百年을 걸려서야 겨우 한番 보게되네.
그를 보고도 成就시키지 못하니 太平의 다스림을 어느 때에나 보랴,
나의 난 것이 무슨 多幸으로 그대와 同時였네,
서한時代(西漢時代)의 文章이요,송(宋)나라 遠風(元豊), 희녕(熙寧)時代의 人物이었네,
政治의 잘못됨을 한 숨 쉬고 痛哭(痛哭)하며,
옳은 일이라면 勇敢(勇敢)히 하였도다.
鋼管의 무리들이 옆에서 이를 갈며 엿보는 줄 어찌 알았으랴,
큰 칼 쓴 罪人으로 문득 死刑場(死 刑場)으로 가란 말가,
世上 萬事에 없는 일이 없구나,
東海 바다가 끝없이 너르네,
只今은 世上이 바로 되어가 酷寒 法도 풀어져 善하고 惡한 것이 區別이 되네,
어찌 戊午年의 圓筒(寃痛)함은 아직도 新設(伸雪)하지 못하는고,
春秋의 筆法에는 내 賃金의 허물을 位(諱)하는 例가 있어
精工(定公).애공(哀公)의 記錄에는 숨긴 말이 많다하나 이렇게 春秋(春秋)를 지은 成人(聖人)은 하늘과도 같아서 後世 사람 따를 바 못되고,
붓을 잡아 들은대로 쓰는 것은 社가(史家)의 常例이다.
들은바 가 바르고 틀림이 있다해도 그것은 사람의 私見(私見)이다.
그것을 整理 編纂하는 데는 實錄廳(實錄廳)이 있으니
虛僞로 된 것이면 깎으면 그만인데
다만 뱃속의 칼이 터럭속의 欠터를 찾아냈네.
位(魏)나라 사람들이 國樂(國惡)을 써서 길거리 에 보인 것과는 비할 것도 아니로다.
벼슬 자리에서 職務(職務)를 行하지 못했다면 그 罪는 매를 치면 될 것이요
,衒能한 人材에는 特別히 容恕하고 減刑하는 옛 法度 있는 바다.
이런 말씀 아뢰어 賃金의 疑惑을 풀어드릴이 없구나.
歲月도 10年을 넘게되니 識者들의 가슴에 永遠한 슬픔이여,
파타性(跛打城) 성동의 낮은 언덕 초라하여 屍體 減黜곳 되지 못하네
사랑하는 資質들이 좋은 땅 가려 里長 (移葬)하려 하도다.
그대는 只今 하늘 위에서 굽어보면 먼지만 자욱하리.
솔개나 굼벵이를 擇하지 않거든 하물며 이땅저땅 相關하랴마는
人間에서 區區하게 省墓 (省墓)하고 祭祀(祭祀)드리기 便함을 取함이네.
凄凉하다 목천현(木川縣)에 구불 구불限 山기슭,
後日에 도지(圖誌)를 編纂(編纂)할 때 이 무덤 記錄하여 빼지마오.

家計 編輯

6大 祖父 김관 (金管)은 佛敎를 排斥하고 遊學 振興에 貢獻한 선비이다. 曾祖父 金湑(金?)가 淸道 에 터를 잡아 代代로 定着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할아버지는 김극일 (金克一)로 吉再 (吉再)에게 修學했고 孝誠이 至極하여 節孝(節孝)라고 일컬어졌다. 아버지는 男系 김맹(金孟)으로 김숙자 (金叔滋) 門下에서 工夫하였다. 또한 兄인 김준손(金駿孫)과 김기손(金驥孫)도 定試(庭試)에 合格함으로써 家門 全體가 當代에 이름을 떨쳤다. 金馹孫의 家計는 嶺南 士林 의 正統的인 맥과 흐름을 같이하고 있는데, 이러한 家門 背景으로 인해 어려서부터 道學과 文學에 쉽게 接할 수 있었다.

先代 編輯

  • 祖父?: 김극일 (金克一, 1382年( 禑王 8年)∼ 1456年( 朝鮮 世祖 2年))
  • 조某?: 慶州 李氏 (慶州李氏) - 漢城府判尹(漢城府判尹) 離間(李?)의 딸
    • 아버지?: 김맹(金孟, 1410年( 太宗 10年) ~ 1483年( 成宗 14年)) - 吏曹參判(吏曹參判)
    • 全貌?: 晉州 鄭氏 (晉州鄭氏) - 集賢殿한림(集賢殿翰林) 정중건(鄭仲虔)의 딸
      • 異腹 누나?: 김진경(金震卿) [7] 에게 出家
        • 조카?: 김영(金英)
    • 生母?: 龍仁 李氏 (龍仁李氏) - 刑曹參議(刑曹參議) 移讓(李讓)의 딸, 工曹典書(工曹典書) 이중순(李中順)의 曾孫
      • 兄?: 김준손(金駿孫, [註解 1] 1454年 ∼ 1508年)
      • 兄嫂?: 全州 李氏 (全州李氏)- 異說(李設)의 딸, 子女를 두지 못했다.
      • 兄嫂?: 濟州 高氏 (濟州高氏)- 添丁(僉正) 고태익(高台翼)의 딸, 한성부윤(漢城府尹) 고득종 (高得宗)의 孫女, 上護軍(上護軍) 고봉지(高鳳智)의 曾孫
        • 조카?: 김대유 (金大有, 1479年 ~ 1551年), 號는 三族當(三足堂)
      • 兄嫂?: 南原 양氏 (南原梁氏) - 職場(直長) 讓步(梁普)의 딸, 板狀서(判尙書) 量우룡(梁友龍)의 曾孫
        • 조카?: 김대장(金大壯) - 繼父 金馹孫에게 入養
        • 조카?: 金大軸(金大畜, 1496年 ~ 1563年)
        • 조카?: 김대아(金大雅, 1498年 ~ 1576年)
        • 조카?: 이공권(李公權)의 妻
      • 兄?: 김기손(金驥孫, 1456年 ∼ 1493年) - 兵曹佐郞(兵曹佐郞)
      • 兄嫂?: 흥해 崔氏 (興海崔氏) - 直提學(直提學) 최연(崔淵)의 딸, 縣監(縣監) 최윤(崔潤)의 孫女, 大司成(大司成) 最强(崔康)의 曾孫
      • 누나?: 윤기분(尹起汾)의 妻
        • 조카?: 윤수(尹燧)
        • 조카?: 倫敦(尹燉)
      • 누나?: 條件(趙鍵) [8] 에게家出가
        • 조카?: 兆女優(趙如愚)
        • 조카?: 兆餘回(趙如晦)
        • 조카?: 팔擧手(八?守) 이근(李根)에게 出家
        • 조카?: 곽當(郭塘)에게 出家
      • 庶兄?: 김원(金元, 1457年 ~ 1503年)
        • 조카?: 김진심(金震諶)
        • 조카?: 김시휘(金始暉)
      • 庶兄?: 金兄(金亨, 1459年 ~ 1521年)
        • 조카?: 김대심(金大諶)
        • 조카?: 김대홍(金大洪)
        • 조카?: 金小畜(金小畜)
      • 庶兄?: 김이(金利, 1461年 ~ 未詳)
      • 庶弟?: 金淨(金貞, 1472年 ~ 1522年)
        • 조카?: 김우(金瑀, 1520年 ~ 1599年)
      • 庶弟?: 김흠(金欽)
      • 庶弟?: 金明(金明) - 通禮院 左通禮(通禮院 左通禮)
        • 조카?: 김옥(金?)
      • 庶弟?: 金汶(金文)
      • 庶弟?: 김사(金思)

婦人과 後孫 編輯

  • 初配?: 丹陽 于氏 (丹陽禹氏) - 兵曹參判(兵曹參判) 尤隙館(禹克寬)의 딸, 逆動(易東) 禹倬 (禹倬)의 6世孫, 刑曹參議(刑曹參議) 移讓(李讓)의 外孫
  • 後輩?: 瘞安 金氏 (禮安金氏) - 參判(參判) 김미손(金尾孫)의 딸, 掌令(掌令) 김신(金新)의 孫女, 吏曹參判(吏曹參判) 김숙량(金叔良)의 曾孫
    • 兩者?: 김대장(金大壯, 1493年 ∼ 1549年) - 昌寧縣監(昌寧縣監)
    • 며느리?: 南原 양氏 (南原梁氏)- 縣監(縣監) 양치준(梁治準)의 딸
      • 孫子?: 김갱(金?) - 司憲府 地平(司憲府 持平)
      • 孫婦?: 密陽 朴氏 (密陽朴氏) - 病材(甁齋) 朴下징(朴河澄)의 딸, 副司直(副司直) 박승원(朴承元)의 孫女, 小鼓(嘯皐) 朴建(朴乾)의 曾孫
        • 曾孫女?: 金深(金審) [9] 에게 出家
        • 曾孫女?: 이렴(李濂) [註解 2] [10] 에게 出家
      • 孫子?: 김장(金?) - 忠佐衛謝過(忠佐衛司果)
      • 孫婦?: 全州 류氏 (全州柳氏) - 謝過(司果) 류세봉(柳世鳳)의 딸, 大司憲(大司憲) 류헌 (柳軒)의 孫女, 直提學(直提學) 流劇서(柳克恕)의 6世孫
        • 曾孫?: 김치삼 (金致三, 1560年 ∼ 1625年) - 邪諂視 參奉(司瞻寺 參奉)
        • 從孫婦?: 固城 李氏 (固城李氏) - 李蘗(李碧)의 딸, 異敎(李郊)의 孫女, 模헌(慕軒) 이육 (李育)의 曾孫, 左議政(左議政) 利原 (李原)의 玄孫, 參判(參判) 朴英(朴穎)의 外孫
          • 玄孫?: 김선경(金善慶) - 通禮院左通禮(通禮院左通禮)
          • 玄孫女?: 이지영(李之英)에게 出家
          • 玄孫女?: 조이수(曺以需)에게 出家
        • 曾孫女?: 유광선(柳光先) [11] 에게 出家
        • 曾孫女?: 김류(金瀏)에게 出家
        • 曾孫女?: 조기엽(趙起曄)에게 出家
      • 孫女?: 안굉(安宏) [12] 에게 出家
        • 外曾孫?: 안極衝(安克忠)
      • 孫子?: 김령(金鈴, 1520年 ~ 1607年) - 副護軍(副護軍)
      • 孫婦?: 密陽 朴氏 (密陽朴氏) - 박언정(朴彦貞)의 딸, 所要當(逍遙堂) 박하담(朴河淡)의 後孫
      • 孫婦?: 漢陽 조氏 (漢陽趙氏) - 조창호(趙昌浩)의 딸
        • 曾孫?: 김계우(金啓遇, 1562年 ~ 1622年) - 訓鍊院판관(訓鍊院判官)
        • 曾孫?: 金系무(金啓務, 1565年 ~ 1628年) - 宣略將軍(宣略將軍)
        • 曾孫?: 김계상(金啓常, 1567年 ~ 未詳) - 蔚山府使(蔚山府使)
        • 曾孫?: 김수원 (金秀源, 1569年 ~ 1630年) - 內禁衛將(內禁衛將), 團員(檀園) 金弘道 (金弘道)의 宣祖
        • 曾孫女?: 배인권(裵仁權)에게 出家
        • 曾孫女?: 박장수(朴章秀)에게 出家
        • 曾孫女?: 양기문(梁起門)에게 出家
      • 孫子?: 김순(金錞)
      • 孫子?: 김굉(金?)
      • 孫子?: 김용(金鎔)
      • 孫子?: 김용(金鏞)
      • 孫子?: 김록(金錄)

各州 編輯

  1. 보기드물게 金箔을 섞어 만든 붉은 障지를 使用함
  2. '이종범의 士林列傳' 김일손(金馹孫): 當身의 죽음은 하늘의 시샘이었다 ① - 프레시안
  3. 이덕일, 士禍로 보는 朝鮮 歷史 (石筆, 2005) 312페이지
  4. 박홍갑, 士官 위에는 하늘이 있소이다 (嘉藍企劃, 1999) 114페이지
  5. 조흥은행 本店이 있던 光敎 네거리 近處
  6. 《탁영집(濯纓集)》, 〈영산현감신담생사당기(靈山縣監申澹生祠堂記)〉
  7. 同知中樞府事(同知中樞府事) 김유선(金有銑)의 아들, 함녕군(咸寧君) 김요(金饒)의 孫子, 贊成事(贊成事) 김택(金澤)의 曾孫
  8. 吏曹正郞(吏曹正郞) 조덕생(趙德生)의 아들, 節효공(節孝公) 組罍(趙賚)의 孫子, 한산군(漢山君) 조인옥 (趙仁沃)의 曾孫
  9. 寒暄堂(寒暄堂) 김굉필 (金宏弼)의 玄孫
  10. 左議政(左議政) 利原 (李原)의 6世孫
  11. 미암(眉巖) 유희춘 (柳希春)의 孫子, 문정공(文正公) 김인후 (金麟厚)의 外孫
  12. 禮賓寺否定(禮貧時副正) 안팽명(安彭命)의 孫子이며 判官(判官) 안境遇(安景祐)의 아들
內容主
  1. 1498年(燕山君 4) 동생 金馹孫의 史草 問題로 惹起된 戊午士禍 에 連累되어 湖南에 流配되었다. 이때 隣近에 귀양 왔던 선비들과 함께 擧兵하여 盡誠대군 을 推戴하려던 次에 反正이 일어나 原從功臣 으로 책록되고, 漣川郡(燕川君)에 封해졌다.
  2. 壬辰倭亂 創意 淸道 5醫師 中 한 사람. 義兵將 郭再祐 陣營에 加擔하여 靈山 戰鬪와 정암진 戰鬪 에서 큰 活躍을 했다.

參考 文獻 編輯

  • 成宗實錄
  • 燕山君日記
  • 大東野乘
  • 燃藜室記述

外部 링크 編輯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兩班官僚의 對立과 分裂" 項目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