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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김유신

新羅의 太大角干 (595?673)

김유신 ( 韓國 漢字 : 金庾信, 595年 ~ 673年 8月 21日 ( 陰曆 7月 1日 ))은 新羅 의 花郞의 우두머리였으며 太大角干 (太大角干)이었고 新羅에 歸順한 伽倻 王族의 後孫으로서, 新羅 百濟 高句麗 를 統一하고 唐나라도 擊退시켜 三國 統一을 이루는 데에 中樞的인 役割을 한 新羅의 將軍이며, 政治家이다.

김유신
金庾信
新羅의 追尊王
1926년에 발간된 조선명현초상화사진첩에 실린 김유신의 초상화
1926年에 發刊된 朝鮮瞑眩肖像畫寫眞帖에 실린 金庾信의 肖像畫
新羅 太大角干
在任 668年 ~ 673年 8月 21日
新羅 上大等
在任 660年 1月 ~ 673年 8月 21日
前任 錦江
後任 김군관
君主 문무왕
이름
別號 興舞공, 大覺공
시호 開國公(開國公),
純忠壯烈興舞臺王(純忠壯烈興武大王)
身上情報
出生日 乾鰒 12年( 595年 )
出生地 新羅 만노군
死亡日 문무왕 13年( 673年 ) 8月 21日 (78歲)
死亡地 新羅 金星
國籍 新羅
經歷 官等: 太大角干 , 職責: 大將軍 , 蘘荷都摠管, 棒狀政經(黨)
家門 新金氏
父親 김서현
母親 만명부인
配偶者 영모 否認, 支所 夫人
子女 三光 (三光), 怨讐 (元述), 遠征(元貞), 腸이(長耳), 怨望(元望), 시득(施得) 等과 네 名의 딸
墓所 慶州 金庾信墓
陵墓 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 (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
軍事 經歷
忠誠 新羅
最終階級 大將軍
主要 參戰 三國統一戰爭
김유신
한글 表記 : 김유신
漢字 表記 : 金庾信
改正 로마字 表記 : Gim Yusin
매큔-라이샤워 表記 : Kim Yusin
채용신이 그린 김유신 肖像畫

태종무열왕 문무왕 을 도와 新羅의 三國 統一 戰爭을 主導하였으며, 진평왕 부터 文武王에 이르는 다섯 名의 王을 섬겨 新羅 政權의 中樞的 人物로 成長하였다. 臣下로서 王으로 推尊된 唯一한 人物이며, 武烈王의 卽位 및 三國 統一 戰爭 等에 寄與한 功績을 認定받아 王族이 아님에도 不拘하고 純忠壯烈興舞臺王 (純忠壯烈興武大王)으로 推尊되었다. 新羅를 包含하여 高麗 朝鮮 에 이르기까지 성신(聖臣)·柱石之臣(柱石之臣)으로 推仰받았다.

또한 官昌 , 사다함 과 함께 新羅의 3代 花郞 이다.

出生 編輯

金庾信은 金官國 을 세운 수로왕 의 12代 손이라고 한다. 金官國의 마지막 王 구형왕 법흥왕 19年( 532年 ) 세 名의 아들을 거느리고 新羅 에 降伏했으며, 新羅의 眞骨貴族으로 編入되었다. 구형왕의 막내아들 김무력 은 武裝으로 活動하며 백제와의 戰爭에서 聖王 을 잡아 죽이는 功을 세웠고, 김무력의 長男이었던 아버지 김서현 銀 大量主導毒(大梁州都督)을 지냈다. 어머니 萬名은 진흥왕 의 아우인 숙흘종 의 딸이다.

列傳에는 김서현이 길에서 萬名을 보고 눈짓으로 꾀어서 마침내 서로 野合을 하게 되었는데, 서현이 만노군縣 忠淸北道 鎭川郡 太守로 轉出되면서 萬名도 함께 데려가려 했다. 그러나 서현과 萬名이 서로 野合한 것을 알게 된 숙흘종은 憤怒하여 딸을 別채에 가두고 사람들에게 지키게 했다. 그런데 그날 밤, 난데없는 벼락이 쳐서 別채를 지키던 사람들이 놀라 정신없는 틈을 타서 萬名은 窓門으로 도망쳐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떠났다고 한다.

유신은 진평왕 乾鰒 12年( 595年 )에 아버지 서현의 赴任地인 만노군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가 그를 갖고 스무 달이 지나서 태어났다고 傳한다. 서현은 경진일 밤에 兄惑星과 진성두 별이 自身에게 내려오는 꿈을, 萬名은 新築日 밤에 한 어린아이가 黃金 甲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維新을 갖게 되었으며, 元來 경진일 밤에 서현이 꾼 胎夢으로 얻었다 하여 이름을 競進으로 지으려던 것을, "날이나 달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어서는 안 된다"는 禮記 의 말에 따라, 警(庚)과 字劃이 비슷한 '劉', '晉'과 發音이 비슷한 '新'을 써서 이름을 維新이라 짓게 되었다

金庾信 將軍의 胎夢과 誕生 說話에서는 '誕生하면서부터 容貌가 非凡하고 氣骨이 壯大하였다. 等을 보니 사마귀가 七星처럼 박혀 있어서 奇異했고, 妊娠 期間이 20個月이라는 모든 點으로 보아 普通 사람과는 다르기에 훌륭한 人物인 英雄이 태어난 것이다.'라는 說話도 있다. [1]

靑年期 編輯

浪費性 戰鬪 編輯

乾鰒 46年, 진평왕 51年( 629年 ) 가을 8月 , 王命을 받고 高句麗의 浪費性 을 치게 된 아버지를 따라 從軍했을 때 그의 나이는 35歲였다. 金庾信이 群衆에서 갖고 있던 職責은 《三國史記》 本紀에는 部長群(副將軍), 列傳에는 中唐堂主(中幢幢主)로 記載되어 있다. 《三國史記》 卷40 直觀知 下(下)에 中唐(仲幢)이라는 部隊名이 있지만, 이것이 設置된 것은 文武王 11年( 671年 )의 일이다.

1次 接戰에서 高句麗軍에 크게 敗한 新羅軍이 사기가 꺾이고 싸울 意志마저 잃게 되자, 유신은 直接 나서서 敵陣을 오가며 敵을 攪亂시키고 赤軍 將帥의 목을 베어 가지고 돌아왔다. 이에 鼓吹된 新羅軍은 다시 勇氣를 얻어 進擊해 고구려군과 싸웠고, 城 안에 남아 있던 高句麗軍은 두려워한 나머지 더以上 싸울 意志를 잃고 降伏했다고 한다.

金春秋와의 만남 編輯

記錄上 維新의 첫 戰鬪로 알려진 浪費性에서의 싸움에 新羅軍 指揮官으로 參戰했던 人物 가운데는 波珍飡 김용춘 도 包含되어 있었다. 용춘의 아들로서 後날 太宗 武烈王 으로 卽位하게 되는 金春秋와는 後날 政治的 同盟者로서 굳건한 關係를 맺게 되는데, 이들 사이의 同盟에는 兩者間에 重疊的인 婚姻을 통한 血緣關係 形成이 主要한 土臺가 되었다. 《三國遺事》에는 이와 關聯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傳한다.

때는 正月 오기일(烏忌日) [註解 1] , 뜰에서 춘추와 함께 蹴鞠을 하던 유신은 일부러 그의 옷고름을 밟아 터지게 하고서, 옷고름을 꿰맨다는 핑계로 그를 自身의 집으로 데려가 누이同生 문희에게 그 옷고름을 꿰매게 하였다. 이 일이 契機가 되어 춘추는 자주 維新의 집을 드나들게 되었고 마침내 문희가 妊娠하게 되자 유신은 "婚姻도 하지 않고 아이를 가진 누이를 火刑에 處할 것"이라는 所聞을 퍼뜨리게 한 뒤, 왕이 南山에 行次하는 날에 맞춰서 집 뒤뜰에 長斫더미를 쌓아놓고 불을 질러서 煙氣를 피워올렸다. 南山에서 이 延期를 目擊한 왕이 左右 臣僚들에게 묻자, 臣僚들은 自身들이 들은 所聞을 王에게 아뢰었고, 마침 王의 옆에 있다가 그 말을 듣고 顔色이 變한 春秋를 본 王은 아이의 아버지가 그임을 斟酌하며 얼른 가서 求해주라는 命令을 내렸다. 이것이 契機가 되어 두 사람은 마침내 婚姻하게 되었다.

선덕여왕 仁平 9年( 642年 ) 百濟는 대야성 을 비롯한 新羅 西쪽 40餘 城(城)을 쳐서 陷落시켰는데 이 過程에서 春秋의 사위였던 대야성週 김품석(金品釋) 夫婦가 죽자 春秋는 딸의 怨讐를 갚기 위해 高句麗에 援兵 派兵을 要請하러 떠났다. 高句麗로 떠나기 前날, 金春秋는 金庾信을 찾아와 “只今 내가 高句麗에 使臣으로 가려 하는데, 60日이 지나도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다시는 나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공은 어찌하겠소?”하고 묻자, 金庾信은 “그렇게 된다면 내가 탄 말의 말발굽이 반드시 백제와 高句麗, 두 나라 王의 庭園을 짓밟을 것이다.”라고 對答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盟誓를 나누었다. 春秋가 떠난 뒤 압량주(押梁州, 只今의 慶尙北道 慶山 周邊)의 君主(軍主)로 옮겨간 그는 春秋가 抑留되었다는 消息에 軍事 1萬(列傳에는 3千)을 모아 決死隊를 組織하고 王에게 高句麗로 보내줄 것을 要請해 出動 期日에 對한 勅許를 받아냈으며, 新羅에 間諜으로 와있던 僧侶 덕창(德昌)의 報告를 接한 高句麗 朝廷은 戰爭 防止를 위해 春秋를 釋放해 無事히 풀려났다.

백제와의 戰爭 編輯

仁平 11年( 644年 ) 眞骨 貴族이 오를 수 있는 最高의 官等인 小版(蘇判)으로 昇進하였다. 가을 9月에는 上將軍(上將軍)李 되어, 王命으로 백제의 街彗星 (加兮城) · 성열성 (省熱城) · 童話城 (同火城) 等을 包含한 7性을 占領했다. 이듬해( 645年 ) 正月에 徐羅伐로 돌아와 改善 報告도 하기 前에 다시 階伯 이 이끈 百濟軍이 罵詈砲聲 에 쳐들어왔다는 急報가 날아들자 女王은 維新을 尙州將軍으로 삼아 막게 했다. 유신은 집에 들르지도 않고 곧바로 달려나가 百濟軍 2千餘 名의 목을 베는 勝利를 거두었고, 陰曆 3月에 다시 백제의 侵攻을 擊退했다.

毘曇의 난 編輯

仁平 14年( 647年 ) 正月에 上大等 毘曇 · 廉宗 等이 일으킨 叛亂(毘曇의 난)에서 [註解 2] 명활성에 들어간 叛亂軍과 맞서 유신은 춘추와 함께 月城에 設置된 陣營에 駐屯하며 열흘 동안 叛亂軍과 對峙했다. 그러다 한밤中에 큰 별 하나가 月城에 떨어지는 것을 본 毘曇이 兵士들에게 “별이 떨어진 곳은 반드시 피를 흘린다 하니 이는 女王이 敗하고 내가 勝利할 徵兆다!”라고 말하여 叛軍의 士氣는 크게 치솟았다. 이에 金庾信은 몰래 허수아비를 커다란 鳶에 매달아 불을 붙이고 밤에 몰래 하늘로 띄워 보낸 뒤, 兵士들에게 “어젯밤에 떨어진 별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所聞을 퍼뜨렸다. 叛亂軍이 動搖하는 사이에 유신은 명활성을 쳐서 陷落시키고, 毘曇을 쳐서 9族을 모두 죽였다. 그 사이 善德女王이 逝去하고 그 뒤를 이어 善德女王의 四寸인 승만公主가 王位를 繼承하여 진덕여왕 이 되었다.

壯年期 編輯

叛亂을 鎭壓한 後 압량주君主로 赴任한 유신은 10月 에는 무산성(茂山城, 只今의 全羅北道 茂朱郡 무풍면), 감물性 (甘勿城, 只今의 慶尙北道 김천시 개령면), 動箴性(桐岑城, 只今의 慶尙北道 구미시)에 들어온 백제군을 擊退했다. 진덕여왕 泰和(太和) 元年( 648年 ) 백제에게 빼앗겼던 大量州를 다시 攻擊하여 收復하고, 百濟의 12城을 陷落시킨 공으로 伊飡(伊飡)으로 昇進한 뒤 喪主行軍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에 任命되었다.

金庾信은 예전에 백제에게 빼앗긴 대야성 을 되찾기 위해 진덕女王의 許可를 받고 出戰하였다. 金庾信이 近處 溪谷에 軍士를 埋伏시킨 뒤 대야성 밖에 이르자 百濟軍이 攻擊해 왔다. 백제군과 한동안 맞서 싸우던 金庾信은 갑자기 軍士를 돌려 後退하였다. 이것을 본 百濟軍은 城 밖으로 나와 新羅軍을 뒤쫓았다. 이때 溪谷에 숨어 있던 軍士들이 一齊히 뛰쳐나와 百濟軍의 後方을 攻擊하자, 後退하던 金庾信도 卽時 軍士를 돌려 挾攻을 加害 百濟軍 1千餘 名이 죽었다. 그리고 백제 陣營과의 交涉을 통해, 戰鬪에서 사로잡은 백제 將軍 여덟 名을 돌려보내는 條件으로 앞서 대야성에서 죽은 김품석 內外의 遺骨을 送還받는 데 成功했다. 勝勢를 몰아 유신은 거듭 백제를 쳐서 惡性(嶽城) 等 12城을 陷落시켰으며, 2萬餘 名을 죽이고 9千餘 名을 사로잡았다. 그 功으로 金庾信은 尙州行軍 대총관에 올랐다. 이어 金庾信은 百濟의 진례성 等 9個의 城을 쳐서 9千餘 名을 죽이고 6百餘 名을 사로잡았다. 한便 이 해에 黨에 使臣으로 들어갔던 春秋는 黨의 皇帝로부터 援兵 派兵의 約束을 얻어내고, 아들 한 名을 黨의 皇帝 옆에 남겨두어 宿衛하게 한 뒤 歸國하고 있다.

8月 , 백제의 將軍인 佐平 銀賞 (殷相)李 大軍을 이끌고 석토(石吐) 等 7城을 奇襲해 大量의 戰死者가 나고, 석토성 等 7個의 城을 백제에 빼앗기자 유신은 다시 軍士를 이끌고 싸움터로 나아가 銀賞과 自牽(自堅)을 비롯한 百濟 長壽 10名과 8,980名에 達하는 百濟軍을 죽이고, 達率 情中(正仲) 等 長壽 100名을 사로잡았으며 末 1萬 匹과 甲胄 1,800疋을 鹵獲한다. 徐羅伐로 돌아온 金庾信은 진덕여왕으로부터 直接 歡待를 받는 等 極盡한 禮遇를 입었다고 한다.

老年期 編輯

金春秋의 推戴와 백제 滅亡 編輯

 
南山 에 있는 金庾信의 銅像

진덕여왕 8年( 654年 ) 봄 3月에 女王이 後嗣를 남기지 못하고 逝去하자 畫伯 은 上大等이었던 알천 을 推戴했으나, 알천은 이를 拒否하며 伊飡 春秋를 王으로 推戴하였다. 이가 太宗 武烈王이다. 이때의 維新의 政治的 影響力은 貴族 會議인 畫伯의 決定을 取消시키고 自身의 連戚人 春秋를 王으로 推戴할 만큼 成長해 있었다.

武烈王 2年( 655年 ) 유신은 大角干(大角干)에 任命되었다. 이 해 1月에 高句麗, 백제, 말갈의 聯合軍이 新羅 北쪽 33個의 城을 빼앗았다. 세 나라하고 戰爭을 치르는 渦中에 金庾信은 9月에 百濟의 逃婢天性(刀比川城)을 攻擊하여 陷落시켰다. 10月 武烈王의 셋째 딸이자 外조카였던 支所 와 婚姻했다. 이러한 新羅 王室과의 二重, 三重의 혼맥을 통해 그는 新羅의 最高 權力者로 浮上했다. 그리고 그해에, 유신은 백제와의 戰爭에서 捕虜가 되었다가 佐平 임자(壬子)의 家奴가 된 전(前) 釜山縣令(夫山縣令) 級飡 朝美押을 통해 임자와 連繫하는데 成功, 그로부터 百濟의 內部 事情에 對한 情報를 얻고 있다.

武烈王 7年( 660年 ) 初에 그는 上大等으로 昇進했다. 이 해 6月 마침내 唐 高宗은 新羅에 對한 援兵 派兵을 實行에 옮겨, 大將軍 蘇定方 · 유백영(劉伯英)李 指揮하는 13萬 水軍을 新羅로 보냈다. 유신은 王命으로 太子 법민(法閔, 後날의 문무왕)과 將軍 김진주 · 김천존 等과 함께 큰 배 1百 隻을 타고 黨病이 駐屯하는 덕물道路 갔고, 이곳에서 唐兵은 뱃길, 新羅軍은 땅으로 7月 10日에 백제의 首都 泗沘城 앞에서 合流해 백제를 친다는 計劃을 세웠다. 유신은 5萬 兵士를 이끌고 泗沘城으로 向하던 中, 百濟의 階伯 이 이끄는 5千 兵力과 黃酸 벌판 에서 만나 熾烈한 戰鬪 끝에 勝利, 가까스로 蘇定方軍과 合流해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다. 이때 황산벌 싸움 탓에 當初 唐軍과 約束한 7月 10日에서 하루 늦은 것을 트집잡아 新羅側 督軍 김문영을 處刑하려 드는 蘇定方에게, "그러면 우리는 백제를 쳐부수기 前에 黨과 먼저 싸울 것이다!"는 態度로 맞서 끝내 蘇定方을 물러서게 했다. 또한 高宗으로부터 現地에서의 일을 任意대로 處理하도록 權限을 委任받은 蘇定方이 유신과 김인문 · 金孃도 (金良圖) 세 사람을 包攝하기 위해 “只今 얻은 백제의 땅을 그대들에게 食邑으로 나눠주겠다”고 하자 유신은 "굳이 우리만 賞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라는 懇曲한 말로 拒絶하고 있다.

黨病이 백제 땅에 駐屯하면서 機會를 봐서 新羅를 치려고 하는 것을 把握한 그는 新羅軍을 百濟軍으로 變裝시켜 唐缾을 치게 하자는 計劃을 進言했고, 蘇定方은 一部 殘餘兵力만을 남긴 채 自身은 의자왕 과 臣僚 93人, 兵士 1萬 名을 捕虜로 데리고 黨으로 돌아갔다. 以後 武烈王의 뒤를 이어 維新의 조카이자 處刑(妻兄)인 太子 法民이 卽位하자, 유신은 그를 도와 攝政과 外交 活動을 겸하며 統一 戰爭을 持續해 나갔다.

高句麗의 滅亡 編輯

黨은 백제의 옛 首都 泗沘城에 軍士를 駐屯시키고 高句麗 攻擊의 後方 基地로 삼는 同時에 新羅를 牽制하는 役割을 遂行하게 하려 했지만, 백제 滅亡 直後부터 백제 땅 全域에서 始作된 興復運動 으로 그 計劃은 막혀버렸다. 백제의 옛 貴族인 鬼室福信 과 僧侶 道琛 이 指揮하는 百濟 興復軍은 黨病이 駐屯하던 泗沘城을 包圍해 窮地에 몰아넣었고, 新羅軍은 百濟 興復君을 鎭壓하는 한便으로 그들의 包圍網을 뚫고 孤立되어 物資 普及이 끊어진 泗沘城의 唐缾에게 소금과 간醬을 보내주기에 汲汲했다. 한便 泗沘城이 陷落된 해 11月에는 高句麗가 다시 新羅를 攻擊해 漆中性(七重城)에서 星州 匹夫(匹夫)가 戰死하고, 이듬해인 武烈王 8年( 661年 ) 5月에는 高句麗가 말갈 의 兵士들까지 動員하여 北漢山城 을 攻擊해 20日 동안 戰鬪를 치르고서야 退却하고 있다.

9月에 新羅와 黨 사이의 主要 連絡據點 한가운데에 位置해 百濟軍의 占據下에 있던 甕産性(瓮山城)이 陷落되었고, 唐缾과의 聯合作戰 計劃에 따라 新羅軍이 平壤으로 向하던 途中, 平壤을 包圍하고 있던 蘇定方으로부터의 多急한 軍糧輸送 要請이 銜字都摠管 유덕민을 通해 들어왔다. 敵地에 들어가 軍糧을 輸送하고 돌아와야 하는 어려운 作戰에 누구도 自願하려는 者가 없는 가운데, 遺臣이 스스로 任務를 遂行하겠다고 自請해왔다. 文武王은 기뻐하며 곧 떠나려는 유신에게 "國境을 넘어서부터, 賞罰은 마음대로 하라(出疆之後 賞罰專之可也)"는 免責特權을 주었다. 12月 10日에 유신은 軍糧 輸送을 위해 部長群 김인문 · 김진복(金眞服) · 金孃도 等과 함께 쌀 4千 섬과 兆(租) 22,250섬을 唐軍 陣營까지 輸送할 輸送部隊를 이끌고 高句麗 國境으로 들어갔다. 이때 維新의 나이는 68歲였다.

文武王 2年( 662年 ) 正月 23日에 七衆下(七重河)에 이르러, 두려워 배에 오를 생각을 않는 將兵들에게 호통을 치며 먼저 배를 타고 건넜고 이에 모든 將兵들이 따라서 江을 건넜다. 유신은 高句麗軍이 큰길에서 지킬 것을 念慮해 일부러 險하고 좁은 길을 擇해 나아갔는데, 이따금 길에서 敵兵을 만나 싸워서 이기면서 障塞 (獐塞)의 險한 곳에 이르렀다. 겨울의 酷寒에 사람과 말이 지치고 疲困해 쓰러지는 者가 續出하는 앞에서 유신은 웃옷을 벗고 直接 채찍을 잡고 말을 몰아 앞에서 사람들을 이끌었다고 한다. 그렇게 險한 길을 빠져나와 麾下의 보기감(步騎監) 熱氣(裂起)·球根(仇近) 等 15名을 먼저 平壤에 보내어 新羅軍이 到着했음을 蘇定方에게 알렸는데, 이때 蘇定方은 鸞새와 송아지를 종이에 그려 보냈다. 元曉 의 풀이로 이것이 新羅軍에게 "어서 軍士를 돌리라(速還)"는 暗號文임이 確認되었고, 暘烏(楊?)에 陣을 치고 있던 유신은 金仁問과 金孃도, 아들 김군승을 보내 黨의 陣營에 軍糧을 보내고, 蘇定方은 軍糧을 받자마자 바로 退却했다.

維新의 命令으로 黨의 陣營에 갔던 量도 等은 따로 軍事 8百 名과 함께 뱃길로 歸國했는데, 유신은 退却하는 길에 高句麗軍의 奇襲에 對備해 北과 북채를 모든 소의 허리와 꼬리에 매달아 뛸 때마다 소리를 내게 하고, 또 땔나무를 쌓아 놓고 태워서 煙氣와 불이 끊이지 않게 해놓는 等의 攪亂 作戰을 펼치면서 밤中에 몰래 票下(瓢河, 臨津江 )에 이르렀다. 江을 건너기에 이르러 유신은 나중에 건너는 놈은 베겠다는 命을 내렸고, 軍士들이 다투어 江을 건너는데 半쯤 건너자 高句麗 兵士들이 追擊해 와서 미처 건너지 못한 新羅 兵士들을 잡아 죽였다. 유신은 다음날 高句麗 兵士를 뒤쫓아 數萬 名을 죽였다. 나루를 건너 江가에서 쉬는데 高句麗軍이 다시 追擊해오자, 유신은 쇠뇌 를 利用한 集團射擊으로 高句麗軍을 逆襲해 敗退시켰으며, 將軍 한 사람을 사로잡고 1萬餘 名을 목베는 戰果를 올렸다. 서울로 돌아와 功을 論하는 자리에서, 유신은 먼저 先發隊로 뽑아 보냈던 熱氣와 球根에게 미리 級飡 乙 준 뒤, 文武王에게 그들의 功勞를 論하며 級飡보다 높은 沙飡 을 주어야 한다고 主張해 이를 貫徹시켰다.

한便 百濟 興復群 內部에서는 分裂이 일어나, 道琛이 福信에게 殺害當하고 復申이 全權을 차지했으나 다시 부여풍 에게 살해당하는 等 混亂이 거듭되는 가운데, 부여풍은 再次 高句麗와 왜에 援兵을 請해 나·黨 聯合軍의 攻擊을 막으려 했다. 663年 , 黨으로부터 增員된 손人事 等이 이끄는 水軍과, 文武王과 維新 等의 네 將帥들이 이끄는 陸軍이 서로 陸地와 바다에서 백제와 왜의 聯合軍을 쳐서 이기고 마침내 百濟 興復君의 本據地 走流性 을 陷落시켰다. 그 功으로 유신은 겨울 11月 20日에 土地 500結을 賞으로 받았다.

665年 唐 高宗 이 보낸 使臣 양동壁(梁冬碧) · 임지고(任智高) 等이 維新을 問安하여, 그에게 棒狀政經(奉常正卿) · 평양군開國公(平壤郡開國公) 食邑 (食邑) 2千 號라는 黨의 官職을 주었다. 666年 에는 맏아들인 大阿飡 김삼광 이 黨 高宗의 要請으로 黨에 불려가, 좌무위翼部中郞將(左武衛翊府中郞將)으로서 高宗을 宿衛하게 되었다. 667年 高句麗 征伐에 나섰으나 病으로 싸움터에 나가지는 못하였다. 代身에 文武王이 遠征을 나가고 유신은 內定을 맡아보았다. 668年 大塚觀(大摠管)에 任命되었으나, 늙고 衰弱해진 데다 病까지 들어 直接 遠征에 參加하지는 못하고 徐羅伐에 남았으며, 代身 維新의 조카이자 妻兄인 金仁問과 維新의 아우인 김흠순 等이 代身 主張(主將)으로 나섰다. 그리고 9月 26日에 나·당 聯合軍은 마침내 平壤을 陷落시키고 高句麗를 滅했다. 한便 이 날, 왜(倭)에서는 덴지 天皇 의 謹愼 나카토미櫓 가마타리 가 新羅의 使臣인 社훼級飡(沙喙級?) 김동엄(金東嚴) 等에게 金庾信에게 膳物할 배 한 隻을 好벤(法弁)·神秘쓰(秦筆) 두 沙門을 시켜 傳達하고, 사흘 뒤에는 문무왕에게도 또 手語朝鮮(輸御調船) 한 隻을 膳物하였다. [1]

回軍하는 길에 남천주에 들른 文武王은 예전 維新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朝廷에 奉仕하며 세운 功過 維新이 그間 이룬 일들을 臣僚들 앞에서 述懷하며 유신에게 太大舒發翰 (太大舒發翰)의 官等과 食邑 5百 號를 내리고, 수레와 지팡이를 내림과 同時에 大闕에서 몸을 굽히지 않는 것이 許諾되었으며, 維新의 僚佐들에게도 모두 1等級씩 位階를 올려주고 있다. 唐 高宗 또한 金庾信에게 調書(詔書)를 주었는데, 그 實物은 維新의 5世孫 때까지 保全되다 失傳되었다고 한다. [2] 以後 病으로 直接 政治나 軍事活動에는 參與하지는 못하고, 다만 王室과 軍事의 元老로서 王에게 여러 次例 戰略 樹立에 對해 諮問을 맡았다.

羅唐戰爭 編輯

백제와 高句麗가 滅亡한 뒤, 黨은 그 옛 땅에 熊津都督府 安東都護府 를 設置하여 直接統治할 뜻을 보였다. 또한 문무왕에게는 계림주大都督(鷄林州大都督)이란 官職을 내리는 等 新羅를 黨의 一介 主로 取扱하며, 韓半島 全體를 支配하려 했다. 이미 黨은 百濟 興復運動이 鎭壓된 直後인 664年에 백제 義慈王의 아들인 부여융을 熊津都督으로 派遣하고 文武王을 呼出하여 취리산에서 會盟(條約)을 締結하게 했는데, 이는 黨의 傀儡政權으로서 백제를 부활시켜 新羅와 맞서게 하려는 것으로 新羅에 依한 平壤 以南의 支配를 認定한다는 當初의 約束과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高句麗가 滅亡한 뒤에도 新羅가 高句麗로부터 빼앗아 차지하고 있던 卑劣홀을 新羅로부터 빼앗아 高句麗에게 주는 等, 黨은 徐徐히 新羅에 對한 影響力 擴大를 試圖하고 있었다.

最終的으로는 糖이 백제와 高句麗 다음으로 新羅를 노릴 것이라는 事實은 維新에 依해 이미 豫見된 것이었다. 新羅는 韓半島에서 唐缾을 몰아내기 위한 戰爭을 始作했고, 高句麗 復興軍을 支援하여 백제 땅에 駐屯하던 唐缾을 襲擊해 그들을 몰아내고 백제 地域에 對한 支配 體制를 다져 나갔다. 高句麗軍을 支援하던 新羅軍은 672年 말갈과 聯合해 石門(石文)벌에 陣을 치고 있던 唐軍과의 戰鬪에서 그만 大敗하였다. 新羅의 여러 將帥들이 戰死한 이 戰鬪에 維新의 아들로서 新羅軍 脾臟(裨將)의 資格으로 參戰했던 김원술 이 살아오자 유신은 元述에게 祕藏으로서 다른 將帥들을 따라 죽지 못하고 목숨을 扶持한 것을 '王命을 無視하고 집안의 家風을 더럽힌 罪'라 하여 法으로 處刑할 것을 請했다. 文武王은 이를 拒絶하고 元述을 사면했으나, 以後 元述은 집에도 돌아가지 못한 채 山 속에 謹愼하여 以後 維新이 숨을 거둘 때까지 숨어 살았다. 한便 直接的인 戰鬪보다는 性 爲主의 防禦戰으로 戰術을 變更하자는 金庾信의 助言에 따라, 新羅는 漢山州에 主張性을 쌓는 等 各地에 防禦據點을 構築하고, 앞서 捕虜로 잡았던 熊津都督府 所屬 黨의 兵卒들을 9月에 돌려보내고 謝罪文의 形式을 담은 表文과 많은 物品을 黨에 바쳤다.

死亡 編輯

文武王 13年( 673年 ) 봄 正月에 皇龍寺와 재성 사이에 큰 별이 떨어지고 地震이 일어나 朝廷과 民間이 어수선해지자, 유신은 王을 謁見하여 이番의 災殃은 國家가 아닌 自身에게 일어날 일에 對한 凶兆이니 神經쓸 것 없다며 慰勞했다. 以後 병들어 누운 自身을 問病하러 訪問한 文武王에게, "처음부터 못하는 이야 없진 않겠지만, 끝까지 잘 맺는 이는 거의 없다네(靡不有初 鮮克有終)" [3] 라는 《 市警 》의 말을 引用하며 臣下로서 王에게 當付하는 말을 傳했다. 그리고 며칠 뒤 自宅에서 숨을 거둔다. 忌日은 7月 1日, 享年 79歲였다.

《三國史記》列傳에는 그의 죽음과 關聯해 이런 이야기를 收錄하였다. 金庾信이 病을 얻기 한 달 前, 軍服을 입고 武器를 든 數十 名이 그의 집에서 울면서 나오더니 곧 사라져 버리는 것이 目擊되었는데, 유신은 이 이야기를 傳해 듣고 "나를 지켜주던 吟病(陰兵)이 내 福이 다함을 보고 떠나간 것"이라며, 金庾信 自身이 얼마 못 가서 죽을 것임을 豫想했다는 것이다. 文武王은 그의 죽음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緋緞 1千 匹과 兆 2千 席을 扶助로 보내고 軍樂의 高取水(鼓吹手) 100名을 葬禮式에 보내주었다. 維新의 遺骸는 금산원(金山原)에 묻혔고, 王命으로 그의 功績을 記錄한 碑石이 무덤 앞에 세워졌으며 守墓人을 두어 무덤을 지키게 했다.

흥덕왕 (興德王, 《三國遺事》는 경명왕) 10年( 835年 ), '興武王(興武王)'으로 追尊되어 事後 王으로 地位가 格上되었다. [4]

行跡 및 業績. 編輯

  • 標示된 날짜는 서기를 除外하고는 모두 陰曆이다.
  • 新羅의 固有 年號를 쓰던 時期는 모두 年號로, 그렇지 않은 境遇는 王의 在位年度로 表記하였다.
왕대 및 年號 書記 날짜(陰曆) 內容 出處
乾鰒 (建福) 12年 595年 未詳 태어남(1세) 《三國史記》
乾鰒 26年 609年 未詳 畫廊이 되어 宂話郎徒를 이끌게 됨(15세) 《三國史記》本紀
乾鰒 28年 611年 未詳 中岳에 들어가 수도함(17歲) 《三國史記》本紀
乾鰒 29年 612年 未詳 劍術을 닦아 國選이 됨(18세) 《三國遺事》
乾鰒 46年 629年 8月 아버지를 따라 從軍하여 高句麗 娘臂城을 陷落시킴(35세) 《三國史記》本紀
仁平(仁平) 9年 642年 8月 백제 義慈王이 쳐들어와 대야性을 陷落시키고, 金庾信의 妹弟인 金春秋의 딸 고타소랑과 사위 김품석이 모두 死亡하다. 《三國史記》本紀
겨울쯤 압량주도독이 됨. 援兵을 請하러 高句麗에 갔다 抑留된 金春秋를 救하기 爲해 軍士를 모음(48세) 《三國史記》本紀,
김유신列傳
仁平 11年 644年 9月 小版 官等에 오름. 上將軍으로서 백제의 街彗星 等 일곱 城을 차지하고 街혜진을 열다(50세) 《三國史記》本紀
仁平 12年 645年 正月 罵詈砲聲을 攻擊한 百濟의 大軍을 다시 喪主將軍으로서 나아가 擊退하고 2千 名을 베다. 《三國史記》本紀
3月 王命으로 百濟를 치러 나가다.(50세) 《三國史記》本紀
仁平 16年 647年 正月 上大等 毘曇과 廉宗이 女王의 不德을 빌미로 亂을 일으키다. 《三國史記》本紀,
김유신列傳
正月 8日 善德女王이 死亡하다. 《三國史記》本紀
正月 17日 毘曇과 염종의 亂을 鎭壓하고 그 9族을 誅殺하다. 《三國史記》本紀
10月 무산성 等 3城을 쳐들어온 백제군을 擊退하다.(53세) 《三國史記》本紀,
김유신列傳
泰和 (太和) 元年 648年 3月 백제의 佐平 의직이 西쪽 變更으로 쳐들어와 요거性 等 10城을 掠奪하다. 《三國史記》本紀
4月 압량주君主로서 대야성을 攻擊, 反擊하는 百濟軍을 옥문곡까지 誘引하여 急襲해 이기고 捕虜로 잡은 百濟의 將帥를 送還하는 代價로 김품석 夫婦의 遺骨을 返還받다. 《三國史記》김유신列傳
未詳 百濟의 惡性 等 12城을 쳐서 陷落시킴. 伊飡 官等에 오르고 尙州行軍大塚觀이 되다. 《三國史記》김유신列傳
未詳 百濟의 진례성 等 아홉 城을 攻擊. 《三國史記》김유신列傳
泰和 2年 649年 8月 석토성 等地로 쳐들어온 백제의 將軍 銀賞과의 戰鬪에서 我軍 陣營에 侵入한 間諜을 逆利用하는 戰法으로 勝利를 거두다.(54세) 《三國史記》김유신列傳
진덕여왕 4年 [註解 3] 650年 6月 백제와의 戰鬪에서 勝利한 消息이 使臣을 통해 唐나라에 알려지다.(55세) 《三國史記》本紀
진덕여왕 8年, 太宗 武烈王 元年 654年 3月 眞德女王이 昇遐하다. 和白會議에서 君臣들을 說得해 伊飡 金春秋를 王으로 推戴하다.(60세) 《三國史記》김유신列傳,
《三國遺事》
太宗 武烈王 2年 655年 1月 백제가 高句麗, 말갈과 함께 新羅의 33個 性을 쳐부수다. 《三國史記》新羅本紀,
백제본기
9月 백제 땅에 들어가 百濟의 逃婢天性을 陷落시키다. 《三國史記》김유신列傳
未詳 백제에 捕虜로 끌려가 佐平 임자의 종이 되었던 전 굴압현令 朝美押을 통해 임자와 接觸, 百濟의 主要 情報를 빼내는데 成功하다. 《三國史記》김유신列傳
未詳 太宗 武烈王의 딸이자 自身의 조카인 志操(智照)를 아내로 맞이하다.(61세) 《三國史記》本紀
太宗 武烈王 7年 660年 正月 上大等 錦江(金剛)의 死亡으로 그 後任으로서 上大等이 되다. 《三國史記》本紀
3月 唐 高宗이 보낸 將帥 蘇定方이 新羅의 王子 金仁問과 함께 13萬 大軍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다. 《三國史記》本紀
5月 26日 太宗 武烈王과 다른 장수들과 함께 軍士를 거느리고 徐羅伐을 出發하다. 《三國史記》本紀
6月 18日 南川停에 이르다. 《三國史記》本紀
6月 21日 王命으로 太子 법민과 함께 큰 배 1百 隻을 거느리고 덕물度에서 蘇定方과 會見하다. 《三國史記》本紀
7月 9日 太子 법민과 함께 新羅軍을 指揮, 황산벌에서 백제의 階伯이 이끄는 5千 軍士를 擊破하다. 《三國史記》本紀
7月 11日? 約束한 期日에 늦었다는 理由로 督軍 김문영을 處刑하려는 蘇定方에게 맞서 그가 물러나게 만들다. 《三國史記》本紀
7月 12日 進軍을 늦추는 蘇定方을 督勵하며 네 길로 나누어 소부리 벌판으로 進擊하다. 《三國史記》本紀
7月 13日 백제의 首都 泗沘城을 陷落시키고 太子 융과 佐平 舍宅天福 等을 捕虜로 잡다. 《三國史記》本紀
7月 18日 熊津城으로 달아났던 義慈王이 城에서 나와 降伏하다.(백제 滅亡) 《三國史記》本紀
8月 2日 全勝을 記念하기 위해 主演을 베풀고 將兵들을 慰勞하다. 백제 땅을 들며 懷柔하려는 蘇定方의 꾐을 물리치다. 《三國史記》本紀,
김유신列傳
알 수 없음 백제를 멸망시킨 뒤 新羅를 치려는 唐나라軍에 맞설 計劃을 王에게 進言하다.(66세) 《三國史記》김유신列傳
9月 3日 蘇定方이 義慈王을 비롯한 백제의 王族과 臣僚, 百姓을 데리고 뱃길로 唐나라로 돌아가다. 《三國史記》김유신列傳
太宗 武烈王 8年, 文武王 元年 661年 6月 太宗 武烈王 승하, 太子 法民이 卽位하여 文武王이 되다. 唐나라에서 돌아온 金仁問과 김유돈이 高句麗를 칠 援兵을 내라는 唐나라 高宗의 勅命을 傳하다. 《三國史記》本紀
7月 17日 高句麗 遠征軍의 大將軍으로 任命되다. 《三國史記》本紀
8月 時이穀精(始飴谷停)에서 熊津의 唐나라軍으로부터 食糧 普及 要請을 傳해 듣다. 《三國史記》本紀
9月 19日 王命을 받들어 웅현정(熊峴停)에 여러 銃館들과 모여 誓約하다. 《三國史記》本紀
9月 25日 百濟 興復軍이 占領하고 있는 甕産城을 包圍하다. 《三國史記》本紀,
김유신列傳
9月 27日 甕産性을 陷落시키고 熊津城으로 가는 軍糧 輸送路를 뚫는데 成功, 이때 검을 下賜받다. 《三國史記》本紀
10月 29日 唐나라의 弔問使節을 맞이하기 위해 軍士를 돌려 徐羅伐로 돌아오다. 《三國史記》本紀
11月? 蘇定方이 보내온 唐나라의 銜字都摠管 유덕민과 新羅의 大監 文川이 平壤을 包圍한 唐軍에 軍糧을 支援해줄 것을 要請해오자, 維新 스스로 自願하여 平壤으로 갈 것을 進言하다. 《三國史記》本紀,
김유신列傳
12月 10日 部長群 김인문, 金孃도 等 아홉 將軍과 함께 兵士를 引率하고 食糧을 실어 高句麗로 들어가다.(67세) 《三國史記》김유신列傳
문무왕 2年 662年 正月 23日 七衆下(七重河)를 건너 샛길로 山羊 땅에 이르다. 《三國史記》本紀,
김유신列傳
2月 1日 平壤과 가까운 障塞에서 麾下의 보기감 熱氣 · 球根 等을 蘇定方에게 보내 新羅軍이 왔음을 알리게 하다. 《三國史記》本紀,
김유신列傳
2月 6日 暘烏에 陣을 치고 金仁問과 金良圖를 보내 蘇定方에게 軍糧을 傳해준 뒤, 唐軍이 撤收하자 곧 退却. 追擊해오는 高句麗軍을 避해 票下를 건넌 뒤 反擊하여 高句麗軍 1萬 名을 戰士시키고 그만큼의 兵仗器를 얻음. 이 공으로 本彼宮의 土地와 奴婢, 寶物을 銀賞으로 下賜받다. 《三國史記》本紀,
김유신列傳
문무왕 3年 663年 8月 13日 장수로서 文武王을 따라 唐軍과 함께 백제 興復君의 據點인 두率性(周留城)을 쳐서 陷落시키다. 《三國史記》本紀,
김유신列傳
11月 20日 百濟 興復君을 鎭壓한 公的으로 土地 5百 結을 下賜받다.(69세) 《三國史記》김유신列傳
문무왕 4年 664年 正月 自身의 高齡을 들어 물러나기를 請하였으나 許諾되지 않고 代身 几杖과 按席을 下賜받다. 《三國史記》本紀
3月 百濟의 殘黨들이 泗沘城에서 叛亂을 일으켰으나 鎭壓되다. 《三國史記》本紀,
김유신列傳
문무왕 5年 665年 未詳 唐 高宗이 그를 棒狀政經(奉常正卿) 평양군開國公(平壤郡開國公) 食邑(食邑) 2千 號로 봉하다. 《三國史記》김유신列傳
문무왕 6年 666年 未詳 唐 高宗이 아들인 阿飡(本紀에는 나마) 김삼광에게 좌무위翼部中郞將(左武衛翊府中郞將)職을 내림. 김삼광이 김천존의 아들 翰林과 함께 宿衛하다. 《三國史記》김유신列傳
문무왕 7年 667年 가을 8月 高句麗 遠征軍의 一員으로서 王을 따라 將軍의 資格으로 서울을 出發하다. 《三國史記》本紀
겨울 11月 11日 障塞에서 唐軍이 撤收했다는 消息에 軍士를 돌리다. 《三國史記》本紀
문무왕 8年 668年 6月 21日 高句麗 遠征軍의 最高 總司令官인 臺當대총관에 任命(單 風病 때문에 參戰하지 못하고 徐羅伐에 머물렀다). 《三國史記》本紀,
김유신列傳
9月 26日 나 · 唐 聯合軍이 高句麗의 首都 平壤城을 陷落시키다(고구려 滅亡).
덴지 天皇의 謹愼人 나가토미노 가마타리로부터 배 한 隻을 膳物받다.
《三國史記》本紀,
《舊唐書》및 《日本書紀》
10月 22日 太大舒發翰(太大角干)의 官等과 食邑 5百 號를 下賜받고, 수레나 지팡이와 더불어 大闕에 오를 때 몸을 굽히지 않는 것이 許諾되다. 《三國史記》本紀,
김유신列傳
文武王 9年 669年 겨울? 말 기르는 牧場 6곳을 下賜받다. 《三國史記》本紀
文武王 12年 672年 8月 高句麗 興復君을 支援하던 新羅軍이 石門(石門) 벌판에서 高看過 李謹行이 이끄는 唐軍에 敗하다. 唐軍에 맞서 防禦戰을 펼칠 것을 進言하면서, 祕藏으로서 參戰했으면서 살아남은 아들 元述의 處刑을 要請하지만 許諾되지 않다. 《三國史記》本紀,
김유신列傳
文武王 13年 673年 7月 1日 自身의 집에서 死亡. 享年 79歲. 《三國史記》本紀,
김유신列傳

人物 編輯

維新의 人物像은 大槪 《三國史記》나 《三國遺事》에 나온 것이 全部다. 幼年時節의 逸話로 有名한 것은 《 破閑集 》(破閑集)에 收錄된 것으로, 少年 時節의 金庾信이 天官(天官)이라는 妓生에게 反해 자주 그女의 집에 드나들었는데, 어머니의 꾸중을 듣고 다시는 그女의 집으로 出入하지 않기로 盟誓하였다. 어느 날 술에 醉하여 집에 돌아가는 길에 위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말은 主人이 늘 가던 대로 그女의 집 앞으로 가서 멈추었다. 天官이 나와서 보고 반가워하고 또한 怨望스러워 눈물을 흘리는데, 유신은 말에서 내려 그 자리에서 말의 목을 베고 安葬까지 내버린 채 돌아왔다. 事後 그女가 살던 집터에는 천관사 (天官寺)라는 절이 세워졌다. [註解 4]

價値觀 같은 것을 보면, 毘曇의 亂을 鎭壓하면서 별이 王宮인 月城에 떨어진 것에 氣勢가 오른 叛軍을 相對로 놀라 어쩔줄 모르는 女王과 臣僚들을 向해 "吉함과 不吉함이란 定해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이 부르는 것" [5] 이라며 一蹴하는 改名된 態度를 보이기도 한다. 《三國遺事》에는 新羅의 援兵 要請을 받고 白江까지 到着한 唐軍 長壽 蘇定方이 갑자기 하늘에 나타나 將軍의 陣營 위를 빙빙 맴도는 새를 보고, '原水(元首)가 害를 입을 徵兆'라 하여 怯먹고 上陸하지 않으려는 것을 "겨우 저런 것 때문에 일을 그르쳐서야 되겠습니까."라며 칼을 새에게 겨누자 새는 몸이 찢겨져 땅에 떨어져버리고, 蘇定方은 그제서야 疑懼心을 풀고 軍士를 白殭에 上陸시켜 戰鬪에 나섰다는 記錄도 있다. [6] 다만 이 記錄은 蘇定方이 白殭에서 上陸하기 直前 金庾信은 백江이 아니라 황산벌에 있었다는 時間的 矛盾이 생겨, 後代 사람들이 金庾信을 浮刻시키고 일부러 蘇定方의 庸劣함을 强調하기 위해 創作했거나 비슷한 事件이 戰鬪 初期에 있었던 일인 것처럼 訛傳되었을 可能性이 있다.

흔히 事大主義의 表象으로 認識되어 온 김유신이지만, 황산벌 戰鬪로 約束 期日에서 하루 늦은 것을 트집잡아 新羅軍 督軍 김문영을 處刑하려 하자 "황산벌에서 우리가 어떻게 싸웠는지 보지도 못하고, 그저 期日이 늦은 것을 트집잡아 우리에게 罪를 주려 한다. 아무 罪도 없이 나는 이따위 侮辱을 받을 수 없으니, 나는 唐缾과 먼저 싸우고 난 다음에 백제를 깨뜨리겠다!" [7] 며 强勁한 態度를 보여 끝내 蘇定方이 한 발 물러서게 했고, 黨病이 아직은 同盟이지만 백제와 高句麗를 滅하고 나면 다음은 新羅가 그들의 目標가 될 것을 豫測하고 그들과 싸울 計策을 王에게 推薦하기도 했다. 武烈王이 "우리를 위해 우리의 敵을 滅해준 그들을 친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겠느냐?"며 消極的인 態度를 보이자, 유신은 "개도 꼬리를 밟으면 自己 主人이라도 가리지 않고 그 다리를 물어버리는 法. 어려움을 當하여 어찌 自身을 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8] [註解 5] 라 말하여, 只今 同盟이나 血盟關係에 있다 해서 그저 無條件 依支하고 따라다니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徹底한 現實的 態度를 堅持하고 있다.

軍事的인 面에서는 할아버지 때부터 쌓아온 집안의 家風을 重視해, 黨과의 戰鬪에서 敗하고 살아 돌아온 元述에 對해 "王命을 어기고 家訓을 더럽힌 罪를 물어 목을 베소서" [2] 라 王에게 請하는 等 强勁한 態度를 보여, 끝내 아들이 집안으로부터 버림받아 平生 숨어살도록 몰아갔다. 實際로 家門의 安危를 重要하게 여기는 그의 모습은 後날 죽은지 100年이나 지나 武烈王系 獨裁의 强化와 함께 그의 子孫이 新羅 政界로부터 冷待받으며 疏忽한 待接을 받게 되자 그의 무덤에서 회오리바람이 일고 歎息하는 소리가 들렸다는 [2] [註解 6] 《三國史記》속의 逸話로 나타나기도 한다(다만 그의 戰術이나 戰略에 對해서는 大體로 稱讚보다는 批判이 늘어나고 있는 趨勢다). 한便으로는 個個人의 骨品이나 身分, 慣例보다는 能力과 功績을 重視해, 662年 平壤을 包圍한 蘇定方의 唐缾에게 軍糧을 輸送하는 데에 功을 세운 麾下의 熱氣 · 球根에게 私撰이라는 벼슬을 내려줄 것을 請하며, 너무 過하지 않느냐는 王의 指摘에 "벼슬은 功績을 담는 그릇으로 공에 報答하여 주는 것인데 무엇이 지나치겠습니까." [註解 7] 라는 말로 期於이 두 사람의 管等 授與를 貫徹시킨다.

評價 編輯

이미 新羅 當代부터 金庾信은 나라를 크게 일으킨 忠臣이자 柱石之臣으로 崇仰받았다. [註解 8] 事後 東海의 龍이 되었다 알려진 文武王과 함께 金庾信은 33千 의 하나가 되어 新羅를 鎭護한다는 意識이 널리 퍼졌다. 新羅에서 武烈王에게 黨 太宗과 같은 '太宗'의 廟號를 붙인 것을 糖이 抗議하며 지우도록 要求했을 때, 新羅 調整은 唐 太宗이 現身(賢臣) 魏徵 (魏徵)을 얻어 大業을 이룬 것과 武烈王이 성신(聖臣) 金庾信을 얻어 삼한一統의 大業을 이룬 것은 同格이라는 論理로 拒絶하고 있다. [6] [9]

高麗 顯宗 (顯宗)은 최치원 · 薛聰 과 더불어 그를 開國公(開國公)에 봉했다. 《三國史記》를 지은 김부식 은 列傳의 總 分量(10卷) 가운데 3卷을 모두 金庾信에게 割愛하고 있을 程度로 金庾信을 추켜세웠으며, 朝鮮朝에는 武廟(武廟)를 세워 配享해야 할 人物의 한 名으로 擧論되기도 했다.

文武王과 그 臣僚들
高句麗를 멸망시키고 돌아오던 길에 남천주에 들러 文武王은 그의 祖父 때부터 新羅 朝廷에 奉仕해 온 일을 들며, "只今 維新이 할아버지, 아버지의 일을 繼承하여 辭職 (社稷)을 지키는 臣下가 되어 나가서는 將帥가 되고 들어와서는 宰相이 되어 그 功績이 많았으니, 공의 一家에 依支하지 않았더라면 나라의 興亡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다" [2] 며 金庾信의 功績을 추켜세우면서 官職과 銀賞을 올려주는 것이 어떠냐고 묻자 臣下들은 모두 同意하고 있다.
球根(仇近)
球根은 熱氣와 함께 金庾信의 名으로 蘇定方에게 軍糧을 輸送하는 役割을 맡았고 그 功으로 金庾信의 推薦을 받아 私撰에 任命되었다. 金庾信의 셋째 아들인 波珍飡 遠征(元貞)을 따라 西原京 (西原京)의 술성(述城)을 쌓는데, 遠征이 다른 사람의 말만 듣고 球根이 일을 게을리 한다며 棍杖을 치자, 球根은 “나는 일찍이 熱氣와 더불어 죽음을 헤아릴 수 없는 곳에 들어가 大角干의 名을 욕되게 하지 않았고 大角干께서는 나를 無能하다 하지 않으시고 局社(國士)로 待接하셨는데, 只今 뜬所聞을 듣고 나에게 罪를 주니 平生 恥辱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소.”라며 抑鬱해했고, 遠征은 이 말에 平生 부끄러워하고 後悔하였다. [10]
尹瓘
東北 9城을 開拓한 尹瓘 은 平素 金庾信을 尊敬했으며, 여진 征伐을 앞두고 사람들에게 "金庾信이 戰爭할 때 6月이라 여름이었는데도 江물이 얼어붙어 軍士들이 건널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知性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니, 나라고 그렇게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라며 戰意를 불태웠다고 한다. [11] 다만 이것이 언제 어느 때를 가리키는지에 對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김부식
《三國史記》列傳 末尾에서 金富軾은 維新의 才能뿐 아니라 新羅 朝廷에서 그를 重用하여 믿고 일을 맡겨 疑心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工業을 이루었다며 新羅 調整의 役割을 慇懃히 强調하는 한便으로, 을지문덕 의 智略과 場보고 의 醫用度 中國의 書籍이 아니었으면 永永 잊혀질뻔 했는데 金庾信 같은 이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稱頌하여 士大夫는 勿論 꼴 베고 나무하는 아이까지도 능히 알고 있다며, 그 사람됨이 반드시 다른 사람과 差異가 있었을 것이라고 評價하고 있다.
최보
安鼎福의 《東史綱目》에 引用된 사론에서는 維新을 두고 "充分(忠憤)한 마음과 營爲(英偉)韓 智略을 기울여 統一의 功을 이루고 位(位)는 장상(將相)을 겸하여, 몸소 國家의 安危를 도맡아 20餘 年 동안 우뚝 國家의 將星(長城)"李 된, "뛰어난 재주로 그 훌륭한 임금과 適當한 때를 얻어 그 큰 功을 이룬 者"라 評價하며, "어려움을 두루 겪으면서 國事를 위하여 몸을 바쳐 公明과 忠節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保全하였으니, 維新 같은 사람이야말로 비길 만한 데가 드물다"고 好評하면서도 [12] , 興德王이 그를 興武王으로 추봉한 것에 對해서는 古代 (周)의 聖王 (成王)李 叔父이자 宰相이었던 住公 (周公)의 祭祀를 天子의 그것과 準하게 한 일을 들어, 아무리 功이 크다고는 하지만 "臣下로서 충성하는 것은 至極히 當然한 일", "君臣의 名分을 紊亂하게 만든" 處事라 批判하고 있다. [4]

否定的 評價로는

  • 황산벌에서 金庾信은 5萬의 新羅軍을 이끌고 5千 軍事의 階伯과 맞서 싸웠으나 階伯을 쉽게 물리치지 못하고 時間을 遲滯하였다. 軍事의 數가 10倍인 金庾信의 新羅軍이 階伯의 決死隊와의 戰鬪에서 서둘렀음에도 하루 遲滯하였다는 點에서 事實上 金庾信이 階伯에게 敗北한 戰鬪였다는 評價도 있다.
  • 황산벌 戰鬪 에서 金庾信은 踏步 狀態에 빠진 對峙 狀況을 突破하기 위하여 畫廊 反屈과 官昌의 죽음을 볼모로 軍事의 士氣를 높이는 戰術을 使用하였다. 어린 畫廊을 犧牲한 것은 非人間的인 것이었고 優勢한 軍勢를 利用한 다양한 戰術 驅使가 不足했다는 批判을 하며 金庾信이 뛰어난 智略家라는 美辭麗句는 誇張된 것이라는 評價가 있다.
  • 백제 征伐은 唐나라 가 主導했고 高句麗는 純全히 연개소문 의 아들들의 政權다툼으로 因한 內部의 分裂로 自滅한 側面이 있으며 唐나라와의 戰場에 金庾信은 直接 參加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高句麗의 軍力 自體는 楊萬春 安市城 에서 唐나라 軍隊를 相對로 크게 勝利를 거둘 程度로 唐나라보다 월등했음에도 不拘하고 淵蓋蘇文의 아들들끼리 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自滅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三國統一 過程에서 金庾信의 役割을 지나치게 稱頌하는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의 敍述은 公正한 歷史 人物에 對한 評價라기 보다는 追從者들이 美化한 이야기라는 見解도 있다.
  • 더군다나 金庾信과 新羅가 三國을 統一했다고 볼 수가 없는 것이 高句麗의 滅亡 自體도 淵蓋蘇文의 아들들이 自己네들끼리 싸우다가 自滅한 것인 데다가 高句麗가 滅亡하자마자 바로 高句麗의 將帥 出身인 大祚榮 渤海 라는 나라를 建國해서 高句麗의 遺志를 받들었으며 新羅가 高句麗의 領土를 占領한게 아니라 高句麗의 領土는 渤海가 차지했다는 點으로 보면 金庾信은 高句麗를 征伐하지 못했다고 봐야 옳다.
  • 歷史學者 신채호 는 金庾信이 王家의 外戚이 되기 위해 그의 누이들을 利用했다는 點을 들어, 出世의 手段으로 家族을 利用했다며 否定的으로 評價하였다.

墓所·사당 編輯

 
김유신將軍墓으로 가는 興舞門 正面寫眞

金庾信이 묻힌 금산원의 무덤은 《三國遺事》에는 瑞山 모지사(毛只寺) 北쪽, 東으로 向해 뻗은 봉우리에 있다고 했다. 《世宗實錄》地理誌에는 모지사 北쪽 봉우리에 있고 部(府)와는 西쪽으로 4里 거리라고 했고,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慶州府 西쪽 西岳里(西岳里)라 記錄되었다. 金庾信의 것이라 傳하는 墓所는 오늘날 慶尙北道 慶州市 충효동 산 7-10番地에 있는데 이것이 眞짜 金庾信의 무덤인가에 對한 疑問이 現在까지 끊이지 않고 있다(자세한 것은 金庾信墓 項目을 參照할 것). 이 墓는 1963年 1月 21日 大韓民國 國家 史跡 第21號로 指定되었다. 무덤 周圍에는 墓를 지키는 호석(護石)으로 12方位로 主席(柱石)을 세우고 거기에 十二支神像(十二支神像) 을 조각했는데, 머리部分은 動物像이고 몸뚱이 部分은 引上(人像)이며 모두 武器를 잡고 서 있는 모습들이다. 무덤 周圍에 十二支神을 새기는 것은 新羅에서는 王의 무덤에만 許諾된 것이었다. 金庾信의 墓가 只今과 같은 王陵으로서의 形式을 갖추게 된 것은 아마도 興德王 때 그를 興武王으로 追尊韓 뒤의 일로 推定된다. 무덤 面積은 14,143m 2 이다.

 
慶州市 位置한 金庾信將軍의 무덤

記錄에 따르면 金庾信의 무덤 앞에는 王命으로 그의 功績을 記錄해 새긴 碑石이 세워졌는데, 新羅의 國子博士(國子博士)였던 설인선(薛因宣)李 그 碑文을 지었다고 傳하지만 現在는 碑石의 痕跡도 찾아볼 수 없으며, 다만 《임하필기》에는 그의 墓碑가 慶州 西쪽 10里 地點에 있었으며, 慶州府使를 지냈던 洪良浩가 그 墓에 祭祀를 지내고 비를 찾아보았으나 찾아내지 못하다가 20年 뒤에 이서구(李書九)가 金石첩(金石帖) 속에서 壬辰倭亂 以前에 拓本한 것 몇 張을 發見했는데, 筆法이 歐陽詢體와 많이 닮은 것이었다고 證言하고 있다.

現存하는 무덤 앞의 碑石은 後代에 그의 後孫들이 세운 것이다. 하나에는 '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 다른 하나에는 '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릉(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라 새겨져 있는데, 碑石을 새길 當時 그가 흥덕왕으로부터 興武王으로 封해졌음을 미처 알지 못하고 「妙(墓)」라 적었다가 나중에야 그 글字 위를 덮고 다시 「陵(陵)」字로 고쳐 새겼다. 하지만 碑石의 元來 材質과 글字를 메워넣은 材料의 才質이 서로 달라서 只今도 비가 오는 날에는 「陵」이라는 글字 뒤에 가려진 「妙」字의 痕跡이 드러난다고 한다.

그가 태어난 鎭川郡에는 이미 新羅 때부터 김유신社(金庾信祠)라는 祠堂이 있었는데 朝鮮 時代까지 國家에서 祭祀를 지냈다. 壬辰倭亂 丙子胡亂 을 겪으면서 廢墟가 된 것을 哲宗 2年( 1851年 ) 백곡면에 '竹筓社'를 세우고 金庾信의 影幀을 모셨으며, 書院撤廢令 으로 헐렸다가 1926年 金庾信의 後孫 김만희의 努力으로 只今의 자리에 吉祥紗(吉祥祠)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 이곳은 1975年에 整備되었으며, 뒷山인 길상산은 다른 이름을 太嶺山(胎靈山)이라 하는데 金庾信의 胎줄을 이 山의 봉우리에 묻었다는 데서 由來한 것이다.

慶州에는 明宗 18年( 1561年 )에 當時의 府尹 李霆(李楨)李 金庾信의 位牌를 모시기 위해 地域 儒生들과 함께 선도산 아래에 鉏惡情事(西岳靜舍)를 세웠는데, 壬辰倭亂으로 消失되었다가 1602年 1610年 에 걸쳐 祠堂과 講堂, 桐·書齋를 새로 지었고, 人組 元年( 1623年 )에 國家가 認定한 賜額書院으로서 '西岳'이라는 이름을 받고 只今의 西岳書院(西岳書院) 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때 金庾信에 더해 최치원 薛聰 을 더 配享하게 되었으며, 書院撤廢令 때에도 閉鎖되지 않고 살아 남은 47個 書院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傳說 編輯

出生 傳說 編輯

三國遺事 》에는 金庾信이 國選(國仙)李 되었을 때, 高句麗와 백제를 치려고 謀議하던 中에 百席이란 郎徒로부터 敵國을 廉探하고 오자는 提議를 받아 밤에 길을 가던 中, 고개 위에서 偶然히 세 名의 女子를 만나게 되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親해졌을 즈음 유신으로부터 밤길의 目的을 듣고 女子들은 暫時 百席을 여기 두고 숲에서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며 維新을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女子들은 神의 모습으로 現身하여 유신에게 百席은 敵國의 사람으로 維新을 꾀어 敵地로 데려가려 한다며 警告한 뒤 사라졌다. 骨花冠에 이르러 유신은 白石에게 緊要한 文書를 잊고 왔다며 집으로 돌아온 뒤, 百席을 잡아 問招하여 그 理由를 알게 되었다. 白石의 말은 이러했다.

百席은 元來 高句麗 사람으로, 영양왕 때 高句麗에서 國境의 江물이 逆流하는 怪變이 생기자 高句麗의 王은 醜男이라는 占쟁이를 불러 點을 치게 했다. 醜男은 「王妃가 陰陽의 度를 거스른 까닭에 이런 變故가 생겼다」는 占卦를 내놓았고, 怒한 王妃는 王에게 터무니없는 말이라며 다른 것으로 試驗해보아 맞지 않으면 醜男을 重刑에 處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高句麗王은 한 마리를 箱子에 숨겨놓고 醜男에게 箱子에 든 것을 맞히게 했는데, 醜男은 箱子 안에 쥐가 들어 있다고 말하면서 그 數字는 한 마리가 아닌 여덟 마리라고 對答했다. 結局 처형당하게 된 醜男은 죽음을 앞두고 "반드시 다른 나라의 大將으로 還生해, 高句麗를 멸망시키고 말겠다."는 詛呪의 말을 남기고 처형당했다. 그를 죽이고 나서 미심쩍은 생각이 든 王이 쥐의 배를 갈라보게 했는데, 쥐의 뱃속에는 새끼가 일곱 마리 들어있는 것이었다. 그제야 醜男의 點이 事實임을 알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그 날 밤 高句麗王은 처형당한 醜男이 新羅 김서현의 夫人의 품에 들어가는 꿈을 꾸었고, 醜男이 新羅에서 金庾信으로 還生했다고 判斷한 高句麗王과 그 臣下들은 百席을 시켜 維新을 꾀어 죽이려 했던 것이다.

유신은 百席을 處刑한 뒤 自身을 救해준 세 神들에게 祭祀지내어 그 恩惠에 感謝하였다고 한다. 그 세 신은 실은 내림·혈례·골화 세 地域의 神으로, 以後 新羅에서는 國家 祭祀에서 始祖廟나 宗廟 다음으로 格이 높은 臺詞(大祀)로서 優待하였다.

金庾信의 檢(四寅劍/四寅劍) 編輯

金庾信의 傳說 中 가장 有名한 것은 徐羅伐 中岳 (中嶽)에서 船人을 만나 神祕로운 祕法을 傳受받고, 祈禱 遂行하다 별의 精氣가 서린 寶劍을 얻었다는 이야기이다. 《三國史記》는 진평왕 乾鰒 28年 辛未( 611年 ), 17歲의 金庾信이 重惡의 洞窟에 들어가 齋戒하고 하늘에 祈禱하였는데, 머문지 나흘째 되는 날 거친 털옷을 입은 한 老人이 나타나 「貴한 집의 子弟가 어째서 여기에 혼자 있느냐」고 물었다. 金庾信이 老人의 이름을 묻자 老人은 「나는 일정하게 머무르는 곳 없이 因緣을 따라 가고 머물며 이름은 難勝(難勝)이라 한다」고 紹介했다.

그가 平凡한 人物이 아님을 알게 된 金庾信은 두 番 절하고 가르침을 請했다. 처음에는 默默히 말이 없던 難承恩 金庾信이 여러 番 懇請하자 그제야 神祕한 祕法(秘法)을 가르쳐 주었다. 金庾信에게 祕法을 가르쳐주고 난 뒤, 「의롭지 못한 일에 쓴다면 도리어 災殃을 받을 것이니 함부로 傳하지 말라」는 말을 마치고 難僧科 金庾信은 作別하였다. 그가 2里쯤 갔을 때 維新이 쫓아가 바라보니, 難勝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山 위에는 五色의 燦爛한 빛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듬해인 乾鰒 29年( 612年 ) 金庾信은 다시 한 番 寶劍을 가지고 혼자서 熱박산(咽薄山)의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中岳에서 했던 것처럼 香을 피우며 하늘을 向해 寶劍에 빛을 드리우고 神靈을 내려줄 것을 祈禱했다. 사흘째 되는 밤, 許筬(虛星)과 覺醒(角星) 두 별의 빛이 내려와 칼에 깃들었다. 以後 金庾信의 검은 별의 精氣를 품은 靈검으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慶州의 단석산에는 마치 칼로 잘라낸 듯 表面이 반듯반듯한 바위가 여기저기 남아있으며, 現地의 傳承은 그것이 維新이 이곳에서 劍術 修鍊을 하며 바위를 잘랐던 痕跡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韓國의 江陵 에서 行해지는 江陵端午祭 는 金庾信의 劍이 名酒 (溟州) 南쪽의 先知事라는 절에서 90日 만에 鑄造되었다는 傳承을 傳하고 있는데, 金庾信의 검은 그가 火를 낼 때마다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왔다고 한다. [13] 이 劍을 가지고 金庾信은 백제와 高句麗를 물리치고 마침내 삼한을 統一하는 大業을 이루었고 죽은 뒤 名酒 大關嶺의 山神으로서 모셔지게 되었다고 傳하고 있다. 단석산뿐 아니라 隣近의 여러 山과 溪谷, 洞窟 等地에는 金庾信과 關聯된 戰勝을 傳하는 곳이 많이 分布되어 있다.

백제의 公主와 作怨聲(鵲院城) 編輯

慶州市 건천읍에는 作怨聲, 또는 作成(鵲城)이라는 土星이 남아 있는데, 《 憧憬雜技 (東京雜記)》에는 이 城의 이름 由來에 對해 다음과 같은 傳說을 남기고 있다. 백제를 攻擊할 當時 金庾信이 徐羅伐 王宮에서 30里假量 떨어져 있는 이곳에 駐屯하였는데, 백제의 王이 이 消息을 듣고 걱정하자, 遁甲術에 能하여 敵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싸우는 者用倂記(自勇兵器)라는 神祕한 武器를 부릴 줄 알았던 公主가 王을 안심시키고자 自請해서 까치 로 變身하여 이곳으로 날아왔다. 西쪽에서 날아온 까치 한 마리가 大將旗 끝에 앉아 울자 軍士들은 不吉한 徵兆로 생각해 陣中(陳中)이 크게 어수선해졌는데, 金庾信이 허리에 차고 있던 長劍을 빼들고 까치를 向해 겨누자, 까치는 땅에 떨어져 버렸고 그만 變身이 풀려 本來 모습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以後 이 城의 이름을 까치 作(鵲) 字를 써서 作成, 또는 作怨聲이라 부르게 되었다.

金庾信의 怨靈 編輯

 
前(傳) 미추왕릉

《三國遺事》 味鄒王竹葉軍兆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新羅 혜공왕 (惠恭王) 14年( 779年 ) 4月에 金庾信의 무덤 위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더니, 회오리바람에 휩싸인 金庾信이 여러 兵士를 거느리고 味鄒王 (味鄒王)의 陵으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덤 안에서 歎息하고 痛哭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살아서 平生 어지러운 것을 救濟하였고 三國을 統一한 功이 있었으며, 죽어 魂魄이 되었어도 나라를 지키며 災殃을 없애고 어려움에서 救濟하려는 마음에 조금도 變함이 없었는데, 지난 庚戌年( 770年 )에 [註解 9] 내 子孫이 아무 理由도 없이 죽임을 當했습니다. 이 나라의 王과 臣下, 그 누구도 더 以上 나의 功績을 생각해 주지 않으니, 나는 이제 멀리 다른 곳으로 옮겨가 더 以上 이 나라를 위해 애쓰지 않으렵니다. 大王께서는 부디 許諾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金庾信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에 무덤에서 對答하는 목소리(卽 味鄒王)가 「나와 公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저 百姓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공은 다시 前처럼 힘써 주기 바라노라.」 라고 對答했고, 똑같은 要請을 세 番이나 더 했지만 세 番 모두 거절당하자 金庾信의 魂靈은 다시 돌아갔다. 이것은 金庾信의 靈魂이 後孫의 抑鬱한 죽음을 원통해한 나머지, 新羅 王室(金氏)의 始祖인 味鄒王에게 抗議하며 呼訴한 것이었다. 惠恭王은 이 消息을 듣고 두려워하면서 代身(大臣)인 김경신 (金敬信)을 보내 金庾信의 무덤에 謝罪하게 하고, 金庾信이 生前에 平壤을 陷落시킨 뒤 福을 빌기 위해 세웠던 절인 取禪師(鷲仙寺)에 功德保全(功德寶田) 30結을 내려 冥福을 빌게 하였다고 한다.

當校(唐橋) 編輯

韓國의 慶尙北道 尙州市 함창읍 聞慶市 의 境界에 位置한 毛廛千이라는 江에는 當校(唐橋)라는 이름이 붙은 다리가 있었는데, 《三國遺事》는 《新羅古典》(三國遺事)이라는 文獻을 引用해, 당군의 摠管 蘇定方이 백제와 高句麗를 攻擊하고 나서도 돌아가지 않고 新羅를 멸망시키려는 計劃을 품고 있자 이를 눈치챈 金庾信이 이곳 當校에 黨의 兵士들을 불러놓고 宴會를 베푸는 척 鴆酒(鴆새 毒을 넣은 술)를 먹여 毒殺해 파묻었다는 傳說을 傳하고 있다. 다만 이 傳說에 對해서는 이를 收錄한 一然 自身도 疑問을 提起하며 信憑性이 없다고 否定하고 있다.

기타 編輯

《三國遺事》에는 新羅 善德女王 때의 密敎勝 密本 과 關聯해서 主要 登場人物로 登場하는 說話가 收錄되어 있다. 또한 《 大東韻府群玉 (大東韻府群玉)》에 引用된 《 新羅殊異傳 (新羅殊異傳)》의 다섯 說話 가운데 「老翁化狗(老翁化狗)」와 「竹筒美女(竹桶美女)」는 金庾信이 登場하는 說話이다.

家計 編輯

先代 編輯

婦人과 後孫 編輯

兄弟 編輯

  • 男동생?: 김흠순 (金欽純) 膝下에 10男 2女
    • 조카?: 反屈 (盤屈)
    • 조카?: 김원수(金元帥)
    • 조카?: 김원선(金元宣)
    • 조카?: 김원훈(金元訓)
  • 女同生?: 洑喜 (寶姬)
  • 女同生?: 문희(金文姬) - 後날 문명왕후 (文明王后)
  • 妹弟?: 태종무열왕 (太宗武烈王) 金春秋(金春秋) - 新羅 29代 王
    • 조카?: 문무왕 (文武王) - 新羅 30代 王.
    • 조카?: 김인문 (金仁文)
    • 조카?: 김문왕 (金文王)
    • 조카?: 김노차(金老且)
    • 조카?: 김지경(金智鏡)
    • 조카?: 김개원(金愷元)
    • 조카?: 지소부인 (智炤夫人)
  • 女同生?: 김정희(金政姬)
  • 妹弟?: 김달복(金達福)
    • 조카?: 김흠운 (金歆運)
    • 조카?: 김흠돌 (金欽突)
    • 조카?: 金欠伸(金歆信) - 第 26代 風月主 眞空(眞功)에게 出家

金庾信이 登場한 作品 編輯

古典 小說 編輯

  • 興武王聯의(興武王演義) - 朝鮮 高宗 14年( 1877年 ) 이정균(李鼎均)이 지은 古典小說이다.

드라마 編輯

映畫 編輯

小說 編輯

  • 윤승한 《(萬고명醬) 김유신》(1941年, 야담사)
  • 김정산 《삼한지》
  • 차무진 《金庾信의 머리일까》
  • 整數인 《高句麗》(前6卷)
  • 장태우 《文武》(前3卷)
  • 제성욱 《餘황선덕》(前2卷)
  • 황운성 《階伯의 칼》(前2卷)
  • 정진영 《善德女王》
  • 《千年戰爭》(前2卷)

新聞連載小說 編輯

  • 李文烈 《大王, 떠나시다》(2012) - 月刊중앙 5月號~10月號 連載(未完)

歷史 評傳 編輯

  • 《金庾信 말의 목을 베다》 글 皇胤 그림 손鑛山

漫畫 編輯

  • 《천관녀》(글: 박윤후, 그림: 조미현)
  • 《사라사》(글, 그림: 流量)
  • 《데自負》봄便(글: 윤인완, 그림: 양경일)

같이 보기 編輯

各州 編輯

內容主 編輯

  1. 해는 具體的으로 몇 年度인지 알 수 없지만, 大體로 文武王이 태어난 626年 에서 멀지 않은 以前 時點으로 여겨진다.
  2. 當時 新羅 王室에 善德女王을 繼承할 수 있는 近親 王族은 聖骨인 女王의 四寸 勝만 公州와, 眞骨이지만 6寸인 金春秋밖에 없었고, 그들을 除外한다면, 傍系 眞骨 貴族인 毘曇이 가장 有力한 王位 繼承者였다.
  3. 이때부터 黨의 年號를 使用하기 始作하였다.
  4. 오늘날에는 천관녀가 妓女가 아니라는 理論도 提起되고 있다. 그에 依하면 '天官'이라는 이름은 하늘에 祭祀지내는 巫女를 뜻한다는 것이다.
  5. 丹齋 申采浩는 이에 對해 金庾信이 唐缾의 野慾을 눈치채고 新羅쪽에서 먼저 高句麗와 同盟을 맺어 黨을 先制攻擊하자고 要請한 것이라고 解釋한다.
  6. 《三國遺事》勸第1, 기이1 味鄒王竹葉軍朝에도 이것이 記載되어 있다.
  7. 《三國史記》勸第47, 列傳7 熱氣(裂起). 當時 熱氣는 新羅軍 內의 步氣感(步騎監)을 맡고 있었는데, 步기감은 新羅에서 軍史監(軍師監)과 함께 死地에서 나마 (奈麻)까지의 官等을 가진 者들이 맡던 官職으로(《삼국사기》직관지), 級飡이나 私撰으로 오른다는 것은 破格的인 昇進이었다.
  8. 經營學者 예종석은 金庾信을 노블레스 오블리주 를 實踐한 將軍으로 評價하였다. 新羅의 將軍들은 畫廊 反屈과 官昌의 죽음에서 알 수 있듯 그 自身은 勿論이고 아들들도 國防의 義務를 實踐하는 것을 當然하게 여겼고 金庾信도 이러한 信念에 따라 食糧을 運搬하는 危險한 일을 自願하였으며, 아들 元述이 석문벌 싸움에서 끝까지 싸우지 않고 逃走한 것을 미워하여 絶緣하였다는 것이다. 살림知識叢書《노블리스 오블리주》/예종석 옮김/살림
  9. 新羅 惠恭王 6年. 이 해 가을 8月에 大阿飡 김융(金融)李 叛亂을 일으켰다가 失敗하고 처형당했다.
  10. 《金海金氏 族譜》에서는 법흥왕 비 보도부인의 女同生의 아들海傳해지고 있다.

參照週 編輯

  1. 《日本書紀》權27, 덴지키(天智紀) 7年(668)
  2. 《三國史記》勸第43, 列傳3 김유신 下(下).
  3. 《詩經》대아(大雅)篇 '탕(蕩)'.
  4. 《東史綱目》勸第5床(上), 乙卯 【興德王 10年, 黨 文宗 泰和 9年】
  5. 《三國史記》勸第41, 列傳1 김유신 上(上)
  6. 《三國遺事》勸第1, 기이2 太宗春秋공.
  7. 《三國史記》勸第5, 新羅本紀5 태종무열왕 7年(660年) 7月 11日條.
  8. 《三國史記》勸第42, 列傳2 김유신 中(中).
  9. 《三國史》勸第8, 新羅本紀8 神文王 12年(692年)
  10. 《三國史記》勸第47, 列傳7 球根
  11. 《高麗史》權96, 熱前提9 諸神(諸臣) 윤관조 「尹公, 事業傑然, 嘗慕庾信氏之爲人曰 '庾信, 六月?河, 以渡三軍, 此無他, 至誠而已. 予亦何人哉?'」
  12. 《東史綱目》第4하(下), 文武王 13年(673年).
  13. 《惺所覆瓿藁》權14, 文簿(文部)11 大領山神贊(大領山神讚) · 兵書(幷序)
  14. 花郞世紀

外部 링크 編輯

前任
호림공
第15代 風月主
後任
步種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