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은 1949年 9月에
金正淑
이 死亡한 뒤 1950年 1月 15日 副首相
홍명희
의 딸과 再婚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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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女는 몸이 弱하여 結婚 初(1950年 8月頃)에 일찍 死亡한 것으로 보이며, 김일성의 妻로 擧論되는 일이 거의 없다.
김일성은 1949年 9月,
金正淑
(金正淑)과 死別하고 1950年 1月, 홍영숙(洪永淑)과 再婚하였지만 1950年 8月, 홍영숙度 死別한 뒤
韓國 戰爭
中에 自己의 執務室 祕書였던 김성애와 1951年 12月, 3番째 結婚하였다.
김성애의 처음 이름은
김성팔
(金星八)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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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國戰爭 中에 1951年 3月 1日子 釜山日報에 金日成이 바람피우는 相對로 김성팔이란 이름이 처음 報道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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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年 6月, 當時,
平壤女子師範學校
學生이었던 김성애는 戰爭이 勃發하자 徵集되어 김일성의 執務室 祕書로 配置되었다. 1年 後 1951年 12月, 妊娠 事實을 감출 수 없을 程度로 배가 부른 김성애는 當時
朝鮮勞動黨
中央祕書
박정애
에게 自身이
金日成
의 아이(딸 金京鎭)를 妊娠한 것을 알렸고,
박정애
의 勸誘로 김일성은 祕密裏에 김성애와 結婚하였다. 이들의 結婚은 數年 間 祕密로 부쳐졌다가 1958年에 家族 寫眞을 公開하는 形式을 빌어 公式化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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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애는
金日成
과의 사이에서 딸 金京鎭, 김경숙, 김백연, 아들 金平一, 김영일 等을 비롯한 2男 3女를 뒀다.
그女는 1964年부터
最高人民會議
代議員에 연이어 選出되었다가 1976年 女盟 中央委員長으로 前任 되었다.
1973年
동생 김성갑이 金日成이
人民大學習堂
을 建立하려고 마련한 敷地에 김성갑 本人의 私邸를 짓는 事件을 저질렀다. 이는
金日成
銀 잘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金正日
이 김성애 집안 사람들의 뒷調査를 한 끝에 알아내서
金日成
에게 報告함은 勿論 大大的으로 까발렸다. 이에
金日成
은 엄청나게 憤怒했지만 그럼에도 不拘하고 김성애는
金日成
과
夫婦싸움을 벌이는 過誤를 저질렀다.
일이 이地境까지 가자
金日成
은 김성갑을 肅淸했으며 自身의 後繼構圖에서 김성애의 親아들인
金平一
을 永久 排除하게 되었다.
金正日
은 14歲 差異에 不過한 繼母 김성애를 어머니로 認定하지 않았고, 사이도 매우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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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김성애가 낳은 異腹同生
金平一
을 相當히 警戒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結局 김일성이 죽은 뒤 權力을 잡은 김정일에 依해서 김성애는 事實上 政界에 左遷 當하였다. 그리고 1997年 金日成 3周忌 行事에 參席한 것을 마지막으로 公式席上 또한 자취를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