初期 生涯
編輯
1801年
11月 25日
에 태어났으며 할아버지는
掌樂院
情 金里長(金履長)이고 生父는 府使 김인순이고 生母는 신일식(申日式)의 딸 평산申氏인데,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牧師 김이순에게 入養되어 文曲
김수항
家門의 奉仕손이 되었다. 親兄은
吏曹判書
를 지낸
김수근
이고,
김병학
,
김병국
兄弟의 三寸이 된다.
김수항
의 6代孫으로,
김창집
은 5代祖, 김제겸은 그의 高祖父가 된다. 景宗 때 연잉군을 推戴하려 했다는 理由로 死刑당한 김성행이 그의 曾祖 할아버지가 된다.
刑曹判書
를 지낸 이용수의 딸 沿岸李氏와 結婚했는데 일찍 죽었다. 沿岸李氏는 後에 增 軟癢府夫人에 追贈된다. 두番째 夫人으로 民繁絃의 딸 여흥閔氏와 再婚했는데, 後에 흥양府夫人에 封爵된다. 흥양夫婦인 여흥閔氏에게서 1男 1女를 두었는데, 딸이
철인왕후
金氏가 된다.
1824年
順調
가 희정당에서 낸 應製에 3等으로 合格하여 三下(三下)를 받고, 司馬試를 거치지 않고 留學의 資格으로
成均館
에 入學하여, 관학儒生이 되었다.
1830年
(純祖 30)
3月
驍名世子
가
春塘臺
에서 낸 應製에 合格하여 生員,進士試를 거치지 않고도 會試에 바로 應試할 수 있는, 直赴會試(直赴會試)의 資格을 받았다.
憲宗
때인 1841年
淫書
로 官職에 올라 그해
3月
繕工監
假監役이 된 뒤 病으로 물러났다가
4月
禁府
道士 等 여러 벼슬을 歷任했다.
1842年
(憲宗 8)
獻陵
職場
(獻陵直長),
1843年
掌苑署
別除,
1844年
漢城府
主婦,
辭職書
令,
1845年
漢城府
判官 等을 거쳐 그해
6月
金化
縣監
으로 나갔다. 金化縣監 在職 時 善政碑가 세워졌고,
1846年
10月
任期滿了로 遞職되었다.
1848年
別軍職에 任命된 뒤 副司果가 되고 이어
忠勳府
道士(忠勳府都事)가 되었다가 哲宗 卽位 後, 1851年(哲宗 2)
8月
承政院
同副承旨
가 되었다.
哲宗의 國舅
編輯
同副承旨가 된 뒤 初揀擇과 再揀擇을 거쳐서 8月 24日 三揀擇에서
순원왕후
에 依해 그의 딸이 王妃로 確定, 冊封되자 一旦 행부호군으로 轉職되었다가 그해 陰曆 윤8月 24日 國舅(國舅)로서 正一品
輔國崇祿大夫
로 昇進, 영
돈녕부
四가 되고 寧殷府院君(永恩府院君)에 封爵되었다. 그 뒤 相議願製造, 禁衛大將, 單四臺長(舟師大將), 摠戎使, 다시 禁衛大將, 扈衛大將, 訓鍊大將 等의 軍事要職을 맡아 側近으로 哲宗을 輔弼하였고, 그 뒤
김좌근
,
김수근
等과 함께 安東 金氏 勢道의 새로운 中心人物로 떠올랐고, 영돈녕府使에 이르렀다. 이때
安東 金氏
勢力은 朝野에 크게 떨쳤다.
1860年 哲宗의 親三寸이자 族譜上 5寸인
풍계군
以堂의 兩者 경평군 이호가 判中樞府事 김좌근 等과 그를 批判했다. 이때 그와
김좌근
을 批判했다는 理由로
경평군
이호는
司憲府
大司憲
서대순
의 彈劾, 處罰 上疏를 받고,
全羅道
强震
으로 流配된 뒤 軍號를 박탈당하고
풍계군
의 兩者 자리에서 罷養되었다. 그는 한대
김좌근
,
김병국
,
金炳基
等과 함께 잠깐 都城 밖으로 退出되지만 哲宗의 名으로 곧 되돌아왔다.
1860年
12月
暫時
廣州府
有數가 되었다가 1個月만에 영돈녕府使로 다시 轉任되었다.
1861年
에는 다시
尙衣院
製造에 任命되었다.
生涯 後半
編輯
1862年
돈녕부
道政
이하전
이 勢道家를 批判했다가 逆謀로 몰리자, 上疏를 올려
이하전
을 빨리 處分하라고 請하였다.
흥선大院君
은 그의 조카인
김병국
과
김병학
兄弟와 密啓를 맺고, 金炳學의 딸을 王妃로 앉힌다는 條件으로 自身의 아들을 王位로 올리는데 成功했다. 그러나 大院君은 執權한 뒤 安東 金氏와의 揀擇 約束을 破棄했다.
1862年
備邊司
堂上에 任命되었다. 그는 病席에 누운 사위 哲宗이 죽기 한달 前인
1863年
11月 6日
死亡했다. 그는 實力과 能力, 재주 없이 집안의 힘으로 權力을 휘둘렀다는 批判을 받았지만, 그는 書藝에 能하여 哲宗의 생조모
電算郡夫人 李氏
墓碑文과 生父
電界大院君
의 墓碑文의 글을 直接 짓기도 했다.
그가 죽자 哲宗은 王命을 내려 그의 葬事에 쓸 浮氣 一部를 輸送하도록 하고, 成服日에는
承旨
를 보내 祭祀지내고, 藝場 等屬은 前例대로 하게 했다. 또한 特別히 3年間 祿俸을 그대로 支給하게 했다. 事後
11月 7日
바로 增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영경연홍문관춘추관성균관관상감사에 贈職되었다. 몸이 肥大하여 抛物府院君(包物府院君)이라는 別名이 있었다.
墓碑文은
김병국
이 썼고
1864年
(高宗 1)
1月
碑石이 세워졌다. 後日
1873年
(高宗 10) 조카
김병학
이 追加 事項을 새로 새겼다.
처음에
京畿道
과천군
葛峴에 安葬했다가 뒤에
京畿道
驪州郡
대신면
초현리 167-1, 아랫새재 마을 入口 右側 野山으로 이장하였다. 그의 墓所 近處에는 高祖父
김제겸
의 墓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