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3年
(分큐 3年)
시모노세키 戰爭
後
다카스기 神社쿠
가 提案해 組織된 戰鬪 部隊로서 部隊 編制와 訓鍊은 全的으로
쇼카손주쿠
(松下村塾) 同門들에 依해 이뤄졌다. 그들은
요시다 쇼인
의 '西洋步兵론'으로 工夫한 同門들로 當初 目的은 異樣船(西洋 배)들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것이었다. 첫 本據地는 가이센도이야(廻船問屋)의 아카시 쇼이치로 邸宅(白石正一?)
[1]
이었고 後에 아카마 神宮(赤間神宮)으로 移轉했다. '奇異할 基(奇)'를 써 騎兵이라 한 것은 다카스기 神社쿠가 스승 요시다 쇼인의 遺志를 받들어, 身分을 超越한 總力的인 西洋 病制라야 日本 一介 番에 不過한 죠슈가 幕府의 壓政과 外勢의 侵略을 버틸 수 있다고 올린 上疏文에서 起因한다.
騎兵隊院들이 身分 問題로 죠슈 正規軍인 先鋒隊(撰鋒隊)와 葛藤을 겪은 끝에 '쿄호지 事件(?法寺事件)'을 일으켜 招待 騎兵隊 總督
다카스기 神社쿠
가 解任됐고, 後任으로 가와카미 野理致(河上?市)와 타키 야타로(??太?) 2人 總督 體制로 臨時 構成됐다가 아카네 他케토(赤根武人)가 正式 後任 總督에 올랐다. 軍監(監視役)으로는 야마가타 쿄스케(훗날의
야마가타 아리토모
)가 任命됐다. 分큐 3年(1863年) 교토에서는
8月 18日 政變
이 일어나 日本 皇宮에서 죠슈 番社들이 모두 退出됐다.
1864年
(겐지 元年)
新센龜尾
가 존洋파 죠슈番社들을 襲擊한
이케다野 事件
으로 많은 維新 支社들이 죽었다. 守勢에 몰린 죠슈 番은 反擊을 노리고 皇宮으로 몰려갔으나
아이즈番
,
舊瓦나番
으로 編成된 幕夫君과
사쓰마번
에게 밀려 쫓겨갔다. 後日
今文의 便
으로 알려진 이 事件으로
교토
市街地가 불타고
죠슈 番
은 逆賊 身世(朝敵)가 됐다.
幕府
는 皇宮의 詔勅을 받들어 大規模 征伐軍을 編成하고
죠슈 番
으로 向했는데, 죠슈 番의 騎兵隊는 이 때부터 本格的으로 活躍을 始作했다.
幕府 君의 第1次 征伐에서 죠슈番移 敗北한 後 前年度 '쿄호지 事件'으로 番에서 追放됐던
다카스기 神社쿠
가 歸還했다. 죠슈 번주인
모리 多카치카
는 다카스기에게 全權을 줬고 이에 죠슈 番內 保守 人士들은 줄줄이 肅淸됐다. 죠슈 番은 打倒 幕府(도막: 倒幕)의 旗幟를 올리고 西洋式 官制와 兵制를 導入한다.
1865年
(겐지 2年)엔 다시
에도 幕府
가 2次 죠슈 征伐軍을 編成해 쳐들어와 騎兵隊는 다시 戰鬪를 繼續했다.
1866年
(게이오 2年)에 죠슈番은 怨讐
사쓰마번
과
삿쵸 同盟
을 맺어 이듬해인
1867年
(게이오 3年) 10月
臺정봉환
을 達成하고
1868年
王政 復古(메이지 維新)를 宣言한다. 騎兵隊는 메이지 新政府軍에 配屬돼 幕夫君과
補身 戰爭
(戊辰??)에서 싸웠다. 이즈음 죠슈 番(維新 後 스誤 地球(周防地?)라 命名)에서는 第2 騎兵隊(或은 嵐氣病臺)가 새로 結成된다.
騎兵隊는 身分 制度를 打破해 農民이나 常民들과 混成으로 構成됐으나 制服 소매 끝에 出身 成分을 標示하는 裝飾(袖印:囚人)이 있긴 했다. 그들은 죠슈 番廳에서 月給을 주는 어엿한 正式 部隊였으며 隊員들은 따로 幕舍에서 起居하면서 '蘭學者(蘭?者:西洋 文物 硏究가)'
오무라 마스지로
(大村益次?)에게 배웠다. 軍事 訓鍊은 낮 2時間의 休息 時間을 包含해 새벽 5時부터 저녁 8時까지 13時間에 達했으며, 새벽이나 夜間 中 2時間 일과 外 工夫까지 遂行해야 했다.
[2]
그래서 後代의 歷史家들은 騎兵隊를 單純 民兵隊가 아닌 正規軍으로 본다. 騎兵隊는 總督 麾下 步兵 部隊, 砲兵 部隊로 構成됐다.
다카스기 神社쿠
는 幕府 治下에서 墮落하고 安住하는 사무라이들보다 새로운 世上을 꿈꾸는 騎兵隊院들이야말로 眞짜 戰力이 될 것으로 믿었다. 그들은 西洋式 兵制와 戰術을 깊이있게 工夫하고 新式 라이플 銃(미니에 總, 스나이들 總)으로 武裝해 各地에서 專攻을 올렸다. 特히 그들의 미니에 銃은 有效 射距離가 500미터에 達한 데 反해, 幕府君의 主力인 아이즈 番社들의 게벨 銃은 有效 射距離가 100餘 미터에 不過했다.
[3]
脫大騷動(或은 脫退騷動)
編輯
1869年(메이지 2年) 7月
版籍奉還
(版籍奉還)으로 죠슈 番의 點維持人 이시미 脂肪(現在
시마네縣
西部)과 不젠 脂肪(규슈 北東部, 現
후쿠오카현
東南部와
오이타현
北部)을 國家에 返還해야 했다. 메이지 政府의 바뀐 管制에 따라
다이묘
에서 道知事가 된
모리 모토노리
(毛利元?)는 番의 規模를 줄이느라 11月 25日 새로 番情 改革을 斷行했다. 騎兵隊를 包含해 죠슈 正規軍 5千 餘名 中 2250 名은 日本 陸軍으로 吸收됐고 남은 3千 名은 따로 補償도 없이 바로 解散됐다. 常識을 벗어난 處遇 때문에 11月 30日 나가시마 요시스케(長島義輔) 等 舊 騎兵隊 出身 中 一部가 후지야마 스케쿠마(藤山佐熊)
[4]
와 토미나가 蹂躪(富永有隣) 等 他部隊 出身 1200餘 解職者들과 함께 脫大騷動을 일으켰다.
1870年(메이지 3年) 1月 13日 오오모리 現(現
시마네縣
) 하마다 地方法院을 襲擊한 그들은 1月 24日에는 야마구치 縣廳을 包圍하는 等 現地 防衛軍을 잇달아 擊破하고 周邊 1800餘 名의 農民들과 힘을 합쳐 規模를 불렸다. 이 騷動으로 當時
番벌
의 한 軸인 죠슈 番 出身들의 發言權 低下를 憂慮한
기도 다카요시
(木?孝允)가 直接 鎭壓軍을 끌고 나타났다. 죠슈 番 常備軍 3百에 日本軍 第4大隊 250名, 오사카 病學者 80餘 名을 參謀로 우베 時 援軍 100餘 名을 包含 總 800名이었는데 2月 9日 尿路二歌詞키(鎧ヶ?) 고개를 넘어와 叛亂軍과 交戰했다.
[5]
[6]
미기타가타케(右田ヶ岳)
[7]
의 천덕사(天?寺)에는 아직도 當時 叛亂軍이 籠城해 消失된 절터 痕跡이 남아있다.
[8]
이 騷動으로 叛亂軍 戰死者 60名, 負傷者 73名, 鎭壓軍 戰死 20名, 負傷者 64名이 發生했다. 叛亂軍 中 平民 出身 1300名은 解散시켜 집으로 보냈고 나머지 600名은 메이지 維新의 功을 認定하고 各其 쌀이 支給됐다. 하지만 主動者인 나가시마 外 25名을 始作으로 5月 6日까지 總 221名이 處刑됐다. 二重 斬首 84名, 割腹 9名, 물拷問으로 2名이 죽었고 33名이 獄死했으며 41名이 流配地에서 죽었고 謹愼 命令을 받은 45名이 죽었다. 또한 連累 嫌疑가 있는 133名도 같이 處刑됐다. 아이러니하게도 騎兵隊 創設者 다카스기 神社쿠의 아버지 다카스기 高츄打(高杉小忠太)가 處分의 總責任者였다.
脫退騷動의 主謀者 中 하나로 여겨지는 다이라쿠 겐타로(大?源太?)에게 3月 5日 法院 出頭命令이 내려졌다. 그는 騷動에는 參加하지 않았지만 이 모든 騷動에 불을 붙였던
오무라 마스지로
暗殺事件
[9]
으로 그의 同門 數學들이 脫大騷動에 參與해 結局 投獄되고 拷問으로 죽었다. 身邊의 威脅을 感知한 다이라쿠는 규슈 붕高 脂肪(現
오이타현
)과 이요 地方(現
에히메縣
) 等等을 轉轉하며
가와카미 겐사이
(河上彦?)의 집 等地에서 숨어지냈다. 거기서 다시 自身처럼 政府軍에 쫓겨다니는 사람들을 糾合해 다시 再起를 노린다.
1871年(메이지 4年) 3月 메이지 政府가 히로사와 社네오미(???臣) 暗殺事件을 搜査中 니쿄우 事件(二卿事件)
[10]
이 일어나면서 다이라쿠의 隱身處가 發覺됐다. 그는 다시 존王派 同志들의 입김이 强한
구루메 番
의 應變대(??隊)에 몸을 依託했으나 政府軍과 싸울 意思가 없었던 구루메 番社들에 依해 處斷된다. 그를 숨겨줬던 가와카미度 犯人隱匿罪로 逮捕돼 處刑됐다.
處罰을 避해 숨었던 騎兵隊院 中 一部는 各地에서 農民 蜂起에 껴들어가기도 하고 메이지 時代 初 頻發했던 사무라이 叛亂(或은
士族 叛亂
이라고도 函)에 影響을 줬다. 또 一部는 '붕高手도(豊後水道)'(
오이타현
東部 해로)의 無人島를 占據하고 海賊으로 變하기도 했다. 過去
好쿠에쓰 戰爭
으로 幕府君을 마지막까지 몰아넣었던 維新의 主役 騎兵隊는 뿔뿔이 흩어져 사라졌다. 亦是 騎兵隊 出身으로 新 메이지 政府 參議에 오른 마에바라 잇세이(前原一誠)는 叛亂主動者 處刑에 猛烈히 反對하면서
祈禱 打카요시
(木?孝允) 等
番벌(藩閥)
强勁派들에 맞서던 끝에 辭表를 내고 蟄居했으며, 옛 존洋파 同志들(舊 杆城臺(干城隊)와 事大臺(四大隊) 等)을 糾合해
하기의 난
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