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勸業會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勸業會

1911年 沿海州에서 結成된 獨立運動 團體

勸業會 (勸業會)는 러시아 沿海州 에 設立된 大韓民國의 抗日獨立運動 團體이다. 庚戌國恥 以後 1911年 沿海州에서 設立되어, 初期의 獨立運動을 이끌었다. 1914年 '沿海州 移民 50周年'에 맞추어 이상설 , 이동휘 , 이동녕 等 勸業會의 核心 會員들이 主導하여, 블라디보스톡 大韓光復軍 政府 (大韓光復軍政府)를 建立하였다. 같은 해인 1914年 8月 7日 勸業會와 大韓光復軍 政府는 러시아 에 依해 强制 解散되었다.

設立 背景 編輯

當時 沿海州에는 1864年 以來 勸業會 創立 前後까지 20萬名 假量의 韓人이 移住하여 韓人社會를 形成하였다. 이들의 部類를 보면, 다음과 같다.

  • 첫째, 러일戰爭 以前에 移駐하여 經濟的 土臺를 이루고, 러시아에 歸化하여 政治·經濟的 地位와 身分을 獲得한, 崔在亨 을 비롯하여 최봉준 (崔鳳俊)· 김학만 (金學萬)· 김도녀 (金道汝)· 차석보 (車錫甫)· 김익용 (金翼鎔)· 김병학 (金秉學) 等이다. 이들은 韓人의 移住와 開拓에 重要한 役割을 遂行, 韓人社會의 指導級 人物로 浮上하여 韓人의 經濟的·社會的 地位 向上에 寄與해 왔다. 그 結果 各 地方 한민회의 風憲(風憲)·風俗(風俗)·道憲(都憲) 等의 職任을 맡아 韓人社會의 自治制 確立에 寄與하였다.
  • 둘째, 國內 및 間島에서 日帝와 抗戰하다 北上한 이범윤 · 洪範圖 · 유인석 等 義兵 系列이다. 이들은 1908年 을 前後 崔在亨 等과 聯合하여 義兵團(義兵團)을 整備, 1910年 5月 13道義軍 을 編成하여 國內進入作戰을 展開하였다.
  • 셋째, 國內 等의 地域에서 愛國啓蒙運動을 하다가 軍隊 解散 前後로 亡命하여, 沿海州를 獨立運動基地로 삼은 系列이다. 헤이그特使로 갔다가 美國으로 건너가 國民會 結成에 參與하고, 北美地方 總會長인 鄭在寬 (鄭在寬)과 함께 沿海州에 온 이상설 을 비롯하여 新民會 等에서 活動하던 이종호 · 신채호 · 이동휘 · 김하구 (金河球)· 允諧 等이다. 이들은 急進的 義兵抗戰보다는 民族의 實力 養成을 바탕으로 ‘獨立戰爭論’에 더 큰 比重을 두었다. 이들은 沿海州에 美洲의 대한인국민회 (大韓人國民會) 시베리아地方 總會와 그 支會(支會) 等을 結成하였다.

槪要 編輯

최재형을 비롯하여 沿海州에서 韓人의 移住 開拓과 自治, 抗日獨立運動에 投身해 온 人物들이 13道義軍 聲明會 를 組織하였다가 核心들이 日帝의 外交攻勢로 곧 러시아 當局에 逮捕, 投獄되었지만, 1911年 들어 監獄에서 풀려나 블라디보스톡에 재집결하였다.

1911年 5月 20日 이종호 (李鍾浩), 엄인섭 (嚴仁燮), 崔在亨, 洪範圖, 김익용 (金翼鎔), 강택희 (姜宅熙), 等이 主軸이 되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 英語版 ) (新韓村)에서 組織한 國權피탈 以後 初期의 最大 韓民族 抗日獨立運動團體이다. 겉으로 名稱만 보면 純粹한 經濟活動을 위한 團體인 것처럼 보이나 이것은 日帝와 러시아의 彈壓과 監視를 避하기 위하여 僞裝으로 붙인 것이고 實際로는 抗日救國運動을 目的으로 하였다.

組織 編輯

創立 當時 本部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 에 두었으며, 沿海州 主要 地域에 支會와 分事務所를 두었다. 會長에 崔在亨 (崔才亨), 副會長에 洪範圖 (洪範圖)를 選任하였다. 各 地方으로 會員券柳委員(會員勸誘委員)李 派遣되어 回歲(會勢) 急速 擴張하였다. 勸業會는 對外 活動의 便宜를 위하여 러시아 極東總督(極東總督) 곤닷지의 許可를 얻었다. 그 해 12月 17日 다시 總會를 開催하여 會則을 改正하고, 組織을 醫師部와 執行部로 나누어 醫師部의 議長과 副議長이 會를 代表하기로 하였다.

活動 編輯

勸業會의 根本 目標는 光復軍(光復軍) 養成에 있었다. 光復軍 養成의 基盤이 되는 敎育의 振興과 弄,공,上 等 實業의 勸奬을 主唱하였고, 軍隊의 養成은 可能한 限 祕密裏에 推進하였다.

  • 권업新聞 ( 英語版 ) 》을 創刊하여 民族精神을 高揚하고, 僑民을 團結시키며, 閑民의 地位 向上을 위해 努力하였다.
  • 韓人의 敎育振興 事業으로 블라디보스톡 韓人村에 있던 韓人學校人 季冬學校(啓東學校)를 大規模의 閑民學校(韓民學校)로 擴大하여 韓人들의 民族主義 敎育의 中樞로 삼았다.

軍事活動 編輯

  • 勸業會는 光復軍 幹部의 養成을 위해 1913年 부터 東北만 수分臺電子의 나自救에 獨立運動史 上 最初의 士官學校인 大戰學校 (大甸學校)를 設立, 運營하였다. 卒業生이 相當數에 達했던 것으로 보인다.
  • 光復軍의 軍營地(軍營地) 確保를 위해 러시아의 極東總督과 交涉을 벌여 敵地의 조차(租借)를 推進하였다. 라브類와 밀産婦 北쪽에 있는 항카호 周邊의 二流가(伊柳街) 및 黑龍江(黑龍江)과 松花江이 合流하는 講究(江口)인 올라까하라는 곳의 土地를 租借하였다. 겉으로는 韓人의 集團 移住를 推進하는 것 같이 하였지만 軍營地 마련과 光復軍의 訓鍊을 위한 것이었다.
  • 양군호(養軍號)와 海圖號(海島號) 等으로 불리는 光復軍 養成을 위한 祕密結社를 運營하였다. 양군호와 해도호는 겉으로 雜貨商店에 不過하나 實際로는 光復軍 養成을 위한 祕密活動을 展開하였다.
  • 洪範圖가 會長으로 있던 노동회 (勞動會)도 韓人 勞動者에게 일터를 마련하여 生活을 안정시키는 同時에 輸入 中 一部를 貯蓄하여 光復軍을 養成하는 데 쓰였던 結社로 본다.

李相卨을 비롯한 이동휘·李東寧·이종호·鄭在寬 等이 主가 되어 中國과 러시아에서 獨立運動 勢力들을 糾合, '沿海州 移民 50周年'에 맞추어 1914年 블라디보스톡에 大韓光復軍政府 (大韓光復軍政府)를 建立하였다. 李相卨과 李東輝를 各其 情·副統領으로 選出, 國內의 모든 獨立運動을 主導하였다. 그러나 光復軍政府는 그 해 9月에 그 母體인 勸業會와 함께 러시아의 戰時體制 確立에 따라 彈壓을 받아 더 以上 活動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解體 編輯

勸業會의 規模가 커짐에 따라 러일전쟁에 敗한 러시아 政府는 勸業會가 政治的 目的을 띄고 있음을 看破하고, 韓人들의 政治·社會活動을 彈壓하였다. 1914年 第1次 世界 大戰이 勃發하자 이 해 8月 블라디보스토크에는 戒嚴令이 宣布되었다. 러시아 駐在 블라디보스토크 日本 領事館에서는 러시아 當局에 勸業會와 권업新聞 等의 廢止와 이종호, 이동녕(李東寧), 김하구, 오주혁(吳周赫), 李甲, 안공근(安恭根) 等 블라디보스토크, 연추, 니콜스크-우수리스크 等地에서 活動하는 韓人 運動者들의 追放을 要請하였다. 러시아는 第1次 世界大戰의 同盟國이 된 日本과의 關係 惡化를 憂慮하여 1914年 8月 7日 勸業會를 强制로 解散하고 機關紙인 『권업新聞(勸業新聞)』도 停刊되었다. 그러나 勸業會의 傳統은 1917年 前勞漢族中央會 (全露韓族中央會)의 創設로 이어졌다. 沿海州 地域 韓人들의 이러한 活動을 통한 紐帶와 抗日獨立鬪爭 意志는 1919年 3月 17日 成立된 大韓國民議會 의 土臺가 되었다. 以後 大韓國民議會는 1919年 9月 11日 中國 상하이 大韓民國 臨時政府 에 統合되었다.

같이 보기 編輯

外部 링크 編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