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弓術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弓術 (弓術)은 을 使用하여 화살로 目標物을 맞히는 技術 또는 武術을 統稱하여 부르는 말이다. 韓國의 활은 유럽과 같은 檀弓을 利用하며, 몽골의 影響을 많이 받았다는 指摘이 있다. 이미 古代 以前부터 韓國에서는 널리 弓術을 奬勵하여 民間에 普及하였는데, 高麗 때까지는 武藝 修鍊을 겸한 訓鍊으로서 이루어지던 것이 朝鮮朝에 이르면 文治主義의 風潮와 함께 武藝 修鍊과 더불어 心身修養의 하나로서 君子가 익혀야 할 六藝(六藝)의 한 가지로 重視되었다.

鞠躬 試演, 2009年

槪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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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의 弓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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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과 화살의 始作은 人類의 起源이나 先史 時代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三國 時代인 4世紀 末에서 5世紀 初葉에 그려진 집안의 高句麗 舞踊塚(춤무덤) 狩獵圖나 南浦의 덕흥리 古墳 에 오늘날의 各宮의 原形으로 보이는 그림이 남아있는데, 오늘날 韓國에 傳해지는 各宮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日本과 마찬가지로 古代 中國 文化에서의 '事例(射禮)'가 三國 時代에도 導入되었을 것으로 推定하지만, 記錄에서 이러한 '事例'가 積極 重視되고 勸奬되는 것은 高麗 時代에 들어서의 일이며, 그 以前에는 백제의 아신왕 이 高句麗와의 戰爭에서 敗한 雪辱을 위해 漢城 西쪽에 활터를 만들고 百姓들을 불러모아 활쏘기를 시키는 等의 실全的 軍事 訓鍊으로서의 性格이 剛하였다. 그밖에 韓國에서 활쏘기에 關聯한 體系的으로 整理된 禮法은 朝鮮 以前의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활을 武器로서뿐만 아니라 神聖한 祭具(祭具)로 여겨, 神社나 寺院에 활쏘기를 捧納하는 等의 마쓰里(祭)뿐 아니라 헤이안 時代 부터 이미 獨自的인 技術과 가르침, 作法을 갖춘 弓術 流派가 蕃盛하여 現在까지도 各地에 남아 傳하고 있는 日本과는 달리, 韓國에서는 神에게 捧納하는 提議(祭儀)로서의 弓術보다는 實戰에서, 또는 個個人의 心身을 修養하기 爲한 技藝이자 마을과 地域 住民들間의 親睦을 圖謀하는 遊戱로서의 色彩를 더욱 剛하게 지녀 全國的으로 마을 및 地域 또는 그곳에 存在하는 활터 單位의 弓術 試合(便射)이나, 鄕射禮(鄕射禮)라고 불리는 地方 儒學者들 사이의 意識的 弓術이 特히 性理學的 文治主義 風潮가 剛했던 朝鮮 時代에 크게 盛行하였다. 國王이 大大的으로 여는 활쏘기 試合은 大射禮(大射禮)라고 불렀다. 銃器 및 火藥 武器類의 登場 뒤에도 활은 如前히 軍事體制 內의 重要한 武器 가운데 하나로 重視되었고, 壬辰倭亂 以後 朝鮮 朝廷이 設置한 訓鍊都監 에는 捕手(砲手, 銃器)ㆍ死守(射手, 활)ㆍ撒水(殺手, 刀劍)로 軍事編制를 이루었으며, 正祖 때인 1799年 2月에 平壤監營에서 刊行된 《司法費專攻하(射法秘傳攻瑕)》나 徐有榘의 《私缺(射訣)》等은 韓國의 활쏘기에 古代 中國의 활쏘기 技法들을 添附하여 펴낸 冊이다. 日本과 마찬가지로 現在 韓國의 弓術로 이어지는 各種 技術과 道具, 規則들은 모두 朝鮮 時代에 成立된 것으로 볼 수 있다.

甲午更張 以後 急激한 近代化 및 總鰭類의 發展으로 弓術은 漸次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지기에 이르렀다. 弓術의 衰退에 注目한 것은 朝鮮의 26代 國王이었던 古鐘으로, 高宗은 傳來의 弓術이 衰退하는 것에 憂慮를 표하면서 光武 2年( 1898年 )에 只今의 慶熙宮 회상전 北쪽에 黃鶴亭 이라는 활터를 만들어 활쏘기를 할 수 있도록 開放하는 等 弓術을 維持ㆍ保全시키는데 힘썼다. 1909年 7月 15日에 동대문구 창신동에서 이상필(李相弼)ㆍ이용문(李容紋) 等이 中心이 된 四宮會(射弓會)가 發足되었으며, 1916年 7月에는 京城弓術回(一名 關德回)라는 활 쏘는 사람들의 모임이 만들어졌다. 以後 1919年 의 3ㆍ1運動을 거쳐 1922年 에 서울 京畿 地域을 비롯한 全國의 활터의 사두(射頭)들이 모여서 朝鮮弓術硏究會(朝鮮弓術硏究會)를 發足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韓國 弓術의 直接的인 先祖格이다. 1929年 에는 드디어 旣存에 쓰이던 활쏘기 用語와 濕使用 各宮의 製作 方法, 활쏘기를 배우는 順序, 활터에서의 禮節 等을 成文化한 「朝鮮의 弓術」이라는 冊이 發刊되었고, 1928年 7月 13日에 黃鶴亭에서 처음으로 前朝鮮弓術大會가 열렸다.

以後 日帝의 朝鮮民族抹殺政策 의 餘波로 南山에 있던 활터인 潟湖情이 閉鎖되는 等의 어려움을 겪었으나, 朝鮮弓術硏究會는 1926年 5月 朝鮮弓道回로 改稱하였으며, 解放 뒤인 1946年 2月에 다시 朝鮮弓道協會로 改稱하여 1954年 3月 大韓體育會에 加盟하였다. 1963年 7月부터는 國際弓道聯盟(FITA)에 加入하였고 1983年 3月에 洋弓部를 大韓洋弓協會 로 分離하여 1999年 6月 社團法人 認可를 받아 只今에 이르고 있다.

다른 나라의 활과의 比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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于先 활의 種類부터, 韓國의 활은 中國이나 터키, 몽골과 같은 合成宮이자 檀弓으로 分類된다. 하나의 材料만 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材料들을 複合的으로 섞어서 쓰는 활의 境遇 활의 彈性限界를 더욱 높일 수 있다는 長點이 있다. 韓國의 활은 몽골의 활에 비해 더 작으며, 다른 나라의 활과 마찬가지로 활시위를 잡아당길 때 얼굴까지 오는 데에 그친다. 화살을 활에 매기는 境遇 화살을 활의 오른쪽에 맞추고 오른손 엄지뿌리에 활시위를 걸어 당기는 것은 몽골式이다. 이는 검指와 中指를 가지고 활시위를 당기는 地中海式과 區別되는 點이다. 몽골式의 境遇 大部分 화살을 활의 오른쪽에 두는데 이것은 一說에서는 빠르게 달리는 말 위에서 逆風을 받아도 화살이 날아갈 수 있도록 할 方法을 窮理한 끝에 나온 것이라고도 한다. [1]

활에 들어가는 材料의 境遇 韓國에서는 世宗 때부터 動物의 기름으로 만든 阿膠가 아닌 民魚의 부레로 만든 魚膠를 쓰기 始作했는데, 魚膠는 阿膠와는 달리 활에 들어가는 材料들 사이의 彈力을 더욱 높여주어 화살이 멀리 날아갈 수 있게 했지만, 濕氣에 弱하다는 短點은 克服하지 못했다.

弓術의 分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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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과 화살은 예로부터 軍事的인 目的뿐 아니라 競技ㆍ놀이ㆍ祭祀의 用途로도 쓰였다. 日本과 마찬가지로 中國의 影響을 받은 韓國 弓術의 境遇는 日本과 比較할 때 祭祀로서의 要素는 찾아보기 드문 反面 親睦圖謀를 위한 競技 乃至 놀이로서의 用途가 特히 發達하였다. 儒敎的인 倫理를 普及하고 君臣 및 士大夫의 親睦圖謀를 위한 例事(禮射) 卽 事例(射禮)는 中央의 大射禮(大射禮)와 地方의 鄕射禮(鄕射禮)로 나뉘며, 民間의 境遇는 마을과 마을, 또는 활터와 활터 사이의 競技的 性格이 剛한 便射(編射)라는 이름의 弓術(主로 保社步射 또는 黨舍堂射의 形態) 試合이 세時 및 年中行事로서 或은 일정한 時期를 定한 定期的인 모임으로서 發展하였다.

朝鮮의 法典인 《經國大典》(1485年 成立)에는 宮中과 地方에서 開催하는 大射禮와 鄕射禮에 對한 規定이 있다. 鄕射禮의 境遇 孝子와 忠臣, 例를 아는 사람들을 勸勉하는 활쏘기 자리로서, 활쏘기를 서로 勸하고 辭讓하는 것을 反復하면서 활쏘기가 進行되고, 과녁을 맞히는 것이 禮儀에 어긋난다고 하여 과녁에서 멀찌감치 화살을 날려버리곤 했다.

大射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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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宗 8年에 열렸던 大射禮의 境遇 國王과 臣下가 成均館에 나아가 釋奠祭를 올린 뒤, 활터에 가서 술을 마시고 두 名씩 짝을 지어 各各 네 發의 화살을 쏘았다. 現在 韓國에는 英祖 19年( 1743年 )에 開催되었던 大射禮의 儀式 節次와 盛況을 모두 收錄한 《大射禮의궤(大射禮儀軌)》(1책)가 남아있다.

大射禮度 (大射禮圖)는 1743年(英祖 19)에 尹4月 7日에 擧行된 大射禮 意識을 記錄한 化權(畵卷)이다. 2010年 6月 17日 서울特別市의 有形文化財 第305號로 指定되었다.

鄕射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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鄕射禮는 地方에서 每年 3月 3日과 9月 9日에 열렸는데, 大射禮와 마찬가지로 《周禮》에서 비롯된 것이다. 朝鮮의 文人인 順菴 安鼎福의 文集 《순암집》에는 鄕射禮의 節次를 收錄한 「香사례홀기(鄕射禮笏記)」가 收錄되어 있다.


參考 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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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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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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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만, 日本의 馬上武藝에서는 進行方向의 오른쪽으로 화살을 쏘는 境遇도 있다.

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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