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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國實踐원養成所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建國實踐원養成所

建國實踐원養成所 (建國實踐員養成所)는 白凡 金九 가 國家再建의 人材養成을 위해 1947年 3月 20日 設立한 團體이다. 設立 當時의 名譽所長은 李承晩 , 所長은 金九 , 理事長은 杖刑 이었다. 當時 本部는 서울特別市 龍山區 원효로 의 원효사였으며, 金九 暗殺 後인 1949年 8月 23日 建國實踐원養成所는 解體되었고 1949年 9月 弘益大學校 가 원효사를 引受하였다. [1]

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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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國實踐원養成所 1期 修業式 記念寫眞
서울 용산구 원효로 원효사(1947年 3月 9日)

獨立運動 過程 中 복국의 段階에서 光復軍 (光復軍)이 必要했던 것처럼, 建國의 段階에서는 建國의 棟梁이 必要했고, 이 必要에 依하여 1947年 3月 養成所가 設立되었다.

名譽所長에 李承晩 , 所長에 金九 , 理事長에는 杖刑 으로 出發한 이 養成所는 全國 各地의 優秀한 愛國靑年들을 選拔하여 建國運動의 中堅 일꾼으로 養成하고자 敎育을 시켰다. 이러한 人材 養成의 發想은 靑年들이 國家를 建設하는 데 매우 重要한 구실을 한다는 金九 個人의 信念에서 나왔다.

當時 敎育界에 投身하고 있었던 杖刑 金九 과 각별한 關係로 金九 의 統一政府樹立 路線을 支持하고 있었던 次에 金九 가 建國實踐원養成所를 設立하자 理事長으로 財政的 支援을 하며, 所長 金九 와 함께 運營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養成所의 매기 敎育 人員은 100名 內外였다. 敎育期間은 제1기가 2個月이었고, 第2期부터 마지막 敎育을 받은 第9期까지는 1個月이었다. 敎育內容은 獨立運動史·政治·經濟·法律·憲法·歷史·선전·民族文化·國民運動·哲學·弱小民族問題·農村問題·協同組合·社會學·共産主義 批判·女性問題 等과 特別講義였다.

講師는 趙素昻 (趙素昻)·조완구(趙琬九)· 신익희 (申翼熙)· 지청천 (池靑天)·나재하(羅在夏)·金聖柱(金成柱)·金慶洙(金敬洙)·최호진(崔虎鎭)· 김정실 (金正實)·梁柱東(梁柱東)·민영규(閔泳珪)·엄상섭(嚴詳燮)· 엄항섭 (嚴恒燮)·김학규(金學奎)·薛義植(薛義植)·김기석(金基錫)·이상조(李相助)·주석균(朱碩均)·홍병선(洪秉璇)·김하선(金昰善)·김석길(金錫吉)· 安在烘 (安在鴻)· 정인보 (鄭寅普)·황기성(黃基成)·異人(李仁)·金活蘭(金活蘭)·김법린(金法麟)·박순천(朴順天)· 이은상 (李殷相) 等 各界의 人士들이었다.

한便 1946年 신익희 는 美蘇共同委員會에 參加할 것을 韓國獨立黨 中央黨에 建議하기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6年 6月 23日 , 신익희 韓國獨立黨 서울市 地區黨 委員長 職을 辭退하고 脫黨하였다. 1947年 7月 以後에는 臨時政府 側과 路線을 달리하였으며, 臨時政府 를 離脫, 李承晩 을 總裁로 하는 獨立促成國民會로 갔다. 그리고 1947年 7月 신익희 는 獨立促成國民會 副總裁가 되었다.

卽, 신익희 臨時政府 韓國獨立黨 을 떠나 李承晩 側과 聯合瑕疵, 이를 臨時政府 金九 에 對한 '背信'이라 여겼던 杖刑 신익희 와는 더 以上 臨時政府 의 精神을 함께 이을 수 있는 同志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2]

構成 및 解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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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國實踐원養成所는 1947年 國家를 建設하기 위한 人材 養成을 目的으로 設立한 團體로 大韓民國 臨時政府 主席이었던 金九 (金九)가 歸國한 뒤 國家 建設에 따른 人材의 必要性을 느껴 서울市 龍山區 원효로에 있던 원효사를 本部로 設立하였다.

이 團體는 金九 의 自主政府 樹立을 위한 準備의 一環으로, 臨時政府 1940年 9月 충칭(重慶)에서 制定, 公布한 <大韓民國建國綱領>을 基礎로 하였다.

建國綱領은 第1章 總則, 第2張 복국(復國), 第3張 建國으로 構成되었고, 그 內容은 政治·經濟·敎育의 均等한 發展을 통하여 복국(復國), 建國(建國), 治國(治國), 더 나아가서는 구세(救世)의 理想을 實現하고자 한 三均主義(三均主義)를 바탕으로 하였다.

當時 杖刑 國民大學 의 理事長까지 兼任하고 있었는데, 理事長 職銜을 내던지고 신익희 와 訣別을 宣言하였다. 結局 杖刑 臨時政府 金九 의 獨立精神을 繼承하는 大學 을 別途로 設立키로 했다. 當時 박기홍 (朴基鴻, 張勳普通學校(長薰普通學校) 前 理事長)의 未亡人였던 조희재 女史가 이에 積極 贊同하고, 80萬坪의 土地를 寄贈하였다. 杖刑 은 이를 基盤으로 大學設立을 推進, 1947年 11月 1日 正式 設立認可를 받고 단국대學 을 設立하였다.

이러던 車에 1949年 6月 26日 韓國獨立黨 黨首 金九 가 陸軍砲兵少尉 안두희 (安斗熙)에게 拳銃으로 殺害된 金九暗殺事件(金九暗殺事件)이 發生하여 金九 가 暗殺된 後, 1949年 8月 23日 建國實踐원養成所는 解體되고 建物 원효사는 1949年 9月 弘益大學校 에 引受됐다. [3] [4] [5]

歷史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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建國實踐원養成所는 1946年 12月 8日 大衆新聞( 東亞日報 )에서 '金九 先生이 陣頭에 서서 建國實踐원養成所를 旣成'이라는 題目의 記事를 發行하였는데 建國實踐원養成所는 大韓民國 臨時政府 主席이었던 金九 先生이 歸國한 以後 國家 建設에 따른 人材의 必要性을 느껴 建國實踐원養成所 設立準備를 着手해 1947年 3月 20日 서울市 용산구 원효로에 있던 원효사를 本部로 正式으로 設立한 人材養成團體였다. [6] [7]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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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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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韓國民族文化大百科》〈建國實踐원養成所〉項目
  2. 大韓獨立促成國民會(督促국민회)는 1946年 2月 8日 獨立促成中央協議會(督促協議會)와 信託統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의 統合으로 이뤄진 團體지만 完全한 李承晩의 私組織으로 자리 잡게 되는데 '組織의 達人' 신익희가 金九 쪽에서 李承晩 쪽으로 줄을 바꾼 것이 큰 作用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後에 신익희가 李承晩과 訣別하며 儒林側에 合作을 請했을 때 儒林側에서 "자네는 李承晩 앞에서 妓生妾 노릇을 했던 사람이 아닌가!" 호통을 들은 일이나(1946년 8月 4日 日記) 신익희가 自由新聞 社長이 되어 金九를 顧問으로 내세운 것을 金九가 正面 反駁한 일이(1946년 11月 23日 日記) 모두 이 '變節' 때문이었다고 傳해지고 있다.(해방일기, 김기협, 너머북스 439p 參照)
  3. 「建實(健實)」解散(解産), 1949.08.25, 京鄕新聞2面 社會 記事(뉴스), 建國實踐員(建國實踐원) 養成所解散(養成所解散), 1949.08.25, 東亞日報2面 社會 記事(뉴스) 參照
  4. 建國實踐員養成所(建國實踐원養成所) 弘益大財團(弘益大財團)서 經營(經營), 1949.09.25, 京鄕新聞2面 社會 記事(뉴스) 參照
  5. 서울大 法大 學長 지낸 民法學者 진승록 대한변협新聞 記事(2015.02.09) 參照
  6. “文大統領 "1919年 建國" 發言에...김구·여운형 過去 記事 擴散” . 2017年 8月 16日 . 2018年 4月 10日에 確認함 .  
  7. ““닫혔던 목소리도 癌도 ‘白凡의 氣象’으로 이겨냈지요”” . 2017年 6月 22日 . 2018年 4月 10日에 確認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