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 太祖
元年(
1392年
) 7月 20日 司憲府 大司憲(大司憲) 閔開(閔開) 等이 高麗 王朝의 王氏를 밖에 두기를 請하니,
朝鮮 太祖
가 순흥군(順興君) 왕승(王昇)과 그 아들 江(康), 政兩軍(定陽君)
왕우
(王瑀)와 그의 아들 兆(?)·官(琯)을 除外한, 나머지를 모두 强化(江華)와 巨濟(巨濟)에 나누어 두게 하였다. 8月 20日에는 高麗 王氏들의 奴婢의 數를 줄였다. 또는 粥ㅈ 않으려고
全氏(田氏)
로 바꾸신 분들도 있다.
2年 5月 26日에는 王命에 따라 都評議使司에서 慶尙道 按廉使와 巨濟 兵馬使에게 이문(移文)하여 巨濟로 보내졌던 王氏 一族을 모두 陸地로 나오게 해서, 完山(完山)·尙州(尙州)·영해(寧海)에 나누어 居處하게 하였다.
3年 1月 17日에는 김가행(金可行)과 박중질(朴仲質)李 占쟁이에게 恭讓王과 王氏의 命運을 물은 逆謀를 하자, 다시 一部 王氏들을
巨濟島
로 옮겼다. 이 事件과 關聯하여, 1月 21日 臺諫(臺諫)과 刑曹에서 王氏를 除去하자고 請하였고, 2月 21日 臺諫(臺諫)과 刑曹에서 王綱(王康), 往擊(王?), 왕승보(王承寶), 왕승귀(王承貴)의 家族들을 모두 해도로 보낼 것을 請하였고, 2月 22日, 2月 23日에도 王氏 一族의 罪를 請하였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5日에는 臺諫과 刑曹에서 朴葳(朴?)도 謀議에 加擔했다고 主張하였다. 26日에 다시 供養(恭讓) 三父子(三父子)를 法에 處하고, 王綱, 往擊, 왕승보, 왕승귀의 一家를 모두 해도(海島)로 내쫓고, 强化(江華)에 보내졌던 王氏도 해도로 귀양보내라는 上疏가 올려지자
朝鮮 太祖
는 亦是 拒絶하였다. 이에, 臺諫과 刑曹에서 政事(政事)를 보지 않는 示威를 하자, 王綱은 公主(公州)로, 往擊은 安邊(安邊)으로, 왕승보는 永興(永興)으로, 왕승귀는 합포(合浦)로 귀양보내졌다.
2月 27日에
朝鮮 太祖
는 司憲府에 命令하여 江華에 살고 있는 王氏 中 늙은이와 弱한 者를 菩薩피라 命令했다.
4月 1日, 10日에 또 다시 王氏를 죽이라는 上疏가 올라왔고, 4月 14日에 다시 上疏가 올라오자 마침내 받아들여졌다. 中樞院 府使(中樞院副使) 정남진(鄭南晉)과 刑曹 議郞(刑曹議郞)
함부림
이
三陟
으로, 刑曹 戰서(刑曹典書)
윤방頃
(尹邦慶)과 大將軍
오몽을
이 江華島로, 刑曹 戰서(刑曹典書)
손흥종
과 僉節制使(僉節制使)
심효생
이 巨濟島로 王氏를 除去하려 보내졌다. 4月 15日에 윤방頃 等이 講和에 있던 王씨 一族을 强化 나루에 빠뜨려 죽였다. 4月 17日에는
공양왕
一家가 殺害되었으며, 4月 20日에 손흥종 等이 巨濟島에 있던 王씨 一族을 바다에 빠뜨려 죽였고, 같은 날에 王氏의 남은 子孫을 大大的으로 搜索하여 이들을 모두 목 베었다.
4月 26日
高麗
王朝에서 王氏로 四星된 一族들은 모두 本性으로 宦成하게 했으며, 王氏를 가진 사람은 高麗 王室의 後裔가 아니더라도 어머니의 姓을 따르게 하였다.
6年 12月 1日에는 王씨의 庶孼인 伯顔(伯顔)·年金(延金)·今晩(金萬)李 聲明을 달리 바꾸고 지내었다가 發覺되어 處刑되었다. 12月 8日에는 亦是 高麗 王씨의 庶孼인 藥師노(藥師奴)가 絞殺(絞殺)되었다.
朝鮮 太宗
13年 11月 15日에는 王休(王?)의 아들 王거乙오미(王巨乙吾未)가 붙잡혔다. 王休暇 公州 사람 이밀忠義 누이를 妾으로 맞아 아들을 낳았는데, 바로 거乙오미이다. 太祖 3年에 王氏가 도륙당하였을 때에는 그 어미가 無知하였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여러 王氏의 後孫들이 중이 되어 山으로 도망갔다는 所聞이 퍼지자, 全國 査察을 調査하라는 命令이 내려졌다. 13年(1413) 11月 26日에 王거乙五味를 釋放하고, 太宗이 "今後로는 王氏의 後孫이 或은 스스로 나타나거나, 或은 남에게 告發을 當하는 者는 아울러 自願(自願)하여 居處(居處)하는 것을 들어주어서 그 삶을 平安하게 하라."라고 下敎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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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1月 29日, 12月 1日에 王거乙五味를 죽이라는 上疏가 올라오기도 하였으나 棄却되었다.
16年 11月 1日에는 왕상우(王上尤)가, 王씨의 後裔가 履修라는 者의 餘種과 婚姻하여 낳은 子息이라고 하여 그 週인 螭首에 依해 告發되었다. 5日에 그 아우 王和尙(王和尙)과 함께 풀려났다.
朝鮮 文宗
1年 11月 1日과 6日에 王씨의 後裔를 찾아 祭祀를 받들 게 할 것을 命하였다. 얼마 뒤에, 第우지(齊牛知)라 變成하여 公主에 숨어살던 王우지(王牛知)가 이웃 사람과 밭 境界를 가지고 다툼이 벌어지더니 이웃 사람이 官家에 王氏라고 密告하여 붙잡혀 오게 되었는데, 오히려 朝廷에서는 崇義殿 府使(崇義殿副使)라는 官職을 내려주었다. 뒤에
왕순례
(王循禮)라는 이름도 내려졌다.
滅族令을 避해 王氏들이 王과 비슷한 글字인 田, 全, 玉, 車, 申 等으로 變成하였다는 說이 있다. 왕제구 開城王氏中央宗親會 事務局長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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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說이 있다. 하지만 다 그렇다는 確信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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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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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