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플리니우스 歲쿤두스
(
라틴語
:
Gaius Plinius Secundus Major
,
23年
~
79年
8月 24日
)는
古代 로마
의
博物學者
, 政治人, 軍人이다.
로마 帝國
의 海外 領土 總督을 歷任하는 한便, 自然系를 아우르는 百科事典 《
博物誌
》를 著述했다. 一般的으로는
臺플리니우스
로 불린다. 조카인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카이킬里우스 歲쿤두스
(小플리니우스)는 文人 政治人이었으며, 養子로 삼았다. 本文에서 Secundus는 라틴語로 2, 둘을 뜻하는 duo를 數字를 세는 搜査인 序數詞로써 쓴 體言이므로, 가이우스 플라니우스 2歲라고 옮길 수 있다.
이탈리아 北部
의
노붐 코뭄
(現在의
코모
)에서 태어났다. 플리니우스는 思想的으로
스토아 學派
의 論理와 自然哲學과 倫理學을 信奉하고 있었다. 스토아 學派의 첫 番째 目的은 自然法則에 따라 德이 높은 삶을 것이며, 自然에 對한 理解를 必要로 했다. 조카인
소 플리니우스
에 따르면, 플리니우스는 새벽부터 일을 始作해 工夫하는 時間을 除外한 모든 時間 浪費라고 생각하고, 讀書를 멈추는 것은 浴槽에 들어가있는 時間 뿐이었다 한다.
[1]
23살 때 軍隊에 들어가
게르마니아
遠征에 從軍했다. 50年代에 로마로 돌아
法學
을 工夫했지만
修辭學
으로 成功하지 못하고 學問 硏究와 著作에 專念했다. 70年頃부터 72年에 걸쳐
히스파니아
,
타라코넨시스
(스페인 北部)에 皇帝 대관으로 赴任했다. 이때 現在는
世界 遺産
이 된
라스메두라스
에서 採光 作業을 接했다. 마지막은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直接
베스파시아누스
皇帝
를 섬기는 要職에 올랐다. 이 業務는 하루의 거의 大部分을 자유롭게 使用할 수 있었기 때문에, 플리니우스는 積極的으로 펜을 들고, 로마 歷史 31卷을 整理해
네로 皇帝
의 時代에서 資料를 整理 繼續해 《博物誌》 37卷의 거의 大部分 分量을 다 썼다고 한다.
베스非우스 火山 爆發
때
微細눔
의 艦隊
司令官
으로 勤務하던 中에
베수비오 火山
이 뿜어낸
有毒 가스
에 窒息하여 殉職하였다.
[2]
플리니우스의 著作物은 모두 102個에 達하지만, 現存하는 것은
77年
에 完成된 《
博物誌
》(
Naturalis Historia, 우리말로 옮기면 《自然의 歷史》
) 뿐이다. 自然과 藝術에 對한 最初의 刊行物이었던 37卷은 自然, 人文 等 各 方面에 걸친 知識의 報告로서 많은 誤謬를 지니고 있으나, 資料로서의 價値는 無窮無盡해서 《코스모스》에서 言及된 적이 있다. 이 밖에 軍紀,
歷史
,
哲學
,
文法
에 關한 著作이 있으나 모두 消失되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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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버트 헉슬리
의 우에마츠 야스오 驛 "西洋 自然主義 列傳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다윈까지" 悠書館 2009年
- ↑
소 플리니우스, 《書翰集》 3卷 5張 및 6卷 16張 參照. 그러나 窒息死가 아니라 다른 病으로 죽었다는 主張도 있다. 이에 關해서는 Jacob Bigelow(1859)와 Conway Zirkle(1967) 參照.
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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