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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키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가부키 ( 日本語 : 歌舞伎 )는 日本 의 傳統 公演 藝術이다. 모든 出演者는 男性 이며, (能)와 달리 女性役을 맡은 俳優는 女性的 發聲을 한다. 專用 劇場인 가부키子(歌舞伎座)에서 공연된다. 日本의 主要無形文化財이며, 유네스코 指定 世界無形遺産 으로 登錄되어 있다.

1858年 7月 에도 이치무라자에서 上演된 《時哱囉쿠》

用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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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키란 말은 '머리를 기울이며 맘대로 을 추기'란 意味를 가진 '家部쿠'( カブク, 傾く )란 單語에서 由來되었다. 異常한 動作이나 服裝을 '가부키'라고 하고, 그런 動作및 服裝을 하는 人物을 '가부키모노'라고 불렀다. 歌舞伎 란 單語로 定立된 것은 에도時代에 이르러 이루어지었다.

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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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라쿠 , 卽 닌교조루리 와 견주어지는 에도 時代 의 民衆劇人 가부키는 17世紀 初葉에 생긴 것이므로 現在까지 約 370年의 歷史를 갖는 셈이다. 그 母胎는 中世 末期부터 庶民 사이에 퍼지기 始作한 後流(風流)라고 하는 民俗藝能 乃至 風俗 舞踊이었는데, 그 成立·發展의 過程은 決코 單純한 것은 아니었다. 그 時代의 庶民의 마음과 感覺을 反映시키면서, 한瞬間도 停止하는 일 없이 모든 것을 吸收, 消化하여 生成, 變貌함으로써, 오늘날 볼 수 있는 複雜한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 成長의 모습을 蒼生記(倉生期:1603-1651), 확립기(確立期:1653-1724), 發電機(發展期:1724-1803), 爛熟期(爛熟期:1804-71), 繼承機(繼承期:1872-現在)의 5個 時期로 나누어 살펴본다.

蒼生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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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니 가부키도 屛風(阿國歌舞伎圖?風)
誤쿠니는 오른쪽에서 네 番째 屛風에서 칼을 어깨에 걸치고 있는 女人

가부키의 祖上으로 알려진 이즈모 오쿠니 교토 의 기타노 神社(北野神社) 等에서 처음으로 念佛춤을 추어 市民들의 큰 歡迎을 받고 가부키 춤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1603年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公認된 舞臺 藝能이라면 宮中이나 大神師不恪의 무악(舞樂)이나 신악(神樂) 및 校겐 뿐이었다. 그러한 터에 女性의 藝能 集團이 몰려들고, 더욱이 假面도 쓰지 않고 다채로운 衣裳을 휘날리며, 豐滿한 遲滯를 보이면서 노래하며 춤을 추니, 사람들이 그 처음 보는 光景에 興奮하고 기뻐 날뛰었으리라는 것은 능히 斟酌이 가는 일이다. '가부키'라는 呼稱도 여기서 나오게 되었다.

勿論 그 以前부터, 女性 사루가쿠 (猿樂)이라든가 女性 救世마이 (曲舞), 時라嚆矢 춤(白拍子舞) 等은 떠돌이 延期人들이 延期함으로써 庶民들 사이에서 人氣를 얻고 있었으며, 그 溪流의 女性 演技者들을 包含하는 後流 춤(風流踊)李 갑자기 盛行하고 있었다. 誤쿠니를 爲始한 女性 劇團도 그 一派였다. 그러나 그 女子 演技人이 單純한 나그네 演技人으로서가 아니라, 비록 貧弱한 臨時 建物이었기는 하나 교토의 한복판에 堂堂하게 建物을 세우고 盧와 校겐 等을 들고 나와서 女性의 肉體的 魅力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채리티 쇼(charity show)를 한다는 것은 세키가하라 戰鬪 가 1603年에 끝나고, 겨우 全國의 亂世와 中世의 주박에서 解放되게 되자 비로서 可能한 것이었다.

校겐 系統의 원約(猿若)이라는 寸劇을 곁들인 오쿠니 等의 女人 가부키는 全國을 뒤흔들었으나, 遊女(遊女)를 겸하고 있는 本來의 性格 때문에 美風 良俗을 크게 어지럽게 하였고, 幕府 는 마침내 1629年 女子 藝能人의 登場을 禁止시켰다. 그리하여, 메이지 24年 新派 (新派)에서 女俳優가 登用될 때까지인 262年 肝은 日本의 公認 劇場에서는 女俳優를 볼 수 없었다. 그 代身 人氣를 獨차지한 것은 아름다운 少年의 노래와 춤으로 이뤄지는 이른바 와카슈 가부키(若衆歌舞伎)였다. 그러나 이것도 藍色(男色:衆道라고도 하며 同性愛)의 流行을 가져오고 그 弊端이 甚하였기 때문에 幕府는 1652年 또다시 全面的인 禁止令을 내리게 되었다. 오쿠니 가부키와 와카슈 가부키는 이렇게 彈壓을 當하고는 나타나지 못하였으나 民衆의 要求는 그치기 어려웠으며, 드디어 가부키는 形態를 바꾸어서 再興, 바로 새로이 '劇(劇)'으로서의 出發點에 섰으니, 그것이 成人 男性만 出捐하는 '야로 가부키(野郞歌舞伎)'였다.

확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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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키의 再興을 위하여 幕府가 提示한 許可 條件은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俳優의 앞머리칼을 자름으로써 와카슈 모습이 아니게 나타낼 것, 또 다른 하나는 노래와 춤을 적게 함으로써 흉내내기 校겐 을 主로 할 것 等이었는데, 어느 것이나 다 煽情性에 對한 規制였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이미 刹那的인 性的 魅力에만 依支할 수는 없게 되었으므로 必然的으로 가부키는 드라마로서의 內容의 充實, 그 舞臺表現의 政治(精緻)와 變化成果 規模의 擴大, 演技의 事實性에로 向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것은 演劇으로서는 플러스가 되었다.

그 後 1664年에는 에도 오사카 에서 同時에 繼續하여 校겐(多막물)李 初演(初演)되었다. 1670年代에는 드디어 에도와 교토, 오사카 等地에서 가부키 演技의 基礎가 確固하게 다져졌다. 大道具(大道具)가 發達하고, 의 舞臺(能舞臺) 그대로의 形態였던 舞臺도 繼續 擴張되더니, 이윽고 하나미치(花道)를 派生시켰고, 半野外(半野外)였던 것이 室內 劇場이 되었다. 그리고 內容·樣式 모든 面에서 中世를 脫皮하여 에도 時代 의 獨自的인 庶民 演劇으로서 確立되어 갔다.

發電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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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4年엔 닌교조루리 劇作家인 지카마쓰 몬자에몬 이 死亡했고 1803年은 겨우 文化문정(文化文政)의 爛熟時代에 들어가려는 全會點(轉回點)이었다. 이 時期는 에도의 아라故土게이 (荒事藝)의 藝術的인 大成功이 한便에 있는데, 主로 人形世界에서 連發되는 名作 조루리 가 共히 가부키에 全面的으로 採用되게 되어서 이른바 '幾多儒敎겐'이라는 하나의 큰 블록이 形成되어 가는 時期이다. 그것은 同時에 또한 幾多有婦視 샤미센 音樂 要素가 가부키의 延期·演出에 크게 參與하게 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音樂劇的人 樣式을 特色으로 하기에 이른 過程이기도 했다. 샤미센 音樂의 發達에 따라 舞踊劇의 發達이 促進된 事實도 看過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時期의 初期 30-40年間은 닌교조루리가 훨씬 優勢하였다. 이는 偉大한 지카마쓰 몬자에몬의 劇文學上의 業績이 그 原因(遠因)인데, 지카마쓰 死亡 後 10年이 經過했을 때, 人形 操縱士 요시다 分사부로 (吉田文三郞)가 오늘과 같은 3人 操縱 方法을 完成한 事實이, 人形劇 發展의 牽引車가 되었다. 精巧한 人形은 人間에게 肉薄할 程度의 생생한 表現力을 獲得하고, 더욱이 人間의 現實性을 超越한 料米幻想美(妖美幻想美)의 世界를 現出한다. 基多柳(義太夫)가 年 다케모토子(竹本座)와 거기서 갈라져 나간 도요타케子(豊竹座)는 서로 競爭的으로 조루리의 名作을 내었다.

爛熟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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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4年은 幕府의 에도 文化도 最後의 爛熟期를 거쳐, 幕府의 末期로 접어드는 起點이며, 4歲 쓰루野 難保쿠 (鶴屋南北)가 諧謔美가 가득 담긴 《덴地쿠 도쿠베에(天竺德兵衛)》를 發表하여 世上을 놀라게 한 해이다. 1871年은 幕府 末期의 가부키의 惰性이 終局(終局)에 이르는 해이다. 이 時期에는, 에도에서 가난한 庶民을 리얼하게 그려내는 歲精巧겐(世情狂言)이 續續 생겨나오고, 妖怪舞踊(妖怪舞踊)도 받아들여져 複雜한 舞臺 器具, 트릭, 演出, 게者音樂(下座音樂) 等이 매우 精巧하게 完成되는 時代이다. 《덴地쿠 도쿠베에》로 名聲을 얻은 쓰루野 난보쿠는 奇拔한 發想과 銳利한 人間 洞察로 商家의 下層 社會를 자유로이 그려냈으며, 1825年에는 集大成的(集大成的)인 名作 《試打니카이團(四谷怪談)》을 썼다.

繼承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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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에서 西洋의 立志傳(立志傳) 作品의 劇化가 上演된 것은 메이지 5年(1872)인데 그 後 劇場은 洋風을 받아들여 擴大되고, 文明開花나 西歐化 風俗을 그려낸 作品이라든가 事實 尊重注意 가부키교겐의 1種인 活力極(活歷劇) 等이 생겨났으며, 이윽고 政府가 中心이 되고 9歲(九世) 理致카와 段쥬로 (市川團十郞)가 이에 呼應한 演劇 改良運動度 일어났다.

그러나 메이지 21年, 新派가 發生하고, 40年頃에 新劇運動이 일어나는 情況 속에서 가부키는 結局 新時代적 演劇을 向한 自己革命을 이룩함 없이 傳統演劇과 苦戰藝能으로서 繼承된다는 基本線(基本線)을 定하였다.

가부키 俳優의 特殊性과 傳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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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키는 이즈모 오쿠니 以來, 女子는 男裝을 하고 男子는 女裝을 함으로써 反自然的(反自然的) 世界를 만들어내어 온 것이었다. 內部에 潛伏한 賣淫生活 같은 것을 包含시켜서 1種의 不可思議한 美(美)에 떠받쳐진 것이 가부키의 美이며, 그것을 나타낸 것이 技藝(技藝)이다. 父母·子息의 關係도 極 위에서는 스승·弟子가 되었다.

演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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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키는 무엇보다도 形態를 重要視한다. 그러니까 進行 中인 舞臺의 어느 한 瞬間을 잘라서 들여다보아도, 俳優의 個個의 모습으로부터 다른 俳優와의 均衡·位置, 또 衣服·假髮·小道具·舞臺裝置 等과 어울려서 恒常 한幅의 그림이 되어 있게 마련이다.

가부키의 演出에서 一貫되고 있는 것은 그 樣式性이다. 더욱이 大使는 리드미컬한 表現 形態를 取한 채, 所謂 게者音樂(下座音樂)을 隨伴하고, 舞臺 效果에 該當하는 非·바람·물소리, 또 눈 내리는 소리마저도 音樂化해서 表現한다. 이런 點에서 볼 때, 가부키는 一種의 뮤지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單純히 樣式的이라고 해도 그 演出 內容은 매우 複雜하다. 그 演劇史(演劇史)가 보여주듯이, 民俗藝能, 노, 老巧겐, 닝교조루리의 影響을 받아 그것이 가부키 속에서 發展해 감과 同時에, 가부키 自體에서도 時代의 움직임이라든가 俳優·作家에 따라서 끊임없이 새로운 傾向을 지닌 演出이 생겨나고, 또한 이것이 展開되어 갔다.

가부키의 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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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키는 本來 俳優의 技藝本位(技藝本位)의 演劇이다. 따라서 演出의 創造 過程은 個個의 俳優들이 考案한 演出을 于先 尊重하고, 이것을 主演俳優가 하나의 앙상블로서 整理해 간다. 이 點은 西유럽의 近代劇의 演出者라는 第3者가 一貫된 意圖에 따라 統括하는 것과는 根本的으로 다른 點이라 하겠다.

兄(型)이란 俳優 또는 關係者들이 創造해 낸 表現形式을 말하는 것인데, 臺本의 個數補足(改修補足), 演技演出, 火葬, 假髮(머리에 꽃을 꽂는 等), 大道具(大道具), 小道具, 게者音樂 等의 全體에 걸쳐 있어 넓은 範圍이며, 그 數도 매우 많다. 그러나 그 中에서 表現形式으로서 適切한 境遇, 當然히 거기에는 傳承이 行하여져, 다음 演出의 基礎가 된다. 이른바 名俳優인 理致카와 단쥬로의 兄이라든가 하는 式으로 불리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上演에 當到해서 全部를 踏襲하는 境遇도 있는가 하면, 一部만을 이어받고 기타는 俳優 自身의 解釋과 硏究를 添加시켜서 上演하는 수도 있다. 그때는 또 그 俳優의 兄으로 되어서 다음 時代로 넘어가 남게 된다.

가부키에서 派生된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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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誤下코(十八番)?: 第7代 理致카와 段쥬로 가 이에노게(가부키 俳優 집안의 特技)로 選定한 18個의 祕法을 가부키쥬下치반이라고 한다. 十八番을 誤하코라고 訓讀하는 것은, 그 祕法을 적어놓은 文書를 箱子(하코)에 넣어둔 것에서 由來한다고 한다. 여기에서 가장 自信있는 臟器를 뜻하는 單語가 되었다. 韓國語 에도 "十八番"이란 單語로 流入되어 있다.
  • 쿠로코(?子)?: 얼굴까지 가리는 검은色 服裝을 着用하고 舞臺裝置를 바꾸는 人物을 쿠로코라고 한다. 그들의 活動은 實際로 存在하나 가부키에서 검은色은 '無(없을 무(無))'를 뜻하기 때문에 그 存在는 없는 것으로 設定되며 보이지 않는 存在로 여겨 주는 것이 觀客과 約束되어 있다. 이런 特徵 때문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활개치는 人物을 쿠로코라고 하기도 한다. 獨特하고 재미있는 存在感 德分에 日本漫畫 게임 等에 자주 活潑하게 登場한다.
  • 시로코(白子)?: 基本은 쿠로코와 同一하나 服裝과 活動, 存在 設定이 다르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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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 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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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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