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찬
(黃錦燦,
1918年
8月 10日
[1]
~
2017年
4月 8日
)은 江原道 束草 出生의 詩人이다. 〈文藝〉에 詩 〈慶州를 지나며〉(1953년), 《
현대문학
》에 〈접동새〉, 〈餘韻〉(1955年) 等이 推薦되어 文壇에 데뷔했다.
平生 總 40卷의 詩集을 펴냈으며, 生活 속 文學과 '多作(多作)'을 强調하며 時 2000餘篇을 비롯한 8000餘篇의 作品을 남기며 文學界 元老의 班列에 올랐다.
[2]
1918年
8月 10日
江原道
束草
(當時
襄陽郡
도천면)에서 태어났다. 열네살 때
咸鏡北道
성진
에서 小學校를 다니던 時節, <아이生活>이란 靑少年 雜誌를 보면서 作家가 되기로 決心했다.
[3]
解放 後 咸北 성진에서
江原道
로 내려와,
1946年
부터 9年間
江陵
에 살았다. 敎職 生活을 보내면서도 文人들을 여럿 길러냈고,
1952年
에는 詩同人誌 <靑葡萄>를 만들어 活動하였다. 이때의 活動은 江原道 文學을 발전시켰다는 評價를 받고 있다.
[3]
以後
1953年
文藝로 文學界 登壇
[4]
이어 是認
박목월
의 推薦을 받아 <현대문학>에 詩를 寄稿하며 文學界에 登壇했다.
[2]
[5]
1954年
서울
龍山區
후암동
으로 移徙한 後
敦化門로
의
初動敎會
에서 信仰 生活을 始作했고, 이때부터의 經驗이 그의 文學世界에 基督敎的 바탕을 깔게 되었다.
[3]
1965年
첫 詩集 〈現場〉을 내고 活潑한 文學 活動을 벌였다. 以後 〈五月나무〉(1969)와 〈나비와 噴水〉(1971), 〈午後의 漢江〉 (1973) 等의
詩集
을 出刊하며 數十餘 卷의 詩集을 냈다. 草創期 作品은
時調
敵 發想에서 비롯된
鄕土
色이 많았다. 以後 現實性이 剛해지며 敍述的 表現을 통한 아름다운 詩句를 남겼다.
[2]
文學 元老로써 弟子들에게도 尊敬받는 先生이었는데,
2016年
백수연 行事에서 弟子
김문중
詩人 外 多數으로부터 2018篇의 筆師집을 憲政받았다. 弟子들을 中心으로 그의 이름을 단 文學館 建立도 推進 中에 있으며, 後輩들에게
노벨 文學賞
候補로 推薦되기도 했다.
[2]
2017年
4月 8日
, 午前 4時 40分 江原道 橫城의 自宅에서 健康 惡化로 인해 享年 99歲로 숨을 거두었다.
[5]
41番째 詩集을 準備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4月 11日에 發靷을 거쳐
京畿道
安城市
初動敎會 公園 墓地에 安葬됐다.
[2]
現在 황금찬 是非는 月刊 示唆文壇史가 2007年 南楊州 北漢江 野外 公演場에 세웠고 황금찬 詩人이 별이 뜨는 江마을에란 詩를 獻詩하여 새겨진 이 北漢江文學碑는 2017年 9月 고 황금찬 先生의 形象과 略歷을 새겨 完成되었다.
[6]
한便 황금찬 先生의 是非 建立完成에 맞추어 2017年 11月 4日 南楊州 北漢江文學祭에서 第 2回 北漢江文學賞 大賞에 마경덕 詩人이 選定되어 황금찬 先生과 가장 詩文學 世界에 密接한 作品 <놀란흙>이 選定되었다. 이날 황금찬 先生의 遺族인 둘째 아들 황도정氏가 황금찬 是非 完了 除幕式에 參加하였다.[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