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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계훈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홍계훈 (洪啓薰, 1842年 ~ 1895年 )은 朝鮮 後期의 武裝 兼 政治家이다. 조선국 忠淸道 監査 等을 지냈다.

홍계훈
洪啓薰
조선국 忠淸道 監査
任期 1887年 8月 11日 ~ 1894年 3月 2日
君主 高宗 李兄

이름
別名 字는 城南(聖南), 號는 규산(圭珊)
身上情報
出生日 1842年
死亡日 1895年 10月 8日 (享年 54歲)
國籍 朝鮮
正當 無所屬
本館 南陽(南陽)
宗敎 儒敎 ( 性理學 )

初名은 홍재희 (洪在羲), 本貫은 南陽 (南陽) . 字는 城南(聖南), 號는 규산(圭珊)이다.

生涯 編輯

신원은 確實치 않으나, 武士 집안 出身이었다. 武藝廳 別監으로 官職을 始作한 그는 1882年 8月에 일어난 壬午軍亂 當時 守門將 [1] 으로 명성황후 를 누이로 속여서 明成皇后 閔氏를 업고 避身시킨 뒤 京畿道 驪州 로 護送했다. 그 功으로 出世하였다. 1887年 忠淸監査 1894年 壯衛營 領官(領官)을 지냈다. 그해 東學農民運動 이 일어나자 양호초土沙(兩湖招討使)로 出戰하여 全州를 奪還하고 그 功으로 訓鍊大將이 되었다.

1895年 陰曆 8月 20日(陽曆 10月 8日 새벽5時 50分,6時) 乙未事變 때 少數의 都城守備臺 兵力을 이끌고 光化門 앞에서 日本軍과 日本이 훈련시킨 訓鍊隊의 우범선 , 이두황 等 親日派 軍人 內通者들을 막다가 죽었다. [2] [3] [4]

事後 編輯

評價 編輯

黃玹 은 《매천야록》에서 洪啓薰을 “卒兵에서 일어나 높은 地位에까지 올랐는데, 人品이 恬潔(廉潔)하고 謹愼(勤愼)했다.”라고 好評했다. 黃玹이 明成皇后와 聯關된 人物中 거의 唯一하게 好評한 人物이다.

洪啓薰을 演技한 俳優 編輯

各州 編輯

  1. 西班 種4品
  2. 《고종실록》에서는 光化門 밖에서, 《 한국통사 》에서는 勤政殿 쪽에서, 박은식, 《 한국통사 》(김승일 驛, 범우사. 1997) 194쪽.“새벽녘에 西大門에 이르자 訓鍊隊와 日本軍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行軍 했고, 날이 샐 무렵 光化門에 到着하여...약간의 死傷者가 發生했다. 聯隊長 홍계훈(洪啓薰)李 消息을 듣고 달려와 큰소리로 이들을 꾸짖다가 日本病에게 殺害되었고, ... ”,《大韓季年史》에서는 宮闕 안에서 칼을 맞고 죽었다고 하였다. 또 《 매천야록 》에서는 銃을 맞고 쓰러진 뒤 며칠 뒤에 죽었다고 되어 있다.
  3. 이사벨라 비숍 은 《韓國과 그 이웃들》에서 日本 將校의 칼에 被襲된 뒤 여덟 발의 銃彈을 맞아 致命傷을 입었다고 썼다.
  4. 한영우 (2001年 10月 20日). 《明成皇后와 大韓帝國》 初 1刷판. 서울: 효형출판. 53~54쪽쪽. ISBN  89-86361-57-4 .  

같이 보기 編輯

參考 文獻 編輯

  • 고종실록
  • 매천야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