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8年
펜실베이니아주
수더튼 (Souderton, PA)에서 태어났다. 그의 父母님을 따라 獨逸
改革敎會
人 임마누엘 레이디스 處置(Immanuel Leidy’s Church)에 出席했다. 아버지가
幼兒洗禮
를 믿지 않았고 어머니 亦是
再洗禮派
였기에 헨리 아펜젤러는 14살이 되던 해인 1872年 11月 8日 出席敎會에서 洗禮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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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체스터 州立師範學校에 入學하여 學校를 다녔다. 마침내 1876年 10月 1日, 웨스트체스터 長老敎會에서 回心하였는데 '靈的으로 거듭난 날'로 平生 記憶하였다. 以後 델라웨어 카운티 公立學校에서 敎職生活을 하였는데, 이는 後에
大韓帝國 高宗
이 아펜젤러의 敎育宣敎를 信賴하는 契機가 되기도 하였다. 헨리는 아버지의 支援으로 獨逸 改革敎會 神學校인 프랭클린 앤 마셜 칼리지(Franklin and Marshall College)에 1878年에 入學하였다. 그러나 監理敎會 사람들과의 交際에서 靈的인 滿足感을 느끼고 漸次 改革敎會보다 훨씬 便하다고 느끼기 始作했다. 結局 苦悶 끝에 1879年 4月 21日 랭카스터 第一監理敎會 祈禱모임과 聖經工夫를 出席하며 監理敎로 籍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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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에서는
그리스어
와 文學에 關心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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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프랑스語
와
히브리어
,
코이네 그리스어
도 修學했다.
[7]
괴테
文學 동아리 會長을 맡기도 했다.
[8]
헨리 아펜젤러는 필라델피아 宴會에서 傳道師 按手를 받고, 랭카스터 第一監理敎會에서 傳道師로 暫時 일을 始作하였다.
[4]
1881年 2月 19日에는 宣敎師의 召命을 느끼기 始作했다. 結局 1882年에
뉴저지州
의 메디슨에 있는 監理敎 神學校인
드류 神學校
(Drew Theological Seminary)에 進學했다. 海外宣敎에 對한 비전은 2學年인 1883年에 神學校 간 宣敎師 聯盟'(The Inter-Seminary Missionary Alliance)을 參席하며 갖게 되었다.
[9]
처음에는 日本 宣敎師가 되고자 했는데, 韓國宣敎를 準備하던 親舊 워즈워스(Wadsworth)가 重病에 걸려 韓國宣敎를 갈 수 없게 되자 그 代身 韓國으로 宣敎를 決心하게 되었다.
[10]
[11]
또 같은 해에 學校에서도 頭角을 나타내 第4回 全國神學生 宣敎大會에 드류神學校 代表로 參席하기도 하였다.
[9]
朝鮮으로 宣敎를 決心했던 것에 反해, 監理會 宣敎國에서는 아펜젤러를 派送하는 것에 모두가 贊成한 것은 아니었다. 朝鮮宣敎를 위해 2,000달러를 喜捨한 佳友처 牧師는 經歷이 있는 宣敎師를 派送해달라고 直接的으로 要請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監理會 本部에서 中國 및 朝鮮 派送 宣敎師에 對한 任命權을 가지고 있던 찰스 파울러 監督이 아펜젤러를 辯護하여, 結局 佳友처 牧師를 說得해 아펜젤러를 朝鮮 宣敎師로 派送키로 決定하였다.
[12]
以後 1884年 12月 17日에는 엘라 닷지(Ella J. Dodge)와 某敎會人 랭커스터 第一監理敎會에서 結婚하였다.
아펜젤러는 1885年 1月 14日 드류大學校에서 派送禮拜를 받아
샌프란시스코
로 出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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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에 到着한 뒤 2月 2日에 自身을 朝鮮 宣敎師로 派送되도록 힘쓴 파울러 監督에게 牧師 按手를 받았고, 이튿날 아내와 함께 아라빅號(S. S. Arabic)에 乘船하였다. 아라빅號에는
윌리엄 스크랜턴
과 그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
이 同乘했다. 이들은 2月 27日
요코하마港
에 到着했다. 요코하마에서는 3月 5日
로버트 새뮤얼 매클레이
宣敎師가 야오야마 에이와 學院(英和學院)에서 開催한 第1回 韓國宣敎師會에 創立멤버로 參席하였다. 여기에는 매클레이 夫婦, 스크랜턴 夫婦, 메리 스크랜턴, 아펜젤러 夫婦, 그리고
박영효
와
이수정
이 參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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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3月 23日 요코하마에서 出發하여
고베
를 經由하고 3月 28日에
나가사키
에 暫時 머물렀다. 그리고 3月 31日
長老敎
宣敎師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와 같은 배를 타고 釜山으로 出發하였다. 같은 날, 監理會 本部는 朝鮮宣敎部 監理使에 매클레이를, 不監理使에 아펜젤러를, 宣敎部 會計에 스크랜턴을 임명했다.
[14]
釜山은 4月 2日 아침에 到着했고, 하루를 머물러 4月 3日에 釜山을 出發해 仁川
濟物浦港
을 向했다. 마침내 復活主日인 1885年 4月 5日, 監理敎의 아펜젤러와 長老敎의 언더우드가 仁川 濟物浦에 발을 디뎠다. 아펜젤러 夫婦는
대불호텔
에 到着했는데, 當時
駐韓美國公使
代理였던
조지 클레이턴 포크
가 아펜젤러 夫婦의 入國을 挽留했다.
[15]
[16]
甲申政變
直後라 政局이 不安하고 妊娠한 女性이 生活하기에는 不適切하다는 理由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언더우드만 서울로 向했고, 아펜젤러는 포크의 助言을 받아들여 짐은 그대로 두고 夫人과 함께 日本으로 돌아갔다가, 7月 29日에 서울에 들어와 첫 禮拜를 보았다. 入國後 아펜젤러 夫人은 1885年 11月 9日에 딸 앨리스를 서울에서 順産했다. 이 아기는 韓國에서 태어난 最初의 西洋 아기로 알려져 있다.
[15]
1885年 8月 3日부터 靑年을 모아 英語와 新學問을 가르치는 敎育 事業을 始作했다. 다음해인 1886年에 人員이 漸次 增加하여 20名이 넘어서자 高宗이
배재學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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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이름과 함께 懸板을 하사하였다.
[18]
1885年 10月 11日 私邸에서 드린 盛饌 禮拜를 始作으로 敎會를 設立하였는데, 漸次 參席 人員이 늘어남에 따라 1887年 9月에 좀 더 큰 空間을 購入하여 禮拜堂을 옮겼다. 이것이 後날
정동제일교회
가 되었다.
[19]
[20]
1891年에는 仁川地域 聖徒들을 위해 仁川 中區 내동에
내리敎會
도 設立했다. 韓國에 聖書 飜譯部가 생기자
언더우드
,
게일
等과 함께
마가의젼한복음셔언해
,
보라달로마인셔
等 聖書의 國譯에 參與하였다.
[21]
敎育 方式을 暗記보다는 判斷을 强調하는 方式으로 고치는 데 貢獻하였다.
1902年
44歲가 되던 해에 仁川에서 出發하여
全羅南道
木浦
로 가던 日本배인 驅魔가와마루와 같은 會社所屬人 기소가와마루가 於靑島 西北方 2-3海里 地域에서 衝突해 驅魔가와마루가 沈沒하면서 朝鮮人 女學生을 救하려다 溺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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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特別市
麻浦區
합정동
楊花津
宣敎師 墓地에 있는 아펜젤러의 墓地는 家廟이다. 屍身은 아직 女學生과 調査 조한규와 함께 於靑島 바다 밑에 있을 것으로 推定하고 있다.
아들인 H. D.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Dodge, 亞扁薛羅2世, 1889~1953)도 亦是 韓國에서 宣敎師로 活動하였다.